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여, 성령의 음성을 들어라 계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본문 : 계3:14-22 성령강림절 05.5.15 제목 : 교회여 성령의 음성을 들어라 요한계시록2-3장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하여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칭찬과 책망을 같이 들은 교회도 있고, 칭찬만 들은 교회도 있고, 책망만 들은 교회도 있습니다. 칭찬을 들었던 책망을 들었던 상관없이 공통점이 있다고 하면, 이들 일곱 개 교회가 당시 하나님의 음성인 성령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편지내용의 말미에 보면 반드시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귀 없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귀없는 자는 들을 수 없습니다.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교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성부 하나님 시대가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 성자 하나님의 시대도 아닙니다. 지금은 성령 하나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을까요? 성령님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와 문화 등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귀에는 무슨 소리가 주로 들립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서재의 여러 책들을 보는 순간에 제가 설교시간에 몇 번이나 소개한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씨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을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 내용은 물이 ‘사랑한다’는 말이나, ‘고맙습니다’, ‘감사’ ‘미안해요’ ‘그렇게 해주세요’ ‘너 정말 예뻐’등 이와 유사한 말,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이나, 텔레비전이나, 아니면 호숫가에서 기도할 때 등 글을 물을 향하여 보여주거나 아니면 소리를 들려줄 때에 물의 표정이 바뀌어 육각수가 되기도 하고, 찌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실험 사실을 기록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사람이 다루는 방법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물도 사람의 음성을 듣고, 언어를 보고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는 성도로서, 아니 목사로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듣고도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라는 생각을 깊이 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물도 우리의 소리를 듣고, 아니 글씨를 보여주기만 해도 물의 표정이 바뀌어 육각수의 아름다운 결정체가 되기도 했다가 육각수의 결정체가 일그러지기도 하는데 왜 우리는 성령님이 들려주시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할까요? 왜 그렇게도 좋은 성령님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지 못할까요?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 교회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봅시다. 지금까지 내가 자발적으로 듣지 못했다 할지라도 오늘 이 목사를 통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회에 들려주셨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부족한 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에 주시는 음성은 곧 나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소리입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셔서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분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첫째,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교회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이 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립니까? 그리고 누구의 문을 두드립니까? 문밖에 계신다는 것은 아직도 누군가가 모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것은 안에서 잠그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근 채로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을 잠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전도하면서 종종 사용합니다만 사실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문이 닫힌 불신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이 부수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랬고,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도 그들에게 바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들어가시지 못하셨을까?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인본주의입니다. 주님이 들어가셔서 앉아계실만한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하는데 자기를 위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데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는데 자기 뜻대로 살고, 교회를 개척하는데도, 교회를 이루어 가는데도, 전도하는데도, 봉사하는데도 하나님제일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가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들려주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마지막 때로 갈수록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며 미혹함으로 신앙생활이 어려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참 믿는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시며 말세에 믿음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의에 가까이 가려는 신자에겐 반드시 의로 인한 핍박이 있으며 말씀을 지키려는 신자에겐 말씀을 인한 시험이 따르기도 합니다. 이삭을 이스마엘이 괴롭히듯이 언제나 인본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말세가 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핍박과 어려움과 시험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면 인본주의와 타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손해 본 일이 없거나 어려움을 당한 일이 없다면, 자신의 신앙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채 미지근한 인본주의 신앙으로서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본주의는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문밖에 세워두고 자기의 생각과 경험과 세상의 지식과 삶의 이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직 그분만이 말씀하시고 그분이 명하시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신본주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은 후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요즘 용어로 보면 바울은 보수주의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요소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진보주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두 수레바퀴가 같이 가야 합니다. 보수적인 명분 때문에 개방적 적극성을 위험하다고 외면하며 정죄해서도 안 되고, 개방적 실리 때문에 보수적인 것을 고루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경시해도 안 됩니다. 진리는 생명을 걸고 사수해야 합니다.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1장 8절에 보면 “천사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서 “충성된 목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복종하게 한 그 교리를 고수하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관에 있어서 성경관, 기독관, 구원관, 교회관, 종말관 등이 성경에 근거해 확실해야 하고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좋게 하여야 됩니다. 바울 사도는 철저한 신본주의자로 인본주의를 배격하였습니다. 갈라디아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깨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다면, 늘 명확하게 그 분의 뜻을 분별하고 있지 않는다면 적당히 타협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변화되는 세상과 더불어 교회에도 세속주의, 인본주의 물결이 너무도 자연스레 침투해 들어옴으로 한국교회는 이제 변질되지 않기를 위한 투쟁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수가 비진리를 주장하고 나만 홀로 남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진리 편에 서야합니다. 인본주의, 즉 인간위주, 인간의 능력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인본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지 말라고 하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되셔야 합니다. 2. 