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민족을 향한 교회의 선포적 사명

이 민족을 향한 교회의 선포적 사명/눅4:16-21

이 민족을 향한 교회의 선포적 사명
눅4:16-21





I. 본문의 상황과 내용

1. 이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무슨 기능을 하는가?

어느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을 물색하고 있다. 회중들이 후보로 떠오른 목사님에 관해서 간편하면서도 상당히 확실하게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어보는 것이다. 그래서 회중들은 그 목사님이 과거에 하신 아무 설교든지 녹음 테이프나 비디오 테이프에 기록해 둔 것이 있으면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경우에 그 목사님은 어느 것을 보낼 것인가? 최초의 설교? 최신의 설교? 아무 것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그럴 수 없다. 당연히 그는 그의 모든 설교 가운데서 가장 잘 된 것, 그러면서도 그의 인격과 목회 방향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을 골라서 보낼 것이다. 이렇게 고른 것은 그의 모든 설교 가운데서 자기를 가장 잘 소개하는 대표 설교 또는 표본 설교의 성격을 띠는 셈이다.

누가복음 4장 16-21절은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설교로서 맨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최초의 설교를 꼭 그대로 보도한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나사렛 회당의 설교를 예수의 인격과 활동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표적 설교로 맨 앞에 내놓았다. 마가복음 6장 1-6절과 마태복음 13장 53-58절의 보도에 의하면 나사렛 회당에서 행하신 예수의 이 선교 활동은 그의 공생애의 초반 에서 아니라 그의 선교 활동이 상당히 많이 진행된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이 나사렛 회당의 설교를 그의 처음 설교로서 맨 앞에 내어놓으면서 마가복음의 이 보도와의 부조화를 어느 정도 극복하기 위하여 4장 14-15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에 오셔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짤막한 언급을 덧붙여 놓았다. 여기서 가르침과 선포(=설교)를 후대의 신학에서 구별하는 식으로 엄격하게 구별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 나사렛 회당의 설교는 누가복음의 보도에 의거하더라도 그의 최초의 설교가 아님이 자명하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선교 활동을 요약하기를 하나님의 복음(=하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 했다(막 1:14).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기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 1:15)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의 갈릴리 선교 활동의 첫날 첫 설교를 보도한 개체보도(Einzelbericht)가 아니라 예수의 전체 설교의 내용을 뭉뚱그려서 보도한 총괄보도(Sammelbericht)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마가복음의 이 요약 설교를 다시 요약하여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4:17)라고 했다.

마태복음 기자와 달리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전체 설교에 대한 마가복음의 이 요약 설교를 채택하지 아니 했다. 그 대신에 그는 이 나사렛 회당의 설교로 대치해 놓았다. 왜 그렇게 했는가? 그는 이 나사렛 회당의 설교 속에 예수의 기독론적 인격과 선포의 내용과 선교 활동의 내용이 종합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 내용을 적절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께서 몸으로 행하시는 행위 활동의 내용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마가복음 기자는 1장 21절에서 3장 5절 사이에 이것의 사례를 대표적으로 하나 하나 열거해 놓았다. 즉 병자 치유, 귀신축출, 나병환자 치유, 안식일에 만성병 환자 치유, 죄인들과 식탁교제 등등이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 제시되었다. 예수의 나사렛 회당의 설교에는 이 두 가지--구원의 때에 대한 선포와 구원 행위--가 통합되어 있다.

2. 본문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16-21절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A) 16-17절: 예수의 설교 개시에 대한 정황 서술
B) 18-19절: 예수께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심
C) 20절: 성경 봉독 후의 예수의 자세와 회중의 반응
D) 21절: 예수께서 이사야의 이 예언이 바로 지금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심

본문은 1세기에 유대교의 회당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예수를 중심 인물로 세우고 그가 하신 일과 그것과 관련되는 것만을 기술했다. 회당 예배에서 먼저 율법서에서 한 부분을 읽고 그 다음에 예언서에서 한 부분을 읽는 것은 예배의 주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성경 봉독은 미리 정해진 사람이 담당하거나 누구든지 즉석에서 자원해서 맡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이 날 예수는 자발적으로 나서서 예언서의 글을 읽으셨던 것이다. 성경 본문은 매 안식일을 위하여 할당된 것이 미리 정해져 있었거나 그 날의 봉독자가 자의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17절은 둘째 번 경우를 지시하는 것 같다.

