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를 진단하자 계3:14-22 어느 신학생이 학기말 시험이 다가오자 공부는 하지 않고 철야기도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시험 시간에 시험지를 받아보자 아는 것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기도한 믿음대로 답안지에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고 큼직하게 써놓고 일찌㉳?나와 버렸습니다. 교수님께서 채점을 하려고 답안지를 보니 기가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시험지에 “하나님은 다 아시니 100점, 학생은 다 모르니 0점”이라고 썼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알고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자신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큰 오류를 범하는 한 교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 중에서 단 한 가지도 주님께서 칭찬할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단 한마디의 칭찬과 격려가 없는 교회였으며, 주님을 몹시도 섭섭하게 하였던 교회였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라오디게아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만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들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부자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만족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진단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한 가지도 칭찬할 것이 없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병들어 버린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더 없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마지막에 등장하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세대주의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190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말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마는, 그러나 사도 요한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 일곱 교회는 어느 특정한 시대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든지 이러한 잘못과 허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교회의 실상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 마지막 구절에는 항상 예외없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계2:7, 11, 17, 29절과 계3:6, 13, 2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교회는 에베소 북쪽 약64km 밖에 있는 도시로서 유명한 의과대학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돈이 많은 금융의 도시로서 아시아 최대의 환락의 도시로 손꼽혔던 곳입니다. 이러한 도시에 세워졌던 라오디게아교회의 실상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5-16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진노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은 한 마디로 “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미지근한 교회! 도저히 역겨워 토해버릴 수밖에 없는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이 모습은 주님 안에 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주님의 역사에 도저히 참여할 수 없는 가치를 상실한 미지근한 성도들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교회의 첫 번째 실상이었습니다. 그러면 “차다”라는 단어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차다”라는 말은 죄된 것을 냉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죄와 불의는 냉대할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죄된 것과 불의한 것에 대해서는 차가와야 합니다. 냉정해야합니다. 용납함이 없어야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죄된 것과 불의한 것에 대해서 냉정하고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때문에 주님께 엄한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웁든지”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뜨겁다는 말의 의도는 의를 따르라는 교훈과 의미가 있습니다. 진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사모해야합니다. 의에 대해 뜨거운 마음으로 후대할 줄 아는 마음과 삶의 태도 이것이 바로 “더웁든지”라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죄 된 것과 불의한 것들에 대해서는 얼음장처럼 냉대할 줄 아는 교회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의로운 것과 옳은 것에 대해서는 뜨거운 마음으로 후대할 줄 아는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였기에 주님께서 토해 버릴 것이라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교회가 성결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죄와 의가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순종과 불순종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이 적당히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편리한대로 선택하고 유익한대로 처신합니다. 그렇습니다. 미지근하기에 썩기 시작합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한 것은 썩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균이 생기고 썩는 것은 미지근한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삶과 심령이 썩어간다는 증거입니다. 썩은 것은 거름으로나 쓰면 몰라도 쓸모가 없습니다. 보세요! 사람은 죄를 가까이 하면 의가 멀어지고, 의를 가까이 하면 죄를 멀리하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이 무엇과 가까워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조물주 하나님은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로 계신 분입니다. 때문에 그 조물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과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온전한 상태를 향하여 구별해 나가는 신앙의 작업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을 전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건방진 교만에 걸려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셔야합니다. 물질이 많은 것과 신앙의 부요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식이 많은 것과 은혜가 충만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교회는 병중에서도 가장 큰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깊은 병에 걸려 있는데도 건강하다고 고집한다면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도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와 성도들은 자기들이 잘하는 줄 알고 만족해합니다. 건강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을병에 걸려있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진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와 함께 우리 자신을 깊이 진단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첫째로 주님은 부요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하며 교만에 빠진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꾸중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너의 곤고한 영혼을 보지 못하느냐? 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너에게 닥쳐올 장래의 심판과 진노아래 떨고 있는 가련한 너의 가난한 영혼이 보이지 않느냐? 는 책망이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가난한 너의 영혼의 부르짖음을 왜 듣지 못하는가? 하고 애타하시는 심정의 말씀이십니다. 히12:6-8절 말씀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 속에는 징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이기에 징계하시며 그의 참 아들이기 때문에 때린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렸을 때를 한번 회상해 보십시오. 요즘 아이들은 매 맞고 자라는 아이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가정마다 하나 아니면 둘을 낳기 때문에 얼마나 아이가 귀합니까? 그러니 웬만한 일로는 때리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과잉보호가 되고, 아이들의 버릇이 점점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4-50대쯤 되신 분들이 자란 시절에는 가정마다 4-5명의 자녀는 기본이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있었습니까? 오늘은 큰 아이가 사고치고, 그 다음 날에는 둘째 애, 그 다음 날에는 셋째가, 항상 집안이 씨끌씨끌 합니다. 그러다보니 매 맞는 날도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형제들을 다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따질 것도 없이 형제들 모조리 종아리를 때리십니다.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겨우 참고 조용히 잠자리에 듭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자녀들이 잠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시퍼렇게 멍든 아이들의 종아리를 어루만지시며 안타까워하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 매를 맞을 때는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지나 성인이 되고, 자식을 키워보니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신에게 매를 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셨는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징계의 매를 드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깊이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몸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을 찾아 가시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신 분이십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진리로 목 말라하는 우리를 위해 그의 발은 부르트고, 그의 목은 쉬도록 복음을 선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주님의 사랑의 절정이 꽃을 피운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힘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 허리에는 굵은 창 자국,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기위해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징계하실까요? 