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진정한 기쁨 눅15:1-10
지난 6월 조선일보에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설문조사 분석한 통계 자료가 나와 있었습니다. 그 통계를 보면 우리 한국 사람 4명 가운데 1명은 실업과 파산의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거나 이미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업에 대한 공포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날로 날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설문조사를 보면 성인 기혼 남녀 4명중의 한 사람은 실업과 파산의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4명의 1명으로 이미 실업과 파산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답한 사람들 중에서 한 가구의 수입이 월 70만원 이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지난해 12월에는 25%정도였으나 지난 6월 조사를 할 때는 61%로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월 300만원 이상의 수입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지난 해 12월 13.6%에서 6월에는 8.2%로 감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소득이 높은 계층은 실업과 파산의 위협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고 있었으며, 저소득층은 실업과 파산의 위협을 훨씬 더 받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정치싸움 때문에 경제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실로 무서운 함정입니다. 날마다 경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정치싸움을 보는 동안에 실업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가출하고, 그래서 노숙하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는 심철호 씨가 있습니다. 이 사랑의 전화에서 2,073명의 노숙자를 대상으로 하여 개별 면담을 통하여 그들이 겪는 고통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난 3월 30일부터 6월 20일까지 3개월간 개별면담을 한 것입니다. 이들 중에 가장 큰 고민은 구직 정보(22.4%), 숙식제공(0.3%)보다 가족문제(27.0%)가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가족문제를 상담한 사람들 중에 가족 해체라는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30.9%였습니다. 그러면 가족이 해체된 이유를 말할 때 본인이 가출한 것이 원인인 경우가 63%, 부인이 가출한 때문이 24.8% 가족이 흩어진 경우가 12.2%였습니다. 가장이 가출한 때문에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 파괴를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60%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서울과 경기도 거주자였습니다. 이러한 아픔이 앞으로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하니 걱정입니다.
지금까지는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중산층의 사람들도 소득은 줄어가고, 생계의 부담은 늘어만 가고, 물가는 뛰어오르는 3고의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중산층을 말할 때 월 250만원의 수입에 30평 정도의 아파트에 안정된 직장과 자가용을 가진 계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하향조정이 되어서 월230만원의 수입으로 내려갔습니다. 소득은 줄어들고, 생계비의 부담은 늘어가고, 물가는 뛰어 오르는 3고통에 시달릴 때 문제는 가정이 깨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유상영 박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성장과 민주화를 이끌어 온 중산층의 좌절은 그 동안 쌓아온 민주적 가치를 후퇴시키고 가족이라는 우리 사회 최후의 안전지대마저 허물어뜨릴 우려가 있다\\\"지적하고 있었습니다.
IMF시대에 듣기 싫은 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 사역 연구소가 최근 수도권에 사는 기혼 남녀를 대상으로 해서 가장 듣고 싶은 말과 듣기 싫은 말은 조사하였습니다. 가정의 남편이 아내로부터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당신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있느냐?\\\"(18%) \\\"당신 네 집안이 다 그렇지 뭐\\\"(10%) \\\"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어\\\"(7%) 이런 말에 남자들은 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 외엔 \\\"당신은 회사에서 안 쫓겨나겠어요\\\",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웬 큰 소리야\\\", \\\"옆집 아무개 아빠 좀 보세요\\\" 라는 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만히 있기나 해\\\"(13%), \\\"됐어 포기한지 오래야\\\"(11%), \\\"다른 여자들 하는 것 배워봐\\\"(11%) \\\"제발 주제 파악 좀 하고 살아\\\"(9%), \\\"당신도 돈 좀 벌어봐\\\"(8%) 순이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의 언어는 듣는 사람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리석고 비루하고 누추하고 인격에 손상을 주는 말이 아닌, 생명을 살리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언어를 주신 하나님은 이 언어로 사랑한다는 말만 해야지, 미워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상처를 냅니다.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현대 가정의 이혼율이 높은 것은 \\\"텅 빈 감정\\\"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텅 빈 가슴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가지고 가서 우리 주변의 텅 빈 가슴에 나누어주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의 진정한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눅15장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격찬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교훈의 말씀을 증류하여 가장 본질적인 것을 얻으려고 하면 그저 눅15장의 말씀만 가지면 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와 같은 당시의 죄인이라는 사람들과 사귀셨습니다. 눅15:1-2에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슴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당시에 가장 보수적이고 잘 믿는다고 했으며 정통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바리새인이나 사도개인, 또는 율법학자 서기관들은 이런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을 \\\'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 죄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고, 속히 없어졌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왜 그들을 \\\'땅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느냐 하면 세리나 창기들은 여전히 이 땅에 속하여 땅의 일만 하고 율법을 등한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들 땅의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손님으로 맞이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과 전혀 상거래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죄인이 구원받는 것보다 하루 속히 멸망당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엄격한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죄인의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말살되면 하늘에는 기쁨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의 구원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죽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들 집에 유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가르치시는 것을 보거나 말씀하는 권위를 보면 대단하신 선지자 같은데 왜 하필이면 저런 죄인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들 집에 들어가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원망 속에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목양이라는 직업을 잘 알고 있었고, 목자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도자를 목자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왕을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고 신실한 목자장이 되시고, 우리 사람들은 그분의 기르시는 양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깊은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에 대하여 연구한 책도 많고, 이야기도 수없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에 대하여 다 말씀드릴 수 없고,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목자는 자기가 맡은 양 떼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사막으로 이어지는 중동 지역에서 양을 기른다는 것은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조금 씩 있는 풀을 찾아다니며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어떤 때는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야 했으며, 또 때로는 맹수를 만나서 싸워야 하고, 때로는 강도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갑작스러운 폭우와 벼락인데 양들을 보호기 위하여 목자들은 필사의 수단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목자는 계속해서 풀을 공급해야 했고, 안전하게 보호해야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양과 하루하루를 같이하는 동안에 양의 이름을 지어주고, 양들은 목자를 따라 다녀야 살 수 있었습니다.
