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신앙의 라오디게아 교회


미지근한 신앙의 라오디게아 교회
계3:14-22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 72km 지점에 있으며, 골로새나 히에라볼리와 함께 비옥한 루커스계곡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B.C. 250년경 안티오코스가 건설하였고, 로마로 통하는 대로가 중앙으로 나 있어 군사, 무역, 통신의 요충지였습니다. 부요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 우월의식은 있었으나 하나님께 내놓을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곳은 의학교가 있어 눈과 귀에 좋은 고약으로 유명하였지만, 이에 편승한 치료의 신, 맨카루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풍요로운 도시로 시저가 거액의 신용장을 현금화하는 은행이 있었고, A.D.17년 지진으로 인한 파괴도 자체적으로 복구한 도시입니다. 값비싼 의류를 자체로 생산하였고 검은색 양모의 집산지였습니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여 미지근한 물을 성 외곽에서 공급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그 기원이 불분명하나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를 할 때쯤으로 추측합니다. 에바브라에 의해 시작되어 바울의 관심 속에 있긴 했지만[골4:12-16]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교회는 칭찬이라곤 한 마디도 듣지 못한 교회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14절]입니다. “아멘이시요”는 ‘참되다, 진실하다’는 뜻입니다.[고후1:20] 처음과 나중이 되신 분으로 심판의 주가 되실 분입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는 하나님의 뜻, 즉 구약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의미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온전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일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이”는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주님입니다.[요1:3, 골1:15]

책망

[15-17절]이 책망의 내용입니다.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것과 가난하면서 부자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책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앙인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신앙은 없이 신앙적인 습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얼마나 우습습니까. 이런 사람은 신앙적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지도 구하지도 않기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1) 미지근한 신앙

신앙은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신앙적인 열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관심은 미지근한 상태의 신앙을 만들어내며, 세상과의 타협과 무사안일주의의 신앙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미지근한 것은 구역질나는 상태입니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16절]는 표현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면 부패합니다. 신앙도 열심이 없으면 변질되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EX) 차가운 냉면이든지 뜨거운 육수든지.

그래서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절]고 하십니다. 물론 차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말 안 듣는 자녀에게 “나가 죽어버려!”하고 버럭 화를 냈다고 정말 나가서 죽으라는 것이겠습니까? 그만큼 답답하니 하는 말이지요. ‘차가운 상태’는 얼음이 얼 정도의 냉기를 말하며, 불신의 세계로 가는 것을, ‘더운 상태’는 물이 끓을 정도의 온기로 열심 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신앙의 열심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서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처럼 성령충만함으로 가능합니다. 뜨거운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교만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절]고 자만합니다. 그들의 생활에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있었고 교회는 재정적으로 부요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가 영적인 풍요를 이끌지는 못합니다. [눅19장]에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사가 잘되어 창고를 더 짓고 양식을 쌓아놓고는 말합니다.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물질적인 것으로 영적인 만족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적교만보다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자신이 볼 대는 부자인데 하나님 보실 때는 가난합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절]고 책망하십니다. 최종평가자는 하나님입니다.

해결책

[18-19절]이 해결책입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금은 “불같은 시련으로 연단된 믿음”[벧전1:7]을 말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자랑하는 그런 금이 아니라 영적인 금을 지니지 않고는 결코 환란의 때를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소유주는 주님입니다. 누구에게서 삽니까? 바로 주님에게서(내게서)입니다. 믿음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의류가 발달한 지역인 라오디게아의 그런 검은 양모로 만든 옷이 아니라 주님의 속죄의 옷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어린양의 피로서 씻은 흰옷입니다.[계7:14] 영적 수치를 가리는 것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는 대속의 은총입니다.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의학대학까지 있어 모든 의약품이 풍부한 라오디게아지만 겉으로 보이는 안약이 아니라 영적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십니다. 사려면 무엇인가 지불해야 합니다. 물질을 지불하고 영적인 것을 사야 함을 말합니다. 영적 빈곤과 수치를 볼 줄 모르는 눈을 치료하라는 말입니다. 돈으로 가려진 눈은 성령의 능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발람의 눈을 밝히시듯, 사울의 눈을 뜨게 하시듯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눈떠야 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징계하시는데 그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라오디게아교회는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한 채 혹독한 책망을 받지만, 그것도 주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권면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 사치, 나태, 진리를 향한 무감각에서 빨리 나와 돌이켜 하나님께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초청과 축복

위대한 초청이 칭찬 한 마디 듣지 못한 라오디게아교회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들은 문밖에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주님을 문밖에 세워놓았습니다. 그래서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자한 언어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서 있다”는 것은 벌써 오래전부터 죽, 쉼 없이, 계속하여 서계신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서계십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다만 문을 열고 안 열고는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눅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더불어 먹는다” 함은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주님과의 성만찬은 마음을 연 자의 것입니다. 감미로운 풍요와 사랑, 그리스도와의 친교 비로 이것이 천국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를 허락하십니다.[21절] 보좌에 앉게 한다는 말은 주님의 나라의 통치권을 예수님과 함께 누린다는 말입니다. 최고의 명예와 권위입니다.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책망만 듣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의 능력과 권세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내용은 바로 오늘날 우리교회에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문밖으로 쫓겨나셨지만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문밖에 서서 두드리십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영적 풍요를 위하여 물질적인 것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교만을 회개하고 주님의 우편에 앉는 권세를 다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