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의 교훈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훈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어떤 장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외출할 때면 항상 등불을 들고 나갑니다. 비록 자기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자기가 등불을 들고 있으면 마주 오는 다른 사람은 자기가 들고 있는 등불을 보고서 자기를 피해 갈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분명히 등불을 들고 있었는데 그만 밤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장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보쇼, 나야 앞이 안보이니까 별 수 없다 치고 대체 당신은 눈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내가 들고 있는 이 등불도 못 봤소?\\\"

마주 오던 사람이 대답합니다.

\\\"이 양반아, 등불을 들고 다니려면 불이나 제대로 키고 들고 다녀야지, 불 꺼진 등불은 들고 다녀서 뭐 할 거요?\\\"

애초에 그 장님은 자기가 등불만 들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피할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불도 켜지 않은 등불을 들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장님입니다. 빛만 보지 못해서 장님이 아니라 어두움도 보지를 못합니다. 소망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절망까지도 없습니다. 어떤 것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오히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줄로 알아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네 스스로 생각하는 자기들 모습과 주님이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이 서로 다른 교회였습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하는 그들 모습 - \\\'우리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것과 주님이 보시는 그들의 모습 - \\\'너희는 그런 사람이다\\\' 하는 것이 서로 달랐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무슨 뜻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생각으로 자기네는 부자고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거기에다가 또 눈멀고 벌거벗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실이 잘못 되었으면 일단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고치든지, 말든지 할텐데 잘못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 고칠 여지가 아예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적어도 자기들 생각으로 자기네는 부자고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자고 부요해서 부족한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떤 경우에 그런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은 남편 돈 잘 벌어 오고, 자식들 말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가족들 모두 건강한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으면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요한 것과 가난한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예를 들어 가난한 집과 부잣집은 하다못해 버리는 쓰레기도 다른 법입니다.

같은 개라도 부잣집 개는 고기를 얻어먹고 가난한 집 개는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만 먹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부자라는 얘기는 뭔가 나눠줄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국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가난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나눠주는 것은 고사하고 필요한 만큼 갖고 있지 않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있으면 부자고 - 한 달에 150만 원이 필요한데 수입이 200만 원이면 부자고, 필요한 만큼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으면 - 필요하기는 150만 원이 필요한데 실제 수입은 100만 원밖에 안되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럼 가난한 집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을 메워야 합니다. 빌려 오든지 뺏어 오든지 뭔가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를 해결하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부요한 것이고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해결하지 못하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면 가난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교회 안으로 옮겨 볼까요?

신앙을 얘기하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신앙만 얘기하지 못하고 꼭 남과 비교해야만 하는 경우라든가 혹은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서 자기 신앙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난 하려면 제대로 하지, 그래도 저렇게는 안 해\\\' \\\'그래도 난 저 정도는 아냐\\\'라는 말을 한다면 이게 가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은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러분 주변 사람이 그 어떤 신앙상의 유익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기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얘기할 것이 없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해야만 할 말이 있으면 아직 가난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렇게 가난한 교회였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들은 부요한 교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네 행위를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은 너를 모른다. 심지어는 너 자신도 너를 모른다. 그래도 나는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라오디게아 교회를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만 알고 계시겠습니까? 때로는 예배 빼먹고 딴 짓 하는 것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여 드리고 또 주님을 찬양할 때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입술로 주님의 영광을 가릴 때도 그때도 주님은 바로 우리 옆에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운전을 하다 보면 짐짓 신호를 위반하는 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턴 금지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유턴을 하는 차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구간에 교통경찰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아무도 위반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교통경찰이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저 경찰의 눈을 피해서 유턴을 해야지\\\' 하고 기회를 엿보는 차를 아직까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는 위반을 할 생각을 갖고 있었어도 경찰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설령 그 경찰이 자기 차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고 해도 신호대로 운전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말씀대로 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그저 알기만 하고 실제 살아가기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결국 우리는 교통경찰만큼도 무섭지 않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교통경찰만큼도 구속력이 없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크지를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무섭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마 만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 그 사람 신앙도 같이 이마 만해 질 것입니다. 요만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 그 사람 신앙도 같이 요만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체 어느 만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에게서 얼마 만한 구속력을 느끼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느 만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그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신앙 행위의 온도를 측정하고 계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책망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믿기는 믿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신자인데, 미지근하게 믿어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전도라도 하면 됩니다.

