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교회

무너지는 교회/눅13:1-9

무너지는 교회
눅13:1-9





이 세상에 실수 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인류의 위인이라고 서슴없이 추천할 수 있는 사람 중에 에이브라함 링컨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은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0살이 될 때까지 교육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농사꾼이었습니다.
링컨은 가난한 살림 ㏏??겨우 4~5살의 어린 나이에도 밭에서 어른들과 함께 중노동을 하였습니다.16세가 되어서는 머슴처럼 이리저리 품을 팔러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링컨이 책을 볼 때마다 야단을 치셨습니다.
농사일이 수 없이 밀려있는데 한가하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틈틈히 책을 읽었고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던 링컨도 큰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링컨은 목숨을 잃을뻔 하였습니다.
그의 실수는 남의험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지방 신문에 익명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서 실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자신에 대한 기사를 읽은 그 사람은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사를 쓴 사람이 링컨인 것을 알아내고서는 결투를 신청하였습니다.
링컨은 원치 않는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중간에서 화해를 종용함으로서 그 결투는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링컨은 이 사건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되겠다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후에 링컨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결코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나쁘게 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인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의 잘못을 통하여 더 나은 인격으로 성숙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다 이같이 성숙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포도원에 있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그동안 잘못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삼년이나 과일을 구하러 왔으나 항상 허탕을 쳤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일년은 용서해 주었습니다. 발육이 제대로 안되어서 조금 늦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해에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1년을 더 기다려 보자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3년째가 되어도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인은 화가나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찍어 버리겠다(7절)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과수원을 지키는 사람이 일년만 더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고 과원지기는 예수님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는 무한한 것이 아니고 유한한 것입니다.
양적으로 유한하다는 말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계속 그 모양이라면 심각한 것입니다.
그 나무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용서에 길들여져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봉사하는 것이 월례 행사가 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아니 한달에 한번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식의 배짱을 부리기도 합니다.
만약 더 열심히 하라고 싫은 소리를 하면 아예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오기도 보게 됩니다.
이런 교인들을 볼 때 참 한심합니다.
이런 배짱 큰 교인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조셉 테인터라는 영국에 고고학자가 \\\"문명의 붕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보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메소포타미야 문명, 로마문명, 이집트 문명, 마야문명 등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제국들이 왜 붕괴하였는가 하는 고찰을 하고 있습니다.
조셉 테인터는 문명의 붕괴하는 이유로 2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는 복잡성입니다.

둘째는 한계 생산성입니다.

즉 씨족 보다는 부족이, 부족보다는 국가가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잡성은 더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 효용성은 크게 떨어지기 시작할 때 그 문명은 붕괴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한다면 이익이 있으면 문화는 더욱 튼튼하게 발전하고, 이익이 없으면 무너진다는 이야기 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이익에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것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모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교인들도 이익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교인들이 교회에서 추구하는 이익은 세상의 것과는 다른 것일겁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이 교회에서 얻으려는 이익은 어떤 것일까요? 교인들이 교회를 통해서 얻으려는 유익중에 가장 첫째는 \\\'신비적 체험\\\'입니다.
신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것이나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것입니다.

사실 신비를 초월해서는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신비입니다.
그것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신비입니다.
칸트는 하나님을 철학적인 논리로 증명하려고 했지만 그 자체가 이미 불가능 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를 제외하고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배 드리는 것도 신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에 우리는 여기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꼭 기적과 이적만이 신비는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 말씀 읽는 것 이 모든 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비로운 체험이 강하면 강할수록 교회의 결집력은 강해집니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들은 하나같이 다 이와같은 신비적 체험이 강했던 교회들입니다.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던지 아니면 예배를 드리면서 불같은 은혜를 받았던지, 무언가 신비로운 체험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열심을 내게되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비적인 이익을 위해서 찾아온 곳이기에 그 신비적 은혜의 체험이 강해야만 열심을 내게 되는 것이 인간의 특성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가르쳐도 많은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보다는 오늘 가슴이 뜨거워지고 새로운 영적 신비를 체험하는 것을 더 원합니다.
그만큼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대중적인 교인들은 교회에 출석함으로 뜨거운 체험과 감동을 원합니다.그리고 그러한 감동은 진지한 말씀과의 대면에서 느끼기 보다는 훨씬더 유우머나 간증, 설교자의 언변 등 에 많이 좌우됩니다.

요즘에 유명하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 매우 재미있고, 감정에 많이 호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경에서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유우머에 익숙한 설교도 들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느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말라 하고\\\"

말씀을 듣고 울면 오늘날의 설교자와 성도들은 은혜가 충만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에 길들여지면 눈물이 흐르지 않으면 은혜가 안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우리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감정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모래 땅입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은 결국 크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7:27)

성경에서 감정적인 신앙에 기초하였다가 크게 무너진 대표적인 사건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기적과 신비를 체험하였습니다.
지팡이가 뱀이되고, 하수가 피로 변하고,
온 동네에 개구리가 퍼지고, 이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고,
파리 재앙과, 메뚜기 재앙, 우박재앙, 독종 재앙,
장자의 재앙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이 나타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땅이 갈라지고, 해가 멈추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메추라기가 장막에 찾아오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기도하면 병이 낳는 수 많은 기적과 신비와 능력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적과 신비를 체험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광야에서 저주받고 죽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홍해에서 구원하였을 때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더니 모든 계명을 다 지켜 행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심지어는 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겼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과 신비를 체험하였으나 그들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장사꾼들처럼 이익이 있을 때는 섬기고 이익이 없을 때는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모세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이 수 많은 기적과 신비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익이 없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격적으로 이익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 조차 흔들림 없이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민족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자신만 구원받는다면 차라리 자신도 생명록에서 이름이 지워지기를 바랬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이익을 추구합니다.
이 세상의 문명이 붕괴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원인은 이기주의입니다.
자기 집단, 자기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서 모이고 흩어질 때 가정이 무너지고, 이웃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졌습니다.
교회라고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적 이기주의에 빠질 때 그 교인의 신앙생활은 무너집니다.
신비적 체험이 강하게 임하면 열심히 봉사하는 교인,
마음이 뜨거운 설교를 들으면 순종 잘하고 열심내는 교인,
그러다가 감정이 식어들면 다시 세상으로 기울어 버리는 교인,
기도원에 가서 울부짖어야 속이 시원한 교인,
이같은 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모래위에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은 무너집니다.

오늘 은혜가 안되는 설교를 들었어도 묵묵히 충성하는 성도,
오늘 마음이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
감정과는 상관없이 말씀만 붙잡는 성도,
이런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반석위에 자신의 신앙을 세우는 성도는 열매 맺는 성도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이익을 위해서 감정위에 자신의 신앙을 세우는 교인은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에게 한 해동안의 기회가 더 주어졌습니다. 그동안 열매 맺지 않으면 찍힘을 당하게 됩니다.
어서 속히 내 감정 중심의 신앙생활을 버리고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로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재미없는 설교, 재미없는 교회, 능력없는 목사와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는 성도 어디 없습니까?
항상 텅텅비는 예배, 항상 허전한 물질, 항상 허약한 건강 속에서도
이웃을 향한 봉사가 뜨거운 성도 어디 없습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이삭을 바쳤던 그 반석위에 우리도 집을 집시다.
보잘것 없는 어부지만 목숨바쳐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의 그 반석위에 우리의 집을 집시다.
그러면 내년에는 주인이 돌아와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