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수용할 용기가 있는 교회 눅15:11-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떤 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주 사랑하시는 어떤 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증오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주 존경하시는 어떤 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비방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여러분이 잘 아시고 아주 사랑하시고 존경하시는 분이라면 여러분은 그 분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만큼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떤 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로운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리는 데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교정하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선포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홍보대사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벌주고 심판하는 하나님으로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감각하고 냉담한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저 멀리 구만리 장천에 머물러 계신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우리 주님은 심판자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자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8-19). 우리 주님은 불의한 하나님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홀로 선하신 하나님. 우리는 이 홀로 선하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하나님은 구만리 장천에 머물러 계시면서 우리를 감시감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이동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여호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오늘의 성경 이야기에서 우리 주님은 무감각하고 냉담한 하나님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과 용서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려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 그려 준 하나님의 그림보다도 우리 주님이 그려 주신 하나님의 그림이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품에서 독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는다고 자랑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오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름아닌 십계명의 제2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20:4).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잘못 그려놓고 믿는다면 이것은 다름아닌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더러 여호와 하나님이라며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출32:4). 하나님의 형상을 송아지의 형상으로 잘못 그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짐승의 형상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롬1:23). 우리는 신령하게 하나님을 섬기되 또한 진리로 바르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요4:24). 진리가 빠진 신앙은 무당굿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대로, 지식을 따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이 믿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이 만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믿고 만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또 그 모습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만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표독스러운 심판자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율법주의자나 공로주의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표독스러운 심판자로 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만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은혜주의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은혜로 대하며 살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믿는 하나님의 형상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형상을 닮게 되고 그 형상대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어도 너무 표독스러운 하나님을 믿고 삽니다. 그래서 인생자체가 너무 피곤하고 힘듭니다. 불신자보다 더 형편없이 고된 삶을 삽니다. 자기가 믿는 표독스러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하니 얼마나 고되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자신이 믿는 그 표독스러운 하나님을 닮아 남에게도 표독스럽게 대해야 하니 그 인간관계가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가차없이 심판하는 심판자 알라신을 믿고 사는 회교도들의 삶은 피곤하기 그지 없습니다. 회교도들에게는 은혜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바로 그 모습을 닮을 것이며 그 모습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이야기에서 우리 주님이 그려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찬찬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에 자식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원래 재산상속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 이뤄집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너무나 졸라대니 아버지는 마지 못해 살아 생전에 재산을 나눠줍니다. 재산을 나눠주면 자기 품을 떠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눠줍니다. 재산을 나눠주면 탕진해 버릴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눠줍니다.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너무 사랑하기에 거절하지 못하는 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자식의 청을 들어주는 것, 이것이 곧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소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이 얼마나 황송한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존중하기에 그 자식이 하자는 대로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마음대로 독재하시는 표독스러운 심판자가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못하시는 게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청을 들어주시고는 가슴앓이를 하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가슴앓이를 할 것 같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허락하지 않았으면 됐을 것 아닙니까. 허락했으면 그것으로 끝낼 것이지 가슴앓이는 무슨 가슴앓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재산이 아까워 가슴을 앓고 있는 게 아닙니다. 떠나보낸 아들이 보고 싶어, 떠나보낸 아들이 걱정스러워 가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어도 좋습니다. 죽지만 않고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우리는 한번 돌아서면 얼마나 매섭게 돌아섭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절을 합니다. 아주 찬바람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오랫동안 가슴을 앓으시는 분입니다. 가슴을 앓으시며 한마리 잃은 양을 찾으시는 분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집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같이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동구 밖을 서성이며 발돋움을 한채 집나간 자식의 귀향을 기다리십니다. 자식이 돌아오기만 하면 포옹할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동구 밖을 서성이며 기다리십니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롬10:21).