흰 옷을 사서 우리의 수치를 가리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옷을 입었으나 벌거벗은 수치스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벌거벗었다고 해도 자기를 향한 소리가 아닌 줄을 알고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흰 옷을 사서 입어 그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수치는 무엇이며, 옷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계시록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라오디게아가 입지 못하여 수치를 드러낸 것과 흰 옷은 ‘의로운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이 어디 라오디게아 교회만 그렇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교회와 나의 신앙에도 이런 모습으로 있기에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신앙의 형태를 말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교회가 농어촌 미자립 교회도 돕고, 어려운 이웃도 돕고, 수재민와 지진피해를 입은 자들도 돕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선교헌금도 하고, 교도소 지원도 하며 그들을 돕고 있는데 우리에게 의로운 행실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속에 인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가 하는 일들도 열매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그 중심에는 나의 실적과 명예와 그리고 나의 이익과 이름이 놓여 있는, 나의 방법과 나의 주관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역을 앞세워 그토록 앞다투어 경쟁하듯이 하고, 시기하고, 싸우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어려운 교회나 어려운 지역사회를 돕지 않았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을 잠깐 설명 드리면 빌라델비아 동남 60km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기름진 리쿠스 계곡의 비옥한 땅이 있어서 목축과 농업이 발달하였고, 따라서 흑양모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로 기원후 61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을 때 로마 정부의 원조 없이 자력으로 복구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교회도 부자입니다. 교회가 부자라면 지진이 일어나고 했을 때 봉사하고 돕는 일을 앞장서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지적했습니다. 벌거벗었다고 말입니다. 수치를 가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의를 행하면서 산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의를 행하는 사람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7:1-10 “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 내용의 말씀을 보면 백성들이 예배드리러 부지런히 성전을 찾아 예배당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다. 우리도 예배당 문을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러 드나드는 성도들을 향하여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그런데 백성들은 무익한 거짓을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거짓말을 하는가 하면,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행동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하지 않으면서 예배당에 들어와서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구원을 얻었도다”고 하는 이런 이중 플레이를 하는 것을 가증스런 모습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5:1절에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말로하는 신앙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벌거벗은 수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셋째,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부유한 신앙으로 만들어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기 교회는 부요하다고 자랑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적으로 대단히 가난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가난한 것을 모릅니다. 알면 고치지요, 그런데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아울러 교회도 부자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초대형교회50개 중에 23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가 아닌가요? 우리교회는 어떻습니까? 현대식으로 아름답게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다른 분들이 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입당할 때부터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당이 아름다운 것 이상으로 우리의 믿음생활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름다워지지 않는다면 이 예배당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하면서 자만에 빠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적으로는 더 가난한 교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 보다 더 헌신해야 합니다. 더 충성해야 합니다. 더 잘 믿어야 합니다. 육신의 삶이 부요해지면 영적으로 가난할 위험이 높습니다. 반대로 육신의 삶이 어렵고 힘들면 영적으로는 부요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걱정한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제일 걱정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신명기6:10-11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주리라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때 너희들이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되고,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되고,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되었을 때,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시어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과 육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날 우리가 영적으로 가련하고 가난한 것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면, 애통함이 없어졌습니다. 얼마나 가난한가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갈망함이 없습니다. 가난하면 갈망해야 하는데 육적인 삶이 풍요로우니 육신의 삶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니 답답한 일도 없고 울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적인 가난함입니다. 당신은 영적으로 가난하지 않습니까? 곤고하지 않습니까? 작은 시험에도 넘어지고, 작은 장애물에도 주저앉는 신앙은 아닙니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 너희는 가난한 것과 가련한 것과 곤고한 것을 오히려 육신의 삶에서 겪는 시련을 통해서 연단을 통한 금과 같은 믿음으로 부요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4. 영적인 분별력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아니 우리도 영분별력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17절에 보면 눈이 멀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눈이 멀었다는 것은 영분별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분별력이 약하거나 안되면 어떤 현상이 대두되는지 아십니까? 무엇이 하나님께 고귀한 것이며, 무엇이 사악한 것이지를 모릅니다. 무엇이 거룩한 것이고, 무엇이 속된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모릅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방법이며, 무엇이 세상적인 방법인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세상적인 것인지를 모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우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촉감이 발달하여 공기의 스쳐 지나감을 통해서도 골목길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만,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가난하고 헐벗었던 이유는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같이 눈이 멀었던 원인은 그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9:41절에서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면 눈을 뜰 수 있는 희망이 있고 기회가 있지만 눈이 안 멀었다고 하니 눈먼 것이 그냥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문제가 없다고 하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목사를 하면서 제일 우려되는 일이 바로 영적분별력입니다. 목사가 앞장서서 가면서 성도들 보다는 영적분별력이 앞서야 하는데 목사가 세상에 치우쳐 영적인 안목도 없이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겠습니까? 모든 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과 기도로 우리를 거룩케 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그것은 자연스레 분별이 되어질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력과 영을 분별하는 명철함을 지니며 더불어 뜨거운 가슴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고 성결함을 늘 유지하는 그리스도인이 진정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의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였습니다. 열정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면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소속에서 벗어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토하여 내친다고 했습니다. 열심을 내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다시금 문을 열어라고 했습니다. 인본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오직 주님 중심으로 믿음중심으로 말씀중심으로 살아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듣는 지혜로운 대구칠곡교회와 영적분별력을 가진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