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교회

뜨거운 교회
계3:14-22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 우리는 가진 것 없으면서도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칭찬을 받은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하여 알아 봤습니다.
오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중에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가 왜 책망을 들었는가 알아볼 차례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교회는 말세 교회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본문에 나타난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이시대 교회의 특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첫째 비젼이 있고 둘째 비젼을 성취시킬 실력을 갖추고 세 번쩨 비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뜨거운 열정의 상태를 일에 미첬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어떻일이든 성공하려면 그일에 뜨겁게 미쳐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 집회차 방문하면 고회에 단상에 섰을 때에 그 교회의 온도를 느낍니다.
어떤교회는 차갑고 어떤교회는 뜨겁습니다.
교회마다 온도가 있듯이 사람마다 온도가 있습니다.
뜨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지근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온도가 어떤 때는 뜨겁다가 어떻때는 식어서 미지근한 때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몇 도입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비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꿈을 가질수는 있습니다. 실력도 갖출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을 성취시킬수 있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볼 때 감동을 느낍니다.
얼마전에 텔레비전에 보니까 어린 아이들이 악단을 조직하고 또는 백 덴서팀을 조직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볼 때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여서 학자가 되든 가수가 되든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하여 피나는 고생을 감수하며 열정을 쏟는 모습은
비록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전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일을 적당하게 하는 사람들,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
힘들어하면서 억지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보기에도 가련하고 불쌍할 뿐 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동안 가깝게 살던 부모 형제들이 아침 안개처럼 있는 듯 하다가 없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짧은 인생을 어영부영 미지근하게 적당히 살기보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주님께서 너희가 세상을 살 때에 뜨겁든지 차든지 노선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먼저 주님의 모습을 \\\"아멘이시요\\\"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아멘이라고 하고 찬양을 할 때도 아멘으로 끝마칩니다.
이 아멘은 헬라어로서 그 뜻은 \\\'진실로\\\'란 뜻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아멘으로 소개를 했을 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이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주변엔 진실한 사람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어떻 권사님은 새벽기도 나가다가 보니까 자기 아궁이에 연탄불이 꺼져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옆집 아궁이 연탄불과 바꿔치지하고 새벽기도를 갔다 오더랍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믿음생활이며 새벽기도 천날을 다니면 뭘 하겠습니까? 기도하기 전에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그렇다면 왜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는가?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은 자만심이 있습니다.
17절에 라오디게아교회는 스스로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당시에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로마정부의 보조를 거부하고 자력으로 복구할 정도였습니다.
라오디게아 지방은 세상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땅도 기름지고 비옥해서 농사도 잘되고 공장에서 대량으로 옷을 만들어 내고
금융업으로 돈을 벌어 들이고
병이 들어도 병원에 가면 고쳐주고 생활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복지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였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하였습니다.
영적인 모습은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였으니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주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영적인 무지로 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앞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산 것입니다.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관광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운 채 산길을 내려오던 중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됐었습니다. 승객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습니다. 운전사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며 사력을 다해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진입하는 마지막 언덕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곳에서 한무리의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계속 신호를 보냈으나 어린이들은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운전사는 망설였습니다. \\\"어린이를 구할것인가 아니면 승객을 구할 것인가\\\" 운전사는 어린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차에서내린 운전사가 어린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이미 어린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어린이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운전사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당신은 어린이를 죽인 살인자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군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운전사를 욕하지 마세요. 저 아이는 운전사의 외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복을 주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버스 승객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식을 버린 버스 운전사에게 우리는 겸손히 고마움에 감사를 해야지 우리는 하나도 자랑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까?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무엇이 부자입니까?
그들은 마치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내일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 보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환경 좋은 여건이 되면 인간은 자만에 빠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적으로는 더 빈곤해집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진단할 때에 이 교회 성도는 모두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기 자신이 병든 상태임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한 젊은 의사가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몸무게가 줄면서 자꾸만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 동료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암에 걸린 지 벌써 오래 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 밖에는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생명을 선언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바로 암환자를 진찰하는 내과 의사였습니다.
자신은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암에 대한 진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사람을 진찰하면서 왜 자기는 진찰할 생각을 못했겠습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환자들을 보면서 나도 환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죄 짓는 것을 볼 때 나도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인이 될수 없습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알지 못하도다\\\"라고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의 무지를 책망하였습니다.
1) 실제로는 저들이 부유한 도시에서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누렸고
2) 또한 안약으로 유명한 곳에서 저들의 육신적인 눈이 밝았고
3) 패션의 도시에서 좋은 옷을 입으면 서 다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이 실제로는 가난하고 헐벗고 눈이 먼자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우리가 아무리 육적으로 부요하다고해도 영적으로 무지하면 가난한 자요,
2) 육안의 눈이 아무리 밝아도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눈 먼 자요
3) 아무리 최신 유행하는 좋은 옷을 입고 다닐지라도 영적으로 무지하면 벌거벗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요, 오늘날 현대 교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지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라오디게아의 북쪽에는 섭씨 90도나 되는 아주 뜨거운 온천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물이 오늘날처럼 관을 통하여 라오디게아로 온 것이 아니라 개울물처럼 노천으로 흘러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뜨겁던 물이 식어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뜨뜻미지근 하게 되었고 미지근하게 식어서 도무지 온천 목욕물로 사용할 수 없는 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산에서부터 내려오 는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기갈을 면할 수 있었고 갈증과 더위를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여러분들의 신앙이 차지도 덥지 도 않고 미지근하니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병든 실상은 무엇인가?
1. 미지근한 교회요 성도의 신앙이 미지근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한 신앙, 토해 버리고 싶은 역겨운 상태의 모습입니다.

