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각하는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계3:17-22 어떤 여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열 여섯 정도된 나르시스라는 소년이 숲속의 은빛 고요한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너무 사랑스러워 자기 얼굴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고백하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만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여기에서 \\\\\\\'나르시시즘\\\\\\\', 즉 \\\\\\\'자애병\\\\\\\' \\\\\\\'자기가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이란 단어가 나오게 되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설명을 듣고 있던 여학생 한명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그 병에 걸린 모양이에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니?\\\\\\\" \\\\\\\"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거울을 떠날 수가 없거든요\\\\\\\" \\\\\\\"얘야, 그것은 자애병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병이란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착각하며 사는 사람만큼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눈치를 주고,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자신에 대해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남들에게 뻐기고, 보란 듯이 활보하고 다닌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참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하게는 말하면 밥맛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계시록의 7교회중에 이렇게 주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16절 끝에 보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 교회가 어떤 교회였기에 주님이 이렇게 극한 표현을 쓰고 계십니까? 그냥 촛대를 옮겨버리겠다 정도가 아니라 입에서 토하여 내버리겠다는 말은, 극도로 혐오스러움을 드러내는 표현이 아닙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이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이런 평가를 하는 이유는 첫째는 이 교회가 미지근한 교회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교만과 착각 으로 똘똘 뭉쳐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주님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선 미지근하다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뜨겁다는 말은 주님과 복음에 대해 불이 붙은 상태입니다. 기도응답의 체험이 있고, 말씀을 보면 불이 타오르고,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는 그런 상태입니다. 반면에 차갑다는 말은 전혀 감각이 없이 냉냉한 상태, 즉 복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이죠. 여기서 주님이 차라리 차갑든지 해라는 말씀은 복음에 대해 냉냉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한다는 말이 아니라, 미지근한 것에 대한 최고의 탄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정말 복음에 적대적인 상태를 원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미지근한 것이 너무 답답하니까 차라리 차갑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차가우면 복음이 들어갈 때 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이라도 있고, 뒤집힐 가능성이라도 보이니까 말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들, 창기들... 이런 사람들, 다 냉냉한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또 사도바울도 극도로 냉냉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이런 냉냉한 사람들이 복음에 부딪히니까 얼마나 뜨거운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차가운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라도 있는데 지금 미지근한 사람은 그런 가망성도 보이지 않는다는 탄식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거부하지 않습니다. 적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을 들어도 반응이 없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거부를 하면 다음에 또 기대라도 하지요. 거부는 안하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의 이런 상태를 향하여 열심이 없다고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음에 대해 감격하는 사람도 없고, 예배에 열심을 내는 사람도 없고,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도 없고,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주위에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관심도 없고 하나님이 교회와 나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가?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의 열심도 없고, 가난한 마음과 애통해하는 마음도 없고, 의를 사모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그냥 나옵니다. 무관심하게 왔다가 무관심하게 돌아가고 무관심하게 불신자와 똑같이 생활합니다. 저는 목회자니까 이것이 이해가 갑니다. 얼마나 탄식스러운지 이해가 갑니다. 정말 이것보다 탄식스러울 때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 저 사람은 좀 매를 때려서라도 하나님앞으로 당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오는 분들은 그래도 좀 들합니다. 사실은 이렇게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교회와 목회자의 소망은 이렇게 움직이며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돈많은 사람들이 소망이 아닙니다. 지식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 소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북해요. 아무리 돈이 많고 유능해도 말씀에 반응하지 않으면 짐입니다. 보통 돈이 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면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회에서 가장 걸림돌이 이런 분들입니다. 다 갖추었는데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가장 걸림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교인들이 부자입니다. 헌금을 많이 합니다. 재정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스스로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복음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주님 때문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뜨거움이 없습니다. 