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교회

미지근한 교회/계3:14-22

미지근한 교회
계3:14-22


한 젊은 의사가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몸무게가 줄면서 자꾸만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고 동료의사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결과는 위암이었습니다. 암에 걸린 지 벌써 오래 되어 이제는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 밖에는 살 수 없다는 시한부 생명을 선언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肩?謳?構鍍?그는 바로 암환자를 진찰하는 내과 의사였습니다. 자신은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암에 대한 진찰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사람을 진찰하면서 왜 자기는 진찰할 생각을 못했겠습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를 예외시 했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을 보면서 나도 환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 죽는 것을 볼 때, 나도 죽을 사람이요, 다른 사람 죄 짓는 것을 볼 때 나도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못한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체로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지식은 많은 부분 감정적인 것입니다. 이성적 판단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한 객관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그러리라고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느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외적인 것으로 자신을 압니다. \\\'나는 젊었다, 나에게는 건강이 있다, 나의 외모는 어떻다\\\'라고 자신을 이해합니다. 나는 얼마를 가졌다, 한 달 수입이 얼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이 역시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이러한 것들이 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나를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내가 있습니다. 남들이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고, 남들이 나를 지성인이라고 하면 내가 지성인인줄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에게는 능력이 있다, 당신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게 또는 그 회사에 정말로 내가 필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기, 사회 속에서 평가 되는 자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얼마든 바뀔 수 있고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내가 나의 진정한 모습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영적 모습입니다. 영적 존재, 이것이 나의 본질이요, 참모습입니다. 자신의 영적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 다 알면서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모습을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병들었는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암으로 죽게 된 젊은 의사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나의 영적 모습입니다.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하나도 없는 교회입니다.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본 받지 말아야 할 교회요, 되어서는 안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교회야말로 현대 교회의 모습이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모습이 내게 없는지 깊이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깨닫고 돌이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교회에 세 가지 잘못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신앙의 어중간한 태도입니다. 주님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기는 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글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를 했습니다. 달구지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달구지처럼 뒤에서 밀어야만 가는 사람입니다. 연 같은 교인도 있습니다.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날아가 버리는 사람입니다. 고양이 같은 교인이 있답니다. 줄곧 토닥거려줘야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개구리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다음 순간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풍선 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잔뜩 부풀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장식등같은 교인이 있습니다. 쉴새없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어떻게 따르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을 가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상태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이러한 상태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본문에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며 내가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토한다는 말은 싫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영국에 파라데이라는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학교를 다닐 때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신문배달을 하는 중에 어느 부자집을 가니 신문함이 문안에 설피 되어 있는데 문에 구멍이 있어 그리고 상체를 집어넣고 신문을 신문함에 꽂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체를 안으로 집어 넣고 신문을 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 이 상태가 집 안에 있는 것인가 집 밖에 있는 것인가?\\\" 과학자들은 좀 엉뚱한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걸 깊이 골몰하며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이 오는 소리를 못들었습니다.

