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리더십을 세우는 교회/벧전2:18-25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8,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절망과 좌절 속에 있는 인간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사탄은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주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가능성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옛 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비전을 받으십시오. 고난과 아픔, 기다림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의 서곡입니다.
까다로운 자에게 순복하는 리더십
우리는 베드로전서 말씀에서 진정한 리더십, 거룩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살필 수 있습니다. 18, 19절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거룩한 리더십은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복할줄 압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늘 순종합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순종하며 따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까다롭고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순종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순복하는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이런 리더십이 세상에 영향을 줍니다. 이 리더십을 따라가면 세상이 놀랍니다.
19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억울한 누명을 쓸 때가 많습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고난이 내게 온 것입니다. 억울하게 감옥가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이 참 많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억울한 누명을 써도 참으라고 합니다. 패배주의, 운명론입니까? 기독교인은 패배주의자도, 운명론자도 아닙니다. 본문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의 애마한 고난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분노하는 것은 쉽습니다. 촛불들고 시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기도할 때 변합니다. 인간의 정의가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가장 빠른 지름길은 하나님이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리더십
20절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억울하게 고난을 받으면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내게 죄가 있어서 받는 고난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죄의 결과는 심판입니다.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의 99%는 우리의 실수와 허물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은 어떤 힘이 있습니다. 누명을 썼을 때 반항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항거하면 아무런 능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성경은 한 가지 더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특별하고 신비스럽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20절 후반부에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고난입니다. 선을 행했기 때문에 얻는 고난입니다. 선을 행했는데 뺨을 맞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려워서 보증을 섰는데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선을 행하셨는데 조롱을 받고 멸시를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부름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롱당하고, 뺨을 맞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세상이 변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사 당신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 ‘거룩한 고난’, ‘성화된 고난’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런 고난을 겪은 사람이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는 반항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선택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을 맞고, 허리에 창을 찔렸을 때, 예수님이 반항하고 분노를 표현했다면 우리의 구원이 이렇게 온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 닮은 리더십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이 잘못한 것을 부모는 밖에 나가서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식의 허물을 품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부모가 대신 대가를 치릅니다. 이것이 선을 행하다 얻는 고난이요, 거룩한 고난이요, 성화된 고난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세상이 변합니다. 정의를 부르짖고, 남을 비판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울 뿐입니다. 누군가 대신 그 사람의 허물을 안고 통곡하고 손해를 보고 희생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뀝니다.
미국의 기독교가 부흥해도 공허한 것은 순교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순교자가 없는 교회는 거품입니다. 한국의 교회가 부흥해도 능력이 없는 것은 순교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온누리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요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처럼 손해보고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가십시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리더십입니다. 이렇게 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요즘 세상은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좀 더 알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003년, 절대로 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바보 같이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십시오. 교회 안에, 사회 안에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가 바보처럼 당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닙니다. 바보 취급을 받는 그 순간 다른 사람이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2003년에 온누리교회는 이런 리더십을 원합니다. 이런 신실한 성도, 예수 닮은 사람들이 온누리교회 곳곳에서 탄생하기를 축원합니다.
억울한 고난도 아니요, 죄로 인한 고난도 아니요, 의로운 일을 하다가 누명쓰고 서러운 일을 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살고 민족이 살고 가정이 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