하나님은 집나간 자식을 맞이하기 위해 종일 두 팔을 벌리고 계신 것입니다. 원래 어버이란 동구 밖에 서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 집떠난 자식이 무사히 귀가하고 있는지 내다보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버이 親은 나무 木, 설 立, 볼 見으로 이뤄져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오는 자식을 버선 발로 뛰어나가 영접하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하나님은 먼 거리에서도 금새 자식인 줄 알아차립니다. 냄새나는 자식을 그냥 끌어안고 입을 맞추십니다. 고향을 떠난 자식이 성공해 귀향하면 금의환향이라고 합니다. 비단 옷을 입고 대낮에 금의환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만 한 채 낙행하면 포의야행이라고 합니다
. 삼베옷을 입고 밤중에 포의야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둘째 아들이 포의야행하듯이 낙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옛날의 종들이 그냥 지나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만은 돌아오는 자식을 영접하십니다. 자식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식을 환영하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자식의 죄를 망각하고 용서하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돌아온 자식이 몇 마디 회개의 발언을 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여기에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자식을 보는 순간 그 자식 때문에 앓던 속앓이도 다 잊어먹고 그 자식의 죄도 다 잊어먹으신 것입니다. 그냥 자식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기뻐 그 자식의 죄를 망각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9).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기만 한다면 우리의 죄악을 기억치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18:23).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죄악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진정 용서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범죄자 아담도 살아라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첫 살인자 가인도 살아라고 생명보장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서자 이스마엘도 살아라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요,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살리시되 더 풍성이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여섯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자식의 신분을 회복시키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불효 괘씸죄로 복권을 미루는 게 아니라 즉시 복권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번 마음이 상하면 오랫동안 풀지 않습니다. 친자식이 잘못했어도 속히 마음을 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했으면 아마 평생동안 원수맺고 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노아만 하더라도 둘째 아들 함의 잘못을 저주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형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의 복권을 오랫동안 미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온 아들의 권세를 즉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22). 하나님은 돌아온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히되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히십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야곱은 11명의 아들들에게는 짧은 단색옷을 입혔으나 요셉에게는 긴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에게 긴 채색옷을 입혔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종들 앞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의 권위를 세워 주시기 위해 옷을 갈아 입히시되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신 것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신 것은 그 아들을 제일 좋은 자리에 앉히시겠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로 하나님 아버지는 돌아온 자식을 위해 잔칫상을 베푸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3). 하나님은 집안의 큰 일을 위해 길러놓은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십니다. 종들 앞에서 자식을 복권시켜 줄 뿐만 아니라 종들과 더불어 기쁨의 잔칫상을 베푸십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 이 아들을 복권시키고 기쁨에 겨워 연회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 얼마나 대조되는 양상입니까.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미워 근신시키기는커녕 살진 송아지를 잡아 연회를 열고 종들과 더불어 기쁨을 만끽하시는 하나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자식을 위해 아무런 아낌 없이 재산을 더 축내시는 하나님. 할렐루야.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제 둘째 아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 자식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실까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욕구만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이 자식은 아버지를 떠나되 아주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께 타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드리지도 않고 재산부터 타내고자 했습니다. 일단 재산을 타내자 며칠도 안되어 먼 나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망할 자식입니다. 아주 망할 자식입니다. 부모 생각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 욕구만 채우면 그뿐입니다.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물쓰듯이 썼습니다. 이 망할 자식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생각했던 돼지를 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양치기란 말을 들어봤어도 돼지치기란 말은 여기서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그것도 콧대높은 유대인이 이방인의 땅에서 돼지를 치다니, 이 무슨 수치입니까. 돼지먹이인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 싶었으나 그것마저도 없었습니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흉년들지 않았더라면 이 자식은 귀국할 생각조차 않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이 자식은 곰곰히 생각합니다. 자기의 화려했던 과거를 생각하고 자기의 초라한 현재를 생각합니다. 자기 아버지의 속깊었던 사랑을 생각하고 타국 사람들의 무정함을 생각합니다. 고난은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은 지혜롭게 만듭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을 당했어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자식은 이제 곰곰히 생각합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사랑은 끄는 힘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한 자식은 언젠가는 돌아옵니다. 아니 사랑이 끄집어 당기니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고 유다는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두 사람의 죄질은 거의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로 돌아 왔으나 유다는 끝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내었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일찍부터 주님의 끈끈한 사랑을 맛보아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피상적으로 주님을 따라 다녔을 뿐이지 주님의 사랑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서 베드로는 주님 품으로 돌아왔으나 유다는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고난 속에서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아, 이 세상 어디에 아버지의 사랑만한 사랑이 있었던가.\\\'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보니 눈물이 흐릅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릅니다. 아무리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도 그 아버지가 너무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에 풍성한 아버지. 그래서 지금도 자기를 기다리실 아버지. 그 아버지를 생각하니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돌아가서 아버지를 껴안고 엉엉 울고라고 싶습니다. 그러나 부끄럽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고국을 떠나 재산을 탕진하고만 주제에 어찌 돌아갈 수 있으리요.\\\' 그렇지만 사랑의 힘은 큰 것입니다. 사랑은 부끄러움을 이기고 돌아오게 만듭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 이 사랑은 마침내 둘째 아들을 먼 이방인의 땅에서 되돌아 서게 만들었습니다.