18-19절은 이사야 61장 1-2절과 58장 6절에서 복합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는 58장 6절에서 따온 것이다. 61장 1절에 들어 있는 \\\"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고\\\"는 생략되었다. 또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라는 말은 70인역 번역에 의거한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로 되어 있다. 18-19절은 70인역 번역을 따른 것이다. 61장 2절의 본문은 \\\"주의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선언하게 하셨다\\\"인데 인용문에서는 \\\'보복의 날\\\'이 생략되고 \\\'선언하게\\\'라는 낱말이 \\\'선포하게\\\'라는 낱말로 바뀌었다.

여기서 몇 가지 역사비판적 물음이 제기된다. 1세기에 유대교의 나사렛 회당의 예배에서 70인역 번역 성서가 사용되었을 수 없다. 아마도 히브리어 성서가 낭독된 다음에 여기에 아람어 번역을 덧붙여졌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18-19절이 70인역 번역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성경 봉독자가 본문의 몇몇 구절을 임의로 생략하고 읽거나 61장 1-2절 말씀 속에 58장 6절의 한 구절을 끼워 넣어서 읽는 것이 허용되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예배용으로 현재의 형태대로 편집된 성구집이 이미 존재했었는가? 우리는 예수께서 어느 날 나사렛 회당의 예배에서 이사야 예언의 어느 부분을 읽으시고 이와 관련시켜 자기의 선교적 사명을 천명하셨다고 상정할 수 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것을 그의 신학적 안목으로 확대 재생하여 예수를 종말적 구원에 대한 예언의 성취자로 부각시키는 예수 자신의 설교로 다듬어 내었던 것이다.

3. 18-19절 번역 및 분석

18절 주의 영이 나에게 (임하여 계신다).
이는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으니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8절 전반부에는 목적격 대명사 \\\'나\\\'(me)가 세 번 나온다. 첫 번째 \\\'나\\\'는 \\\'...위에\\\'(on, upon)라는 전치사의 목적어이고 두 번째 \\\'나\\\'는 \\\'기름을 붓다\\\'라는 동사의 목적어이고 세 번째 \\\'나\\\'는 \\\'보내다\\\'라는 동사의 목적어이다. 첫째 문장은 연계사(be-동사)가 생략된 문장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과거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가리킨다. 즉 주(=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여) 계신다는 뜻이다. 둘째 문장은 첫째 문장에 대한 원인 또는 이유를 나타낸다. 즉 \\\'나\\\'는 주님으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아서 주의 영이 지금 \\\'나\\\'에게 임하여 계신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주의 종(=일꾼)으로 택함을 받는다는 뜻이며 주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신적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셋째 문장은 첫째와 둘째 문장의 목표를 나타낸다. 즉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심으로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목적은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세 문장은 \\\'나\\\'는 어떤 존재이며 무슨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인가에 대한 투철한 자의식(自意識)을 나타낸다. 이 세 문장 이외의 나머지는 원문으로는 주어와 동사로 구성된 문장이 아니고 세 개의 부정사(不定詞) 어구로 구성되어 있다. 즉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 눈먼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게 하기 위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이 네 부정사구(둘째 것은 첫째 부정사가 생략된 것임)는 세 번째 문장(=\\\"주께서 나를 보내셨다\\\")의 목적(purpose)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문장에는 목적(purspose)을 나타내는 부정사로서 \\\'가나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어구가 이미 붙어 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부정사구는 나머지 네 부정사구에 대하여 구조상으로 그리고 의미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기쁜 소식)이 전해지다\\\'(눅 7:22)라는 말은 누가복음에서 종말적 구원이 선포되는 것을 뜻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그 대상임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나머지 네 부정사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다\\\'라는 어구에 1:1로 병렬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기 위하여 첨가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은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데서 구체화된다.

\\\'가난한 사람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 누가복음은 \\\'가난\\\'을 정신화 하는 것을 거부한다(6:20; 14:13,21; 16:20,22; 18:22; 19:8; 21:3 참조).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 척도로만 판단하지 말고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정치 등 모든 방면에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로 보아야 한다.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고치고\\\'라는 어구를 생략한 것은 정신화의 경향을 차단하기 위함일 것이다.