차라리 교회 밖에 있으면 교회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라도 하겠는데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전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구토를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조금만 이상해도 구토를 합니다만 속이 든든한 사람은 하루나 이틀 정도 날짜가 지난 우유를 먹어도 끄덕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어느 만큼 그 행위가 역겨웠는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기꺼이 용서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우리 주님조차도 차마 가납하지를 못하시고 토하여 내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해서 그렇습니다.



이 미지근하다는 것이 어쩌면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너무도 악합니다. 이 악한 세상 속에서 예수 믿는 티를 내서는 이익 볼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기는 믿으면서도 믿는 티는 안 나게 믿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으면 믿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두루뭉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자기 생각으로는 현명한 선택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것이 가장 악한 행위입니다. 그토록 오래 참으시고 그토록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도 차마 용납하지를 못하시고 토하여 내치겠다고 할만큼 악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게 있습니다.

이 미지근하다는 것이 대체 어떤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까? 대체 어떤 사랑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미적지근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지근하게 사랑하셨으면 우리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아들조차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편입니다. 그러니 남을 대신해서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고는 자기가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자기가 대신 죽으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살리고 자기도 살려고 했는데 그만 힘이 모자라서 죽은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살리고 자기는 그 사람 대신 기꺼이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남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면 아마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자기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다 치고, 대체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식을 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 예수를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와 우리를 놓고 누구를 택했는고 하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을 설명하는 단어가 놀랍게도 미지근하다는 단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자력 발전소를 돌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런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는 고작해야 호롱불 하나도 제대로 키지 못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런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면서도 그저 미지근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신 것입니까? 마음 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문 밖에 있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마음에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오히려 부자고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줄로 잘못 알고 있는 이유가 뭐였는고 하니 그 마음에 예수가 없는 것이었고, 하나님으로부터의 그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고작해야 미지근한 반응밖에 보이지를 못하는 이유도 그 마음 중심에 예수가 없는 것이었고,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는 엄중한 꾸중을 들어야 했던 이유도 알고 봤더니 예수가 없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얘기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얘기입니다. 이미 그 마음에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여 있는 곳입니다.

주일이면 이렇게 모여서 예배도 드렸을 것이고 아마 선교도 하고 구제도 했을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으로는 분명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 정작 자기들 삶의 주인인 예수는 빼놓고 자기네끼리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게 뭡니까?

우리가 흔히 \\\'신앙 생활을 한다\\\', \\\'교회 다닌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들을 하는데 이게 전부 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인, 크리스챤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대장이고 자기는 그의 졸병입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냐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안하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간섭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성령님의 간섭과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제 얘기에 모순이 있습니까? \\\'신앙 생활이란 성령님의 간섭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성령님의 간섭대로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여기에 잘못된 것이 있습니까?

분명히 잘못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이 설교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만약에 지금 이 시간부터 성령님께서 더 이상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성령님의 간섭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간섭할 때와 간섭하지 않을 때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더 이상 여러분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혹시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간섭하지 않아도 지금까지와 아무런 차이가 없지는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문 밖에 세워 놓고 예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 역시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여러분 나름대로 신앙 생활도 아닌 것을 붙잡고 신앙 생활이랍시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어서 속히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고 있고 그 입술로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서도 그 마음 중심에 예수를 모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우리 주님께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로 모셔서 좌정하게 하시고 그 주님의 뜻에 여러분의 마음을 기꺼이 순복시키기로 다짐들을 하시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도 저희들,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무딘 입술 통하여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허락하셨사오니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항상 이러한 감사가 끊이지 아니하게 하여 주옵시고

더욱 우리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를 사모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간절히 원하옵기는 우리 각자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에다가 우리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오라

마치 우리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신앙인 양

잘못 알고 행하는 부분이 있지나 아니한지 돌아보게 하옵시고,

정작 주님의 뜻은 외면한 체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듯한 착각으로

나태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 주님의 음성에 가장 민감하게 하옵시고

오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다만 아버지의 원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쌓아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