주님 앞에 거할 수 없는 사람들, 주님의 역사에 참여할 가치를 상실한 미지근한 성도들
이것이 그들의 병든 신앙에 모습입니다.

커피는 따끈하든지 냉커피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어야지 미지근한 커피는 토하여 뱉아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미지근한 육개장 미지근한 설렁탕을 먹어 보았습니까?.
미지근한 상태의 음식은 맛이 없을뿐더러 병균이 잘 번식하는 법입니다.

병균은 뜨거운 음식과 얼음같이 찬 음식에서도 번식을 못합니다.
병균이 생기고 썩는 것은 미지근한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서 뜨뜻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
온갖 죄악의 유혹이 틈타고 더러운 마귀가 들끓는 법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도 미지근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토하여 밷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삶과 심령이 쉽게 썩어간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① 네 신앙이 차라리 차게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죄악 된 것에 대하여 냉대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죄 된 것과 불의한 것에 대해서는 어음장처럼 차갑고 냉정해야 합니다.
용납함이 없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타협하면 안됩니다.

② 주님은 또한 더웁든지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에 진리를 뜨거운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의를 사모하는 마음과 삶의 태도가 뜨겁고 열정적 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뜨거운 마음으로 매달리는 교회와 성도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였기에 주님께서는 토해버릴 것이라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오직 일편단심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 사모하여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옛사람의 미련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며 머뭇머뭇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결쳐 놓고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라고 정체를 분명하게 말해야 하고
그 신분에 합당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영국에 파라데이라는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학교를 다닐 때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신문배달을 하는 중에 어느 부자집을 가니 신문함이 문안에 설치 되어 있는데 대문에 구멍이 있어 그리로 상체를 집어넣고 신문을 신문함에 꽂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체를 안으로 집어 넣고 신문을 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 이 상태가 집 안에 있는 것인가 집 밖에 있는 것인가?\\\"
과학자를 지망하는 학생답게 그걸 깊이 골몰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 집안에서 다른 사람이 나오다가 머리는 있는데 몸이 없으므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 바람에 바라데이의 목이 부러질뻔 했습니다.
파라데이라는 사람이 혼이 나 목을 문에서 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합니다.
\\\"아 집안에 있든지 집밖으로 나오던지 노선을 분명히 헤야 겠구나 \\\" 라고 깨달았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상태, 어중간한 상태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성도는 신앙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흰색도 아니고 검정색도 아닌 것을 회색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색깔이 분명해야 합니다.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신자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인 것같고 어떻게 보면 세상 사람인 것 같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바른 노선을 찾아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바에야 뜨겁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질수 있는가?
누가복음24:32절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 제자들이 말하기를
\\\"우리 속에서 마음 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누가복음 24:3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떨어질 때에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라고 하였으며
오순절 날 120문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할 때 불과 같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심령이 뜨거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책망만 한 것이 아니라
18절에서 치료법까지 제시하였습니다.
본문 18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
찬송가에도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되도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재산등 다른 것은 다 잃어버릴지라도 금보다 귀한 믿음은 잃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온갖 좋은 옷으로 몸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벌거벗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서 믿는 자로서의 올바른 행실을 찾아볼 수 없음으로 벗은자와 같은 수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흰옷을 사서 입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올바른 행실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벌거벗은 수치를 면할 수 있고 주님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모습은 마치 벌거숭이 임금님과 같습니다.
벌거숭이 임금님이 벌거벗고 말을 타고 길을 갈 때에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벌거벗은 수치를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부러워하는 줄 알고 오히려 좋아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로는 수치를 면할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세마포 흰 옷으로 갈아입을 때만이 우리의 수치를 가리울 수 있 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촉구가 19절에 나옵니다
19절에서도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게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책망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씀은 더이상 게으르고 나태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것은 게으르고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결단을 내리고 어떻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
① 14절에 아멘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아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삶으로 아멘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건강해지려면 아멘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멘이 살아나면 믿음이 살아나고 이 자리가 이적의 자리가 됩니다.