\\\'은혜의 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종말적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켜 \\\'여호와의 날\\\'(사 13:6; 38:8; 겔 30;3; 욜 1:15; 2:1,31; 3:14; ,암 5:18,20; 습 1:14,18; 2:2,3; 슥 14:1; 말 4:3,5 등등)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 날\\\'(사 27:12,13; 30:26; 52:6; 렘 33:15,16; 39:16,17; 겔 7:10; 30:3; 39:8; 욜 1:15; 3:18; 암 5:18; 8:3,9,11: 9:11,13; 습 1:10; 3:16; 슥 2:11; 3:10 등등)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 때\\\'(렘 50:4,20; 습 1:12; 3:19,20 등등)라 부르기도 한다. 또 \\\'해\\\'를 사용해서 표현하는 경우에는 \\\'구속할 해\\\'(사 63:4), \\\'은혜의 때\\\'(사 49:8), \\\'시온의 송사를 신원하실 해\\\'(사 34:4), \\\'벌할 해\\\'(렘 11:23), \\\'벌받을 해\\\'(렘 48:44)라 부른다. 이 날은 양면성을 띤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멸망이 내리는 날이다. 이사야 61장 2절의 \\\'주의 은혜의 해\\\'와 레위기 25장의 \\\'희년\\\'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희년은 50년을 주기로 하여 반복적으로 돌아오며 역서상(曆書上)으로 확정되어 있으며 대제사장이나 행정 관리가 선포하며 사회 관계의 원상 회복을 목표로 한다. 은혜의 해는 종말적 구원이 유일회적으로 일어나는 때이며 예언자가 예언하며 역사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한다. \\\'주의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이 나란히 언급된 것을 보더라도 \\\'주의 은혜의 해\\\'는 종말적 구원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징벌의 날\\\'을 생략한 까닭은 \\\'주의 은혜의 해\\\'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4. 예수는 무엇을 선포하셨는가?

예수께서 성경 봉독을 마치시고 앉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방금 봉독하신 그 말씀에 대하여 해설을 하려는 자세를 취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회중들은 예수가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고 주목했다. 예수께서는 봉독하신 말씀의 내용을 해설하시지 않고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다. 예언의 말씀이 현실로 오늘 실현되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예언한 \\\'나\\\'는 예수 자신이며 지금은 종말적 구원이 주어지는 은혜의 때이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띠고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서 포로된 사람들을 해방하며,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사건을 선포하는 일을 담당하려고 나서시었다는 사실을 선포하셨다.

5. 우리는 무엇을 설교해야 하는가?

본문은 예수께서 직접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총체적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잘 드러내 주는 가장 적절한 일화이다. 특히 이 기쁜 소식의 수령자를 가난한 사람들로 특정화함으로써 복음의 사회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 심령화, 내면화, 개인화, 가치 중립화하는 방향으로 잘못 해석될 우려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표현은 이러한 폐단을 차단해 주는 적절한 장치이다. 복음 사역자의 사명은 종말적 구원이 도래한다는 소식을 고지(告知)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로된 사람들을 해방하며 눈먼 사람들을 눈뜨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는 활동을 하면서 은혜의 때, 구원의 때가 이르렀음을 선포하는 데서 성취된다. 이러한 내용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립적으로 달콤하게 들리는 소식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는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쓴 소리이다. 복음에서 이 쓴맛을 제거하는 것은 소금에서 짠맛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맹랑한 짓이다.


2.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신익호 목사, 초동교회)


1. 오늘의 상황

새 천년, 모두가 많은 희망을 안고 시작을 했다. 그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보다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 윤리도, 도덕도 땅에 떨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렇게 자랑하는 자유와 해방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지금도 이 땅에는 가난이며 기근이며 억압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

1978년 세계은행 보고에 의하면 약 8억의 인구가 영양실조 문맹, 질병 등 절대 빈곤에 허덕인다고 했다. 지금도 인종간 계층간의 갈등, 성차별, 핵무기 위협 등으로 자유나 정의가 무색하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의 존재 의미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2. 본문적용