헌신이란 말과는 담을 쌓고 삽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즘 교인들을 보면 왜 그렇게 안움직이는지 모르겠어요? 특별히 부산경남 지역은 가장 심합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안움직이는지... 세상일 하는 것보면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데 자기 영혼 살리고 남의 영혼 구원하는데는 왜 그렇게 안 움직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복음을 모르고 복음에 대해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이해가 되고, 다음에 가능성이라도 보일텐데 이 사람들은 복음을 이해한다고 하는데 안 움직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주님에 대해, 복음에 대해, 영혼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 교회는 정말 안타까운 교회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촛대를 옮기겠다가 아니라 토해내치겠다고 하십니다. 정말 무서운 말 아닙니까? 이렇게 주님이 너희들이 미지근해서 토해내겠다고 말씀했을 때 그들은 이것이 어떤 뜻인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는 북쪽으로 히에라볼리라, 그리고 동쪽의 골로새라는 도시와 삼각형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도시였는데, 히에라볼리라가 온천도시여서 땅속에서 뜨거운 물이 펄펄 끓어올랐습니다. 이 뜨거운 물이 내려오면서 라오디게아 근처에 오면 석회가 썩인 미지근한 물이 되고 골로새에 가면 아주 차가운 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의 이 미지근한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이 토해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미지근한 물이라면 금방 이해를 했습니다. 매일 그들이 경험하는 것이니까요, 그 물을 한번 마셨다가는 토해내지 않고는 안될 정도로 마시기 힘들었던 물이 라오디게아에서 나는 물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들의 신앙을 이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히에라볼리라의 뜨거운 물은 뜨거운대로 마실 수 있고, 골로새의 차가운 물은 차가운대로 마실 수 있지만 라오디게아의 석회가 썩인 미지근한 물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쓸모 없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라오디게아의 물이 석회와 썩여 미지근하게 마실 수 없었던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이 세상과 짬뽕이 되고, 세속에 물들어 주님이 쓰실 구석이 하나도 없을 만큼 쓸모없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지근한 신앙은 안됩니다. 이왕 예수를 믿었다면 뜨겁게 믿어야지 미지근하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세련된 신앙, 이런 것,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세련되고 포옴나는 신앙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뜨거운 신앙이 쓰임받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주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주일날 한번 힘들게 와서는 그것도 까닥까닥 졸고 가는 사람을 주님이 어떻게 쓰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렇게라도 오는 것이 은혜이고 기적이라고 했는데 이런 신앙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생 그렇게 교회다녀야 되겠습니까? 이런 신앙은 남의 불도 꺼버립니다. 교회를 죽이는 신앙이 바로 이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어떤 것이 미지근한 신앙입니까?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아는 것 같은데 조금도 행하지 않는 신앙이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그럼, 왜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 마음에 세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물이 석회와 썩여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물이 된 것처럼 신앙도 그 마음의 중심에 세상이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세상에 맛을 들이거나 그런 것에 마음이 빼앗겨버리면 말씀에 대해 미지근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절대로 세상을 정복할 수 없고 이런 미지근한 신앙인들이 있으면 세상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세속화되고 교회가 세상의 흐름에 쫒아가기 바쁘게 되는 것이죠. 주님 보시기에 이런 교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교회를 세웠습니까?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빛과 소금이 되라고 세우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세상을 사모하고 세상을 닮아가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어 세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체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뿐더러,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생명을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저질적이고 일시적이고 헛된 재미는 누릴지 모르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그 영광스럽고 풍성한 신앙의 맛은 결코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안타깝게 이들의 마음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이 내 마음의 중심에 오시면 이것도 하지 못하고 저것도 하지 못하고 구속받고 제재받고 억압받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중심에 들어오셔서 왕노릇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에게 풍성한 왕의 식탁을 함께 누리고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풍성한 왕의 잔치를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솔로몬 임금의 식탁이 어떠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소가 몇마리요, 양이 몇마리요....하는 식인데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 많은 것을 다 먹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솔로몬의 식탁에는 모든 귀한 것이 다 올라왔습니다. 거기에 한번 참석하면 왕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의 재미에 취해, 세상에 마음이 팔려 겨우 부스러기를 먹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가장 부자인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정말 좋은 것이 여기 있는데, 정말 부요한 것이 여기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세상의 재미에 팔려 저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최고인줄 알고 부족함이 없다고 착각하고 교만에 빠져있으니 얼마나 한심하면서도 안따까우시겠습니까? \\\\\\\"얘들아, 제발 문좀 열어라!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자.....나와 더불어.....\\\\\\\" 저는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현대교회를 생각합니다. 