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문 교회


열린 문 교회
계3:7-13


7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보면 이런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을 받았고 창조주로부터 -이것은 하나님을 말합니다. - 빼앗길 수 없는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받았으니 그것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다.’ 여러분의 귀에 익숙한 구절일 것입니다

. 여기에 기초해서 미합중국이라는 나라가 탄생을 하고 민주주의가 그 위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1774년 당시, 그들이 이 독립 선언문을 작성했을 때, 그들이 말한 모든 사람에는 여성과 흑인 노예들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을 받았다 했을 때 남자 백인들만을 포함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여자들에게는 투표할 권리도 없었고 참정권도 없었고 흑인 노예들은 거의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조차도 노예들을 소유했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작성한 이 선언문은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아직 여자들이 사람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아직 노예제도가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선언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사람보다 앞서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다 소화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소화하지 못한다 해서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는 사람보다 위대하기 때문에 사람이 비록 진리를 믿고 진리를 고백할지라도 사람은 자기가 믿는 진리를 다 소화하지도 못하고 다 깨닫지도 못하고 다 실천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성경에 있는 말씀을 다 실천하지 못한다고 해서 성경이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미천한 우리 인간이 그것을 다 깨닫지도 못하고 다 실천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대성 원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중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건 대단한 발견이 아닐 것입니다. 상대성 원리가 상대성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기에 무언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진리, 이것을 우리가 믿지만 다 한꺼번에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제의 가르침 위에 오늘의 가르침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전에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학자가 있었고, 성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있었고, 마틴 루터, 존 칼빈 같은 사람, 또 요한 웨슬리, D.L 무디, 빌리 선데이, 이런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위에 오늘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세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점진적으로 효과를 발휘해서 미국의 독립 선언문은 결국에는 여성들에게도 혜택을 주게 되고, 흑인들에게도 혜택을 주게 되고, 결국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그 놀라운 원리가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통적인 원리를 봅니다.



첫째는 사람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다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사회 제도가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실천 가능하게 할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회 제도라는 것은 사람의 생각보다도 항상 뒤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혼동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선진국은 이미 발전할 데로 발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회에는 혼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우리 사회에 서구 문명이 들어오고 민주주의가 소개되고 우리가 해방을 겪고, 이런 모든 일들이 백년 안에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남의 나라에서는 500년, 1000년 걸렸던 일들이 우리나라에는 100년 이내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변화가 빠르고 얼마나 많은 것을 적응해야 되겠습니까? 한국 민족이니까 이것이 가능하지요. 우리니까 이것이 가능하지 어떻게 1945년에 비로소 해방을 얻은 민족이 전쟁을 경험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재를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여러분 이것만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비관적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그 변화를 끌려가느냐, 아니면 주도하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에 부득이 끌려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도 변화하고 그리고 사회의 변화, 교회의 변화, 가정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까? 바로 믿음, 믿음은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믿음은 비전을 낳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이 올 때 비전이 옵니다. 믿음이 올 때에 꿈을 꿉니다. 믿음이 올 때에 방향을 알게 됩니다. 목적을 얻게 됩니다. 요즘에 크리스천 베스트셀러 중에 <목적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 이것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적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삽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목적에 이끌리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목적에 이끌리지 못하면 전통에 이끌리든지 목사의 카리스마에 이끌리든지 여론에 이끌리든지 이렇게 돼버리고 마는데, 그것은 벌써 성령이 주시는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모름지기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성령이 끊임없이 그들을 인도하시는 대로 목적에 이끌리는 한은 그 교회에 입사귀가 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성도들에게 늘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아니면 무엇을 하지 않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무엇을 할 때에도 이유가 있어야 되고 안 할 때에도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결혼을 합니까?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안합니까?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투자를 하든, 투자를 안 하든, 이사를 하든, 안 하든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긴 하는데 왜 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왜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면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 마음속에 분명한 목적이 생길 때까지 기도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목적이 생긴다는 말은 믿음이 생겼다는 말 이예요. 그때에 하세요. 그러면 반드시 그 일이 형통할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프로그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없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 것도 목적에 의해서 있어야 되고, 없는 것도 목적에 의해서 얻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면 하고 안 시키시면 안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여쭤보지 않고 남의 교회가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하자, 저 교회는 저런 방법으로 교회가 성장한데더라. 우리도 해보자.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저 교회는 저 교회고, 저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대로, 나름대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 있고, 은사가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다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반복하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할 때에도 이유가 있어야 되고 안 할 때에도 이유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제도가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변화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이천년 전에 벌써 갈라디아서 3장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 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 한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고 선포했습니다. 이것은 시대에 엄청나게 앞서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약자에 대한 배려,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한 원리가 다 성경에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우리가 소유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왜냐하면 사회제도가 그것을 수용할 만큼 다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 ‘사도바울이 종이나 자유인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라고 말할 때에도 종, 노예제도가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다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내면의 편견과 무지와 불신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노예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까? 노예해방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 자신은 흑인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같은 사람도 그 마음속을 들여다봤을 때에는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지워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이라도 편견이 남아있습니다.