아마 그 다른 사람도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이 거기 끼어 있는 것을 모르고 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 바람에 바라데이의 목이 부러질뻔 했습니다. 파라데이가 혼이 나 목을 문에서 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합니다. \\\"그 상태가 문 안에 있는 것인지 문 밖에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그러한 상태는 목이 부러지기 딱 알맞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어중간한 상태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언제 넘어졌습니까? 예수님 붙잡혀 갈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베드로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과 함께 붙잡혀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 보면 예수님이 끌려가실 때 베드로가 멀찍이 뒤를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따라가려면 바로 따라가든지 안 따라가려면 아예 도망가버리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따라갔습니다. 이 어중간한 상태가 문제였습니다. 베드로가 결국 바로 그 자리에서 형편없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중간하게 따라가다가는 형편 없이 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십시다. 도대체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습니까? 여기 적당하게 믿을 수 있는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철저히 믿고 결사적으로 믿고 어린아이처럼 믿어야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에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물에 물 탄 듯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주님 토하여 내칩니다. 뜨거움을 가지고 간절함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두 번째, 자만심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스스로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예배도 잘 드렸고 헌금도 했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을 영적으로도 부유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 평안하고 잘 살고 일 잘되면 그만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영혼은 죽어가고 있는데 문제를 느끼지 조차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미국 어느 한인 교회에 박 모라고 하는 외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부인도 의사로서 부부가 다 의사였습니다. 미국 이민 가는 분들의 대부분이 목적이 돈버는 것과 자녀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이 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부가 의사로서 열심히 일을 하니 자연히 큰 돈을 벌었습니다. 집도 여러 채 사두었고 별장도 샀습니다. 미국인도 부러워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공부를 잘해서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큰 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작은 아들은 이름 있는 상대를 다녔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은 점점 떨어지고 교회와 멀어졌습니다. 목사님 좀 열심히 신앙생활 하자고 권면해도 건성으로 듣고 우린 부족한 것이 없는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에 가기는 해도 은혜도 안되고 다른 교인들은 다 시시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두 형제가 최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미국인 친구와 함께 드라이브하다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안전벨트를 메지 않은 둘째 아들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시궁창에 떨어진 것을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죽고, 큰 아들은 안전벨트는 배었지만 쓰고 있던 안경이 깨어지는 바람에 한쪽 눈이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에 행복이 비극으로, 기쁨이 절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매일같이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환경 좋은 여건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로 말미암아 자만에 빠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적으로는 더 빈곤해집니다. 세상적으로 좋으니 영적으로도 좋은줄 착각한다. 영적인 자기 모습을 잊어버립니다. \\\"나는 부자라 부유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셋째는 무지입니다. 17절 하반절에 주님 말씀하십시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영적 불행에 대해 전혀 무지합니다. 실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스스로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중병에 걸려도 자신이 병 걸린 것을 알 때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이 병 걸린 것을 모를 때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끼돼지 열 두 마리가 소풍을 갔는데 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모두 건넌 후에 다 있는지 확인을 해봅니다. 가장 큰 놈이 세어보니 열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이거 큰일났습니다. 다른 놈이 세어 봐도 역시 한 마리가 모자랍니다. 어느 놈이 헤아려도 열 한 마리입니다. 그래서 한 마리가 어디 갔나 하고 우왕좌왕하며 안타까워하는데 실은 한 마리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열두 마리 모두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열두 마리 모두 자기는 세지 않고 남만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더는 세상을 탓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 탓하지 말고, 누구도 허물하지 맙시다. 더구나 지난 이야기, 쓰리고 아픈 과거를 들추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 자신은 점점 더 악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말을 그만둡시다. 여기에서 말을 멈추고, 모든 원망을 끝냅시다. 그리고 내 모습을 생각합시다. 이 세상에 아무리 죄가 많고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해도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다면 멸망치 않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회의 죄 문제입니까, 세상의 악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의인이냐 -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주님 이들에게 권면하신다. 첫째는 알아라고 하십니다. \\\"네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아라고 하십니다. 너의 그 부끄럽게 비참한 보습을 보아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알아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비참한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영안을 떠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얼마나 병들고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다른 성도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얼마나 시험에 들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아야 합니다. 보아야 소망이 있습니다.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둘째는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19절에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회개해야 합니다. 그냥은 회개하지 않으니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징계가 있다면 더더욱 회개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5에는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십니다. 징계를 통해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뜨겁게 주님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게을렀던 것을 회개하십시다. 스스로 신앙에 교만했던 것을 회개하십시다. 자신의 모습을 몰랐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햐야 합니다. 회개만이 살 길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해드리라고 합니다.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 주님 내 마음 문 밖에 거 계십니다. 그리고는 내 마음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영으로 온 누리에 충만하십니다. 그러나 주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처소는 내 마음입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내 마음에 임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함께 하시고 새로운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다섯 살난 아이가 할아버지가 주신 백 달러짜리 지폐를 거절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백 달러를 거절한 이유는 자기의 저금통이 가득 차 있어 지폐를 넣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보니 손자의 저금통에는 1센트 동전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실상 백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은 페니 만 개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인데도 페니로 채운 저금통이 백 달러를 거절케 한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 아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가치 없는 세상 것들로 마음이 가득 차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 차 있습니다. 무슨 생각입니까? 무슨 관심입니까?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려야 합니다.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라는 사람이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그림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안으로부터 굳게, 조그만 빈틈도 없이 단단히 잠긴 어떤 집 문 앞에 예수님 바싹 다가서서 계십니다. 마치 그 모습은 안의 동정이라도 살피기 위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기울이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굳게 닫혀진 문을 두드리십니다. 조용히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문에 문고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이 그림이 미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홀만 헌트는 일부러 그림에 문고리를 그리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여기 이 그림의 핵심이 있습니다. 문은 밖에서 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밖에는 문고리가 없으니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전적으로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내가 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주님 오십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고 있으니 열기만 하면 들어오십니다. \\\"그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오셔서 함께 교제하며 새 힘과 새 능력으로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나를 바꾸지 못합니다. 내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속에 오실 때 진정한 변화가 있어납니다. 새로운 가치관에 세워지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됩니다. 뿐만아니라 주님, 모든 어려움 앞에 능력으로 함께 합니다. 모듬 일에 승리하게 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 생명의 사람, 능력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겸손히 주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새로운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