화해와 공생의 길
눅17:11-19
2005년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패전 60주년의 해입니다. 동시에 재일 동포나 우리 조국에 있어서는 해방, 즉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또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의 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금년은 일본에 의해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해서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이웃 나라의 관계로서는 최근, 일본이 다케시마라고 말하는 독도의 문제나 중국과의 영토권을 둘러싼 센카쿠 諸島의 문제,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에 의해 한국이나 중국에서의 반일 감정이 부풀어 올라 왔습니다. 그것에 의해 중국과 한국에서 일어난 데모나 폭력적인 사태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 여러나라와 서로 화해와 공생의 길을 걸을 수가 있는가를 함께 모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폭넓은 신앙의 힘과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의해 모든 난관과 불가능한 장벽들을 넘길 수가 있는 원동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이좋게 화해를 창출해 살아 가는 기쁨을 나눌 수가 있으면 좋으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있던 본문을 보면 주 예수를 만난 한센씨병, 즉 나병환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본어에 의한 신공동번역 성서에는「문둥병」이라는 용어가 [극심한 피부병]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나병으로 불리고 있는 문둥병의 균은, 1873년 노르웨이의 한센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만성전염병입니다만 전염성은 매우 약하고 유전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문둥병」에 대한 편견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문둥병균 발견자의 이름을 취해서 <한센씨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프로밍이라는 약의 출현에 의해 문둥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라 치료할 수 있는 병이 되었습니다. 한센씨가 병원균을 발견하는 것으로 인해 문둥병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게 수정되었던 것은 문둥병 환자에게는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들 주변에는 여전히 선입견이나 인종차별 문제등이 있어,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아 갈 수가 없는 현실이 있어 그런 괴로움을 안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구약 당시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식민지 통치하에 놓여진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의 결혼 정책에 의해 피가 섞여버리고 맙니다. 혈통의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유대인에게는 그런 사마리아인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경멸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고, 교제하는 것을 꺼려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한센씨병에 걸린 환자들은 같은 처절한 병의 처지에 있었기에 동병상린이라고 서로가 동정하면서 차별 대우하는 일없이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병 환자인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또 율법에 의해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벤허라고 하는 영화에서도 그러한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가족으로부터 떠나 골짜기나 큰 동굴안에 들어가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어째서 내가 이런 문둥병에 걸려 버렸을까?」라고 자문했을 것입니다.
살아갈 앞 길을 보아도 뒤를 돌아봐도 하늘을 올려보아도 그들에게는 자유롭게 살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혹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표현하는 하나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는 나병 환자들은 주 예수에 관한 소문 즉 많은 환자를 치료한 예수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가 자기들이 거하는 마을을 지나 통과해 갈 때에 만나보길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3장에 규정되어 있듯이 나병환자인 그들은 주 예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서서 주 예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키리에·에레이션)」
이같이 자비를 요구하며 겸손하게 기도하는 소리를 주 예수는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이번 회의를 통해서 아시아의 평화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와같이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그들의 절규를 듣고 불쌍히 여겨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같이 말한 것은 당시의 문둥병 환자는 만약에 나병이 치료되었다면, 회복되었다고 하는 증명서를 제사장에 가서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한 예수의 말에는 이미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환자들은 주 예수의 말을 듣자마자 곧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도중에 극심한 피부병인 문둥병이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안에서 주 예수가「문둥병을 고쳐 주마」라고 말하지 않고 「제사장에 가고 나서 몸을 보이라」고 말한 것에 주목을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는 두개의 의미를 생각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주 예수가「제사장에 가고 나서 몸을 보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 이미 치료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 예수가 기적을 베풀 때에도 하인들에게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 가라」고 말했습니다. 벌써 물을 포도주로 바꿀 것을 결정하고 계셨습니다.
두번째 예수는「주 예수 자신의 말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예수로부터 이 말을 들은 열명의 문둥병 환자들은 처음에는 몹시 불안했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곳에까지 가서 혹시 병이 낫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나? 제사장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는데」이러한 의구심, 불안, 염려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뢰에 이르기까지는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 불안과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의 말에 신뢰를 지니고 나아갈 때에 좋은 결과로 연결됩니다. 문둥병 환자들이 제사장에게 가기로 결심해 발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에게는 큰 변화가 생긴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문둥병 때문에 심한 피부병이었던 부분이 치유되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 보며 만져대며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가득 넘쳤을 것입니다.
본문 15, 16절에는,「그 중의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알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하며 감사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인이었다 」고 했습니다.
10명의 환자가 치료되었습니다만 그 중에 다만 한 사람만이 주의 은혜에 감사하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 예수의 발 아래서 감사했습니다. 이 때 주 예수는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 하였느냐. 다른 9명은 어디에 있는가. 이 외국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말해였습니다.
여기서 주 예수의 말은 창세기 3장 9절에 있는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는 물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다른 9명은 은혜는 받았지만, 그 은혜를 잊었습니다. 어쩌면 이 9명의 유대인들은 조금 전까지는 같은 문둥병 환자로서 이 사마리아인과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그들의 병이 치료된 순간에 지금까지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갈 때에는 벌써, 외국인인 사마리아인을 소외시킨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 10명 중에 다만 한사람만이 주 예수의 기적을 기뻐하며, 그와 동시에 기적을 베풀어 주신 분을 생각해냈습니다. 나머지 9명은 기적에 만족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처럼 기적에만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10 분의 9요, 그 기적을 베푸는 분에게 감사하는 사람은 10 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본문18, 19절에「이 외국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에게 이르시되「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주 예수의 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은 한사람도 없는데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이 외국인 한사람만이 나를 찾아 왔는지」라고 말하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주 예수께 찾아와 감사했을 때에 주 예수가 말씀하신「네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인은 이와같이 문둥병의 치료를 받아 돌아와 감사했기 때문에 육신의 병만이 아니고 영혼까지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신과 영혼의 구원, 사회 생활까지의 총체적인 구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치료 받고 나서도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주 예수의 기적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에도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생각하면서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확실히 글로벌 지구화의 시대가 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하나의 사회를 구성해 살아 가기 위해서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또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는 경우,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리고 돌아와,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치료의 손을 내밀어 주시는 주 예수님이 또한 화해의 길도 보여 주시는 분인 것을 확인하고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