현대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자꾸 교인들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주님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충실한 교회, 복음을 전하는 교회, 복음을 설교하고 죄를 설교하고 거룩을 설교하고 천국을 설교하고,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설교하면 거북해하는 유치하고 어린아이같고 미지근한 사람들로 꽉차있는 것이 현대교회같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라는 설교, 부담주는 설교, 부담주는 교회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주일 내내 피곤하게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살다가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갔는데 거기에서 부담을 주면 누가 오겠습니까? 더 힘차게 살 수 있도록 자꾸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불어넣어 주고, 설교도 구수한 옛날 이야기나 매끄러운 칼럼처럼 부담이 없어야지, 회개하라든지, 헌신하라든지, 제자가 되고, 시간을 바치고, 희생하고,....십자가를 지고.....이렇게 몰아부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 교인들 일주일 내내 피곤하게 살다가 주일날 교회오는데 무엇하러 그런 사람들 보고 그렇게 부담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교인들이 갈등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갈등을 없애줍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주님의 교회에 가면 어떤줄 아십니까? 고민하고 갈등하느라고 시간 다 보냅니다. 언제까지 갈등합니까? 내 마음속에 욕심이 다 죽을때까지입니다. 교회가 무엇하는데입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그 말씀과 내 정욕이 부딪쳐 갈등할 때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의지하고 믿음으로 세상에서 살도록 도전하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데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 안하고 다른 것 하면 안되죠.. 주님이 이런 교회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못하도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갈등을 주고 고민을 주는 말씀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상관없이,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혼자 세상에서 욕심대로 뛰었고 그래서 세상적으로 성공했습니다. 부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육간에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들이 가장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십니다. 곤고하다는 것은 큰 갈등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가련하다는 것은 그 처람한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을 보십시오. 18절입니다.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벧전1:7에 나오는 말씀으로 고난을 통과한 연단된 믿음입니다. 지금 이들이 세상에 마음에 빼앗겨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미지근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미지근한 믿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불로 연단한 금같이 고난을 통과하고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서 고생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잘사는 것보다 믿음으로 고생하는 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부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주님을 찿게되고 더 말씀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부요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합니다. 흰옷은 예수의 피로 죄씻음받은 사람이 계속 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벌거벗은 사람입니까?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자기죄를 회개하지 않고 아무 의식없이 이 죄로 충만한 세상 속에서 죄와 더불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밍크, 무스탕,.....입어도 벌거벗은 사람들입니다. 라오디게야 교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해서 좋은 옷은 다 입고 다녔는데 그들의 삶은 죄로 물들어 있었고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너무나 부끄럽게 벌거벗은 수치스러운 모습의 그들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죄 씻음 받는 것이며, 그리고 다시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는 다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은 사람은 직업을 택할때에도 양심이 거리끼는 것은 하지 말고, 수입이 파격적으로 줄어든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을 더럽히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을 더럽히면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셋째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합니다. 여기 본다는 것은 영적 분별력을 말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눈에 바르면 금방 모든 것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분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주님께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고 또 적용하면서 많은 방황을 하다가 조금씩 눈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영적분별력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 가치있고 무엇이 정말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는 가치인지 몰랐기에 그들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겼고 뜨거운 신앙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가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삽시다. 그리고 참으로 부유한 자가 됩시다. 주님께 가서 흰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은 몸이 노출되지 않도록 합시다. 매 순간 주님의 의의 옷으로 입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매 순간 주님께 기도하면서 말씀을 볼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분별력과 통찰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왕의 잔치로 나아갑시다.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그 왕의 식탁을 사모합시다. 그 맛을 한번보고 나면 다시는 세상의 헛되고 저질스러운 영광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아무 쓸모없는 신앙입니다. 복음의 역동성을 회복합시다. 신앙의 생명력을 회복합시다. 뜨거운 가슴을 회복합시다.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놀라운 식탁의 축복이 우리의 축복이 되게 합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