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이야기(문을 열면)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한 가지도 듣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밖으로 핍박을 받지 않았고, 안으로 이 단이나 부도덕 같은 폐단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부유했고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부유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 교회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이 평온하고 창성할 때, 내적 신앙면이 쇠잔해질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모직 공업의 중심지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또 은행의 중심지여서 당시에 세계에서 가 장 부유한 도시란 이름을 가졌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있는 라오 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였습니 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였습니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신 말씀은 라오디게아를 알면 적 절한 비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로 식수를 끌어오던 곳은 히에라포리스였습니다. 그곳은 철분이 많은 온천 이었습니다. 그러나 6마일 밖에서 그 물을 끌어오기 때문에 온천 물 중에 끓는 물이 있었지만 그 물이 흘러오는 동안 미지근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온천물은 뜨겁든지 아주 냉각시키지 않으면 미지근한 상태에서는 구역질을 유발했다고 합니다. 라오 디게아 사람들은 그런 물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미지근 하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물도 그렇습니다. 미지근한 물은 맛이 없습니 다. 사람도 미지근 하면 맛이 없습니다. 본문의 \'차다\'는 말은 헬라어의 \'프수크로스\'로서 빙점을 뜻하고, \'더웁다\'는 말은 \'제 스토스\'로서 물이 끓는 온도입니다. 따라서 덥든지 차든지 하기 를 원한다는 말씀은 끓든지 얼어붙든지 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 다.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를 싫어하십니다. 예수 님이 지적하는 것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신앙생활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상도 그리스도에 게도 속하지 않은 에메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앙에는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신앙의 미지근한 상태, 중간지대는 주님 께서 거부하십니다.
17절에 라오디게아 교인의 비극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너는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불감증에 걸린 교인을 말합니다. 17절에서 저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상태를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1. \"곤고한 상태\"입니다. 이것의 헬라말은 \'비틀어졌다\'는 뜻입 니다. 이는 자기 핑계를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비뚤어져 나가는 신자입니다. 2. \"가련한 상태\" : 이는 잘못된 선택,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 으면서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련한 것입니 다. 3. \"가난한 상태\" : 이는 영적인 빈곤입니다. 4. \"눈먼 상태\" :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보화를 보지 못 하는 영적인 맹인을 말합니다. 5. \"벌거벗은 상태\" :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상태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 혼자 서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모습입 니다.
18절에는 해결방안이 제시되었는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 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 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을 통과한 믿음입니다. 금은 믿음을, 불의 연단은 시 련을 표시합니다. 라오디게아에는 금이 풍부하여 쉽게 살 수 있 었습니다. 그러나 시련에 연단된 믿음은 그리스도에게서 사야만 합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라는 말은 흰 옷은 하늘 나라의 의 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구원을 뜻합니다. 이 옷은 불로 연단한 금 , 즉 믿음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이게 하라\"고 하는 것은 영 계를 바라볼 수 있는 성령의 전망력과 판단력입니다. 라오디게아 에는 유명한 의학학교가 있었고 약품도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그 러나 신령한 안약은 성령(주님)에게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 리의 눈이 고침 받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내 눈이 병들어 있으면 참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19절)\"고 합니다. 20절에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했는데 \"문 밖에 서서 \"는 현재완료형이고 \"두드리노니\"는 현재형입니다. 즉 예수님의 문 밖에 서심은 오래되었고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도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을 열면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가 있을 것이고 그렇 게 되면 뜨거워질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라고 할 때 \'먹는다\'는 말의 헬라어는 \'데이프네인\'입니다 . 그 명사형은 \'데이프논\'입니다. 이 단어는 의미가 깊습니다. 헬라인들은 하루에 세 끼를 먹는데 첫째 조반은 \'아크라티스마\' 라고 합니다. 이것은 빵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입니다. 또 점심은 \'아리스톤\'이라고 하며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가지 않았 고 도시락이었습니다. 그것은 도로 가나 가로수 가에나 광장에서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데이프논\'은 저녁 식사이며 이 것은 한 날의 주요 식사이고 사람들은 그 날의 일이 끝났기 때문 에 시간을 보내며 오래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때는 깊 은 교제의 시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문 두드리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와 함께 나누는 식사는 \'데이프논\'입니다. 이것은 급 히 먹는 식사가 아니고 길가에서 먹는 식사도 아닙니다. 이 식사 는 깊이 사귀는 식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은 우리들과 오래도록 함께 계시려 하십니다. 편안하게 같이 계시면서 먹고 마시며 우리와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자주 도시락을 들고 주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을 열어 달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갈망 하십니다.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그림에서 화가가 문의 손잡이 를 밖에 그려 넣지 않은 것은 신앙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의 문은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1절에는 승리자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내 보좌 옆에 이기는 자가 앉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믿음을 가져야 이길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주님 옆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내가 뜨거워 질 수 없습니다.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분과 함께 더 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예수 님의 자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아 직도 문 밖에 서 계십니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언 제까지 주님을 거기 세워 두시겠습니까? 주님은 가택침입자가 아 니시기에 지금도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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