이 자식은 고국으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여기서부터 이 자식은 괜찮은 자식으로 바뀝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실행하고야 마는 용기는 떠날 때나 마찬가지로 발동합니다. 마음만 먹고 우물쭈물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지만 아버지를 다시 만나려 떠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지만 이 자식에게 장점도 있습니다. 한번 마음먹으면 실행하는 용기입니다. 이 자식은 먼 길을 걸어 아버지께로 갑니다. 먼 길이었기에 마음을 바꿔 먹고 중도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식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그대로 합니다. 뻔뻔스럽게도 집으로 되돌아 옵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그러나 이 뻔뻔스러움이 믿음입니다. \\\'내가 돌아가면 죽이기야 하겠는가. 잘만 하면 복권될지도 모르지. 적어도 얻어먹고 살 것은 있겠지.\\\' 이 자식의 뻔뻔한 마음. 이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용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의로왔습니까. 우리 모두 죄인이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주님을 만났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이 예사 믿음입니까. 아주 뻔뻔스러운 믿음이지 않습니까. 원래 믿음은 뻔뻔스러운 법입니다. 우리는 이 자식에게서 믿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이 자식은 아버지를 불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싫어 떠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 떠났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 이 자식은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집나갈 때에는 아무 계획없이 즐길 생각만 했던 이 자식도 고난 중에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 자식은 타국에서 굶어죽는 것보다 고국으로 돌아가 아버지 앞에 석고대죄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밑에서 품군처럼 일할 각오도 했습니다. 기꺼이 밑바닥까지 내려가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자살의 길을 택하는 사람보다 이 자식은 몇배나 더 낫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죽이지 않고 스스로 사는 길을 선택한 것은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이 자식이 기꺼이 품군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굳혔을 때 정작 하나님 아버지는 품군이라는 말을 입밖에 꺼낼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끄집어 올리십니다. 품군이 아니라 다시 자식의 자리로 올리시는 것입니다.
성공해 금의환향한 것도 아닌데 칙사대접을 받은 이 자식의 황홀한 마음. 그 누가 이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사람을 맛본 사람. 그는 두번 다시 배반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많은 죄,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 그 사람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더할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을 경험한 둘째 아들. 이제 그는 두번 다시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두번 다시 불평불만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자기 자리를 지키되 묵묵히 지킵니다.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되 기쁨과 감사로 지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자기 안에서 인격화돼 있는 둘째 아들. 이 아들은 그야말로 해피엔딩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맏아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맏아들은 재산상속을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적도 없습니다. 맏아들은 둘째 아들이 돌아오던 그날도 밭에서 일했습니다. 한마디로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망할 자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욕망과 방탕 때문에 망한 자식이었다면 큰 아들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망할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저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섬기기에 아버지 밑에서 먹고 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저 열심히 밭을 갈기에 먹고 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 알게 됐으나 큰 자식은 아버지와 더 오래 지냈어도 그 사랑을 몰랐습니다. 그저 의무감으로 아버지를 모셨고 그저 의무감으로 밭일을 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어슴프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공로주의, 율법주의, 인과응보주의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큰 아들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고 뻐깁니다. 이것은 공로주의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다 지켰다며 뻐깁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다고 뻐깁니다. 이것은 인과응보주의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면 많은 업적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로주의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큰 아들은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의 명령을 다 준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인과응보주의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입니다. 큰 아들의 인생사전에는 은혜니 선물이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가 아예 없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들의식보다는 종의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자주 이 종의식에 사로잡혀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두려움으로 아버지를 섬기지 말고 사랑과 은혜로 아버지를 섬깁시다.