예수께서는 어느 때 나사렛에 가셔서 회당에 들어가 사 61:1-2의 말씀을 읽어 주셨다.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고 또 하셔야 할 일이 무엇임을 분명히 밝혀 주셨다. 나는 이것을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께서는 눌린 자 일으키시고, 갇힌 자 해방시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셨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나라는 로마에 점령되고 백성은 종이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주권도, 인권도 다 빼앗기고 글자 그대로 인간 이하의 삶이었다.
사람이 사는 데는 빵이 넉넉하고 생활환경도 향상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존이 가능함을 체험한 바 있다. 빵이 있으나 자유가 없다면 노예나 다름없고 재물이 있으나 권리가 없다면 동물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역사는 자유와 해방의 투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후 70년 이스라엘은 로마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말이 전쟁이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마사다 요새에 남은 900여명은 최후의 항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차라리 로마의 노예가 되느니 죽는 게 낫다\\\' 결의하고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노예해방하면 링컨 대통령을 먼저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이러한 운동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려 왕조때 노비안건법을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양인으로 회복되었다. 절차도 간단해서 노비 스스로 과거에 양인이었다고 관아에 신고만 하면 복귀가 가능했던 것이다.

성서는 처음부터 우리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는데, 그러므로 우리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고 다 같은 존재인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는 서로 빼앗고 죽이고 처형하는 역사였다. 달리 말하면 눈물과 고통과 피로 얼룩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기독교가 남의 나라 점령에 앞장서기도 했고 때로 남의 침략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가령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 같은 사람은 \\\'한인은 어린애 같이 천진하기 때문에 독립할 처지가 못된다\\\'하며 일본 침략을 두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유나 평등을 위한 투쟁은 부단히 계속 되어왔다.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같은 사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라고 했다. 그는 나아가 미국독립선언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다음의 원리를 자명한 것으로 주장한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된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의 창조자로부터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행복,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셨다. 그것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마 16:26).

그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되거나 빼앗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 가셔서 오늘의 말씀을 봉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정신을 계승한 사람들은 그 무엇에 앞서 자유와 해방을 존중했다. 생명이 생명되기 위해서는 이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다. 이 같은 정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는 신화에서 이성으로, 구속에서 해방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향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께서 그렇게도 외치셨던 자유와 해방을 이 땅에 세우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 론

지금도 이 땅에서는 성서의 뜻과 역행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예수께서 생명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경시되고 자유와 해방이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 사랑에도 오히려 미워하고, 평화에도 전쟁하고 희망에도 절망하는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은 너무도 나이브한 것이다. 공산주의는 정치 경제가 개선되면 유토피아가 된다고 했으나 우리의 삶을 19세기로 후퇴시킨 결과 밖에는 없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자유와 해방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은 아무리 종이라 해도 6년은 일하고 7년째 되는 해에는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신 15:12-13). 그들은 희년이란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오십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라\\\"(레25:10)고 했다. 이것은 너무나 생명이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자유와 해방은 필수적인 것이다. 자유없는 빵이나 권리가 없는 해방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와 해방 그리고 구원 이 세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예수님은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셨다. 그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로마에 대한 도전이요, 이스라엘의 해방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용기와 신념 그리고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선언으로 어느 누구도 남의 자유를 빼앗거나 무시할 수가 없고 또 남의 지배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와 해방이 전부이며 그것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의 개선이나 혁명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더 중요한 문제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안고 있는 죄의 문제인 것이다. 죄가 그대로 있는 한 아무리 고치고 개선한다고 해도 달라질 수 가 없는 것이다. 미국하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선진국이다. 그런데 1960년과 1990년 사이에 인구 증가는 41%인데 비해 폭력과 범죄는 56% 증가했고 불법 출생은 40% 이상, 청소년 자살율은 20% 이상, 이혼도 20%가 늘었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자유가 없어 그럴까?

예수님은 공생애에 접어들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셨다. 죄의 권세가 얼마나 크면 그것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하셨다. 인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셨기에 친히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사람의 죄짐을 대신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해방도 중요하지만 죄에서의 해방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오늘의 말씀이 실현되어야 할 때라고 본다. 자유가 있긴 하나 억압이 그대로 있고, 정의가 있다하나 부정이 그대로 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눌린 자 일으키고, 갇힌 자 해방하며, 나아가 모든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신앙이 필요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