왜! 꾸중하십니까? 옛말에 “양약고어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서 쓰나 몸에는 이롭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그것은 분명 고통입니다. 때로는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이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쓴 약과 같은 징계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가 믿음에 대하여 부자이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려 올라가는 사람들은 믿음에 부요한 영혼들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돈과 재물, 보화를 아무리 많이 쌓아 물질에 부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마지막 주님께서 오시는 날 주님 앞에서는 한갓 불타 없어져 버릴 먼지와 티끌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평생 먹고 입는 것이 걱정 없다고 스스로 부자요 바랄 것이 없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건강 걱정 없다고 장담하지 마세요. 실로 “곤고한 영혼과 가련한 영혼, 가난한 영혼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세상 떠날 때 돈과 땅과 재물을 다 두고 가지만 믿음만은 반드시 가지고 가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18절에 말씀하시길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진단해야 하는 것은 사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먼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본다고 하나 보아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사람의 눈의 식별 능력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육안입니다. 세상과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둘째, 식안입니다. 지식의 눈입니다. 셋째, 영안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진리를 볼 줄 알고 역사의 미래를 바라다보는 눈이요,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요, 말씀을 보는 눈이요, 주님의 역사와 섭리를 보는 눈입니다. 미국의 커크 깁슨이라는 야구선수에 대한 소개가 한 신문에 나왔습니다. 1980년 손목의 연골을 다치는 부상을 당함. 2년 뒤엔 왼쪽 무릎이 쑤시는 통증과 함께 왼쪽 장딴지 근육이 뒤틀어졌습니다. 왼쪽 손목 또한 심하게 삐었습니다. 1983년 무릎수술을 받음, 1985년 투수가 던진 공에 입을 맞아 17 바늘이나 꿰매었습니다. 허리에 심한 타박상과 오른쪽 발꿈치를 다쳤습니다. 1986년 발목을 심하게 다치고 나서 모두가 그의 선수로서의 생명이 이제는 끝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커크 깁슨은 그 자신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기록을 올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삶엔 잘 될 때도 있고 잘못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생을 했기에 내 직업에도,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오히려 잘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택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 이렇게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고 문제가 발생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아마도 “우리 집은 왜이래”, “내 인생은 왜이래”하면서 한숨의 인생을 보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유익을 보는 눈이 있어야합니다. 특별히 우리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인 것을 깨닫는 믿음의 사관이 필요합니다. 돈만 보이고 먹을 것만 보이는 눈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육안은 사람은 교만하게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눈은 하늘의 신령한 보화를 보게 하고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여 하늘 복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게 하며 말씀에 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보게 하라고 18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깨어지는 고난을 당할 때, 당장의 아픔만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진단해야할 것은 보호관에 대한 말씀입니다. 17절 하반절에 보면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부끄러움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부끄러움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이 부끄러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18절 말씀에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흰옷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흰옷은 성도들의 믿음으로 행하는 옳은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19:8절에 “빛나고 깨끗한 새 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새 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교회와 성도! 이 벌거벗어 수치스러운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과연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새 마포로 단장하고 있는가를 살펴야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고 병을 치료하듯이 능력의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습기 차고 거름 냄새나는 땅 속에 뿌려지게 됩니다. 딱딱한 껍질이 말랑말랑해지고 껍질이 깨어집니다. 그때야 비로소 새 생명의 진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많은 열매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길바닥 같은 땅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갈아엎어 지면서 깨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겪어야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생명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이 깨어져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많이 얻어맞고 깨어진 사람은 그 깨어진 자국마다 생명 샘이 흘러나옵니다. 성령의 기름이 흘러 나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성과 육의 습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에게 축복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가득찬 인간을 사용하실 수도 없으시며, 사용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 주시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의 존재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14절에 나타난 주님이 처방이 오늘 우리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이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아멘”을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아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생명과 삶으로 “아멘”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가 회복해야할 신앙건강 덕목 1호는 아멘의 회복임을 알아야합니다. 병들어 시든 신앙의 첫 번째 원인은 아멘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아멘을 다시 살리십시다. 아멘이 살아나면 믿음이 자라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둘째, 충성을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충성이란 맺어진 관계에서 끝까지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변함없이 처음과 끝이 같은 것입니다. 변함이 없어야합니다. 환경이나 조건 때문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 모든 교회는 충성을 회복해야합니다.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셋째, “참된 증인”이 될 것을 요청하십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구속주이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상 역사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가 이 땅에서 살아야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릴 때 여기서부터 교회의 타락은 시작되고 성도는 다른 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혼이 나게 됩니다. 교회와 성도가 이 지상 역사 속에서 해야할 가장 위대한 임무는 “참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창조의 근본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은 생명이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세계임을 증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온전한 의요, 하나님 나라 자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세상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라오디게아교회는 미지근한 쓸모없는 교회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차든지 더웁든지 해야합니다. 죄와 불의에는 냉대하고 의와 진리에 대하여는 뜨거운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에 부요한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영안이 열려 주님과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말씀에 순종하여 흰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을 회복하는 교회, 착하고 충성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으로서, 하늘나라와 의를 건설하는 교회로 회복되라고 주님은 간곡하게 부탁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