은혜니 선물이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를 잘 몰랐던 큰 아들. 그렇기 때문에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이 이미 재산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아버지의 남은 재산이 다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평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에 하신 일이 없더니\\\'(눅15:29). 큰 아들의 눈에는 살아 돌아온 작은 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의 귀향으로 기쁨충만한 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죽은 송아지만 보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죽은 송아지를 놓고 아버지를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30). \\\'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경멸하는 어조로 말입니다. 큰 아들은 모든 잘못의 원인을 형제관계에 맞추지 않고 바로 부자관계에 맞추고 있습니다. 모든 잘못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의 탓이라는 지적입니다. 이 얼마나 불효막심한 언사입니까. 여기에 첫째 아들의 불효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슬그머니 아버지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려대는 큰 아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한 적은 없습니다. 이 큰 아들의 비난 때문에 작은 아들은 얼마나 더 비참해졌겠습니까. 한번 더 아버지 앞에서, 형님 앞에서, 형수와 조카들 앞에서, 그리고 종들 앞에서 작은 아들은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아버지가 용서한 작은 아들. 그러나 형의 비난 때문에 작은 아들은 다시 죄책감에 사로잡혀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형제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한집에 함께 살긴 살았으나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습니다. 집안에 연회가 열려 떠들썩했다면 곧바로 아버지께로 달려가 여쭤 봤으면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한 종을 불러 그 연유를 캐물었습니다.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눅15:25-28). 큰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되 진심으로 섬기지 않고 단지 형식으로 섬겼기에 이렇게 종을 붙들고 캐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분노에 가득차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습니다. 큰 아들의 속은 뱀댕이의 속과도 같이 좁습니다. 오히려 종의 마음이 더 넓어 보입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오히려 이 종은 주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 종은 \\\'둘째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동생\\\'이라고 제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종보다 못한 장남입니다.
큰 아들의 불평불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주 자상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1-32). 작은 아들의 몫은 이미 분배됐으니 아버지의 재산은 큰 아들의 것입니다. 큰 아들은 이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 있어 아버지의 작은 아들은 바로 동생인 것입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자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큰 아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는 사실을 깨우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머리입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인정하면 큰 아들도 인정해야 합니다. 종들도 인정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기뻐하면 큰 아들도 기뻐해야 합니다. 종들도 기뻐해야 합니다. 주인장이 작은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갈아입히라는데 종들이 입을 삐쭉이며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장이 작은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는데 종들이 입을 삐쭉이며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면 큰 아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는 것이 효도요, 주인장의 마음을 헤어려 드리는 것이 충성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주인장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 바로 의를 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성경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표독스러운 심판자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한없이 참으시는 자애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가슴 깊이 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어느 자식인들 돌아오기만 하면 이유물문하고 품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을 헤아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한없이 자애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이 하나님을 알고 믿고 만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작은 아들의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작은 아들의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뻔뻔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되살아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큰 아들의 옹졸한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큰 아들의 닫힌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큰 아들의 율법주의, 인과응보주의, 업적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종들처럼 열린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주인장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참 형상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참 형상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믿고 순종하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참 형상대로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용서와 사랑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줄 아는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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