만일 한 마리의 양을 잃게 되면 목자는 적어도 그 양이 죽은 것을 보이기 위하여 양털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목자들은 양 떼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시 방황하는 양이 있다고 하면 무리에서 이탈된 양의 발자국을 찾는데 명수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양떼들은 대부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마을 공동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유라면 잃어버려도 자기 탓으로 돌리고 말 것이지만, 대부분이 마을 공동 소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명의 목자에게 양떼를 맡겨서 기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길을 잃은 양이 있다고 하면 맡은 목자는 그 양을 반드시 찾아내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양 떼를 몰고 오는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한 목자가 보이지 않고, 길 잃은 양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아집니다. 그러다가 목자가 마침내 길 잃은 양을 찾아 가지고 돌아오면 환성을 지르면서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에게 대하여 묘사한 가장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남의 이야기로 듣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은 양을 눈이 멀어서 길을 잃었던 모양이구나, 지독하게도 고집이 세고, 목자의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모두다 양의 잘못으로 돌리고, 목자만 고생하게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길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오셔서 나를 죄악의 수렁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져내 주셨던 것입니다. 양에게 있어 목자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수 없는 관계요, 그것은 생명의 관계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양 100마리 중에서 딱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따진다면 아흔 아홉 마리가 있으니 한 마리쯤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고생하고 아파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들에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자가 이렇게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한 마리의 경제적인 손실을 따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다가 혹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수 도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한 마리 양의 생명의 소중함 때문입니다. \\\"양 한 마리가 그만 죽겠구나, 어디선가 맹수에게 찢겨 죽겠구나, 무참하게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얼마나 아프게 죽을 것인가,\\\" 오직 생명의 소중함 때문에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한 사람을 사랑하시기를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온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으로 알아주셨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고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 동물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언제 어디서나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편의 입장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가 갔던 길도 되돌아오지 못하는 어둔한 동물입니다. 양들은 언제나 풀의 유혹에 약하기만 합니다. 목자는 양을 나무라지 않고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그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몰아세우지 않고, 찾도록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사랑입니다. 한 번 찾아보다가 피곤하다고 돌아섰다면 그 양은 영영 길을 잃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집념이 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감상적이거나 무작정 기다려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찾아 나서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식이 집을 나갔으면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뒷골목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사진을 뿌리고, 전단을 만들어 붙이고 찾아 나서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화해를 원하고 있습니까? 기다리지 말고, 찾아 만나러 가서 손을 내밀어야 화해입니다. 화해를 기다리면 안됩니다. 기다리는 화해는 가치가 없습니다. 용서 한 번 못해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찾아 나서고 행동으로 보이고, 솔선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찾아가 보세요, 엄청난 이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식을 사람 만들고 싶습니까? 잘 했다 잘못했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물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자적인 사랑으로 감싸주고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둘러멜 수 있어야 합니다. 책망도 훈계도 원망도 필요 없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어깨에 둘러메고 나올 때 양을 목자의 품에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물었습니까? 원망을 하셨습니까? 다 팔아서 갚으라고 하셨습니까? 그저 받아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위하여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진정한 기쁨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떠한 사업에 열중하고 어떠한 시설에 투자하고 세상 모든 교회의 부러움을 산다고 해도 영혼을 구원하지 않는다 하면 교회의 진정한 기쁨은 아닌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목자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많은 여인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여성명사로 쓰였습니다. 교회는 여성들의 섬세함처럼 모정의 사랑을 가져야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참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버릴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잃은 자를 찾고, 사랑으로 돌아보고, 용기를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돌아보듯이 암탉이 새끼 병아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듯이 그런 사랑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지팡이를 쥐고, 여인과 같이 등불을 높이 들고, 빗자루를 가지고 쓸어내면서 구석구석 찾아내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새대는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물질은 좀 얻었는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명예는 얻었다고 하는데 고귀한 인격은 상실하였습니다. 성공시대라고 하지만, 뒷모습은 상처투성이의 아픔 그대로였습니다. 아흔 아홉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진정한 신앙입니다. 아홉으로 만족하지 말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헌당을 위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라기는 우리는 계속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목자와 같이 또 여인과 같은 안타까운 마음과 조급한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 영혼 구원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원의 역사, 하늘 나라에서 잔치로 화답하는 영혼의 구원이 우리 교회의 진정한 사명과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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