19절에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제 사랑하는 자들에게 징계가 가까이 왔음을 말씀하시고 징계 받기 전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회개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20절에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문밖에 쫓아 내었다고 책망했습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문밖으로 쫓겨난 손님이 되셨고
교회의 종들인 신자들이 교회의 주인 석을 차지한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손님이 되셨고 우리들이 그집에 주인이 되었습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 예수님이 문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차지한 라오디게아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신앙에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우리가 주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주님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멀리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그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욕심에 겨운 바쁜 일을 잠시 중단하고 주님의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똑 똑 똑
우리는 주님을 다시 모시고 주님과 만찬의 축제를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1907년 1월 6일 저녁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은 본문을 갖고
장대현 교회에 모인 2천여명의 신자들을 향해서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었습니다.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처럼 집안에 들어 앉아서 귀빈이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데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손님으로 온사람이 주인이며 남에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하는 사람은
바로 장대현교회에 길선주 목사와 신자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금 성령이 장대현 교회와 그리고 신자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설교 도중에 여기 저기서 눈물로 통회의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교회당은 눈물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셨고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로부터 장대현 교회의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신자들 마음 속에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날이 한국교회의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국교회 안에 들어오신 날 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다시 주님을 문밖으로 내몰고 우리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삭개오와 함께 음식을 잡수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집과 마음에 들어오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을 마음에 모셔드리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지금 마음을 여시고 주님을 마음에 모셔드리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과거에 모셔들였지만 주님을 문밖으로 내어 쫓으신 분들은 지금 회개하시고 주님을 마음에 모셔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고난을 통하여 책망하시면서 여러분들에게 호소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셔 드리십시다.

주님은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문고리가 없는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 그림을 보았을 것입니다.
문 밖에 서는 문고리가 없어서 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문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갈망할 분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열어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 질 수없습니다.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분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아직도 문 밖에 서 계십니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언제까지 주님을 거기 세워 두시겠습니까?
주님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느 장애인 소녀가 언제나 학교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아오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너무 놀려서 늘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청각검사(hearing test)를 하는데, 자기 담임선생님이 한 학생씩 불러서 귓속에 짧은 말을 해주면,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을 다시 말하는 테스트입니다.
담임 선생님이 평생 이 장애인 소녀의 삶을 뒤바꾸어 놓는 말을 소녀의 귀에 대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을 하였는가?
\\\"나는 네가 나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I wish you were my little girl)\\\"
소녀는 이 말로 인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몹시 기다릴 때 주님은 언젠가 우리 귀에 대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네가 나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I wish you were my little girl)\\\"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가 내몰았던 주님이 지금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기다리다 지친 우리의 상한 심령 속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러분 제가 먼저 15절 다움에 20절 다음에 22절을 읽겠습니다.
따라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