저희 교단에서 여성 목사 안수를 통과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희 교단에는 이제 여자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내가 말세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언한다는 말은 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라고 해석하면 ‘말세에 하나님이 여자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들로 설교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한번 여쭤 볼게요. 여러분의 자녀가 결혼식을 올릴 때 여러분 여자에게 주례를 부탁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만약에 부모님이 상을 당해서 장례를 할 때에 여자에게 장례식 인도를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실 분도 계시고 아직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실천 하는 데에 있어서 아직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심지어 결혼 주례를 부탁할 때 딸만 있는 목사한테 부탁 안한데요. 목사에게 아들이 있어야 부탁을 한데요. 이것이 현주소입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앙에 적용을 시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믿지만,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깨닫지도 못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어 주신다고 믿지만 결혼식 올리기 전에 궁합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신다고 믿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사주팔자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사람들이 변화하기가 힘든 거예요. 진리라고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삶 속에 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첫째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주일날, 국가고시를 보지 말고 토요일로 옮겨 달라’ 그건 여러분 당연한 요구 아닙니까? 왜 국가고시를 주일날 오전에 봐서 예수 믿는 사람들 주일 성수 못하게 만듭니까? 토요일 날도 쉬는 날이라고 하는데, 토요일 날로 옮기자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교회 다닐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 이런 것은 교회가 목소리를 내야 되는 부분입니다. 이건 하나의 예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어려운 일은 이제 ‘교육 개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운동도 하고, 뛰어 놀고, 창의력도 발전시키고 싶지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어렸을 때부터 과외 해야죠, 학원 다녀야죠, 이것도 해야죠, 저것도 해야죠, 해야 되는 게 너무 많아서 그 귀한시절을 공부 하느라고 다 보내는 것,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그렇게 돼있기 때문에 부득이 적어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겁니다. 제도를 좀 바꿔봅시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기만 해서는 안 되고 내 자신이 변해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한번 따라해 보세요. ‘분별하도록 하라’ ‘분별’ 이라는 것은 마치 색맹 검사할 때 보면 여러 가지 색깔이 있고 그 가운데 숫자가 쓰여 져 있지 않습니까? ‘9’라는 숫자가 있는데 그 숫자를 읽기위해서는 색깔을 분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색맹은 색깔을 분별할 줄 몰라요. 그래서 분명히 숫자가 여기 쓰여 있는데, 숫자가 안 보입니다.



분별이라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앞에 확실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고 분별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나 있을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분별해야 됩니다. 섞여있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이 세상에는 섞여 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이 세상에는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분별해야 됩니다.

교회 안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보면 예언을 할 때 반드시 분별하라 그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위 예언이라고 하는 말이 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중에는 잘못된 말씀도 있고 이단도 있고 사이비도 있고 그릇된 거짓 예언도 있기 때문에 예언이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해야 됩니다. 그런데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에 빌라델비아 교회 대한 말씀, 사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논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한 가지만 주목하면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여러분 은혜는 거저 받는 것입니다마는 우리가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 중에도 ‘너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한번 따라해 보세요.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가까이 하세요. 그러면 그분도 여러분을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달라, 도와 달라, 성령을 달라, 응답해 달라, 하나님에게 달라는 것은 많은데 우리가 그분에게 드리는 것은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까워 오시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그 분이 오시기를 요구하지 말고 여러분이 가세요. 그러면 될 것 아닙니까?

어느 노부부가 차를 타고 가는데, 부인이 남편은 운전을 하고 부인이 옆자리에 앉아있어서 부인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여보, 우리가 처음 만나서 사귈 때는 이러게 멀리 앉지 않았는데, 그때는 내가 당신 옆에 우리가 가까이 껴안고 차를 타고 갔는데 이제는 어찌된 일이요?” 그랬더니 남편이 “글쎄, 그때나 지금이나 내 자리는 변함이 없다.” 젊었을 때에도 남편은 운전자로 거기에 앉아있었죠. 그러니까 누가 변한 겁니까? 남편이 더 문 쪽으로 가까이 간 게 아니고 남편은 그 자리에 앉아서 늘 운전을 하고, 젊었을 때는 아내가 그 옆에 가까이 있었다가 점점 멀어진 것이죠. 그러니까 왜 우리가 이렇게 멀리 앉아 있느냐 불평하지 말고 아내가 가까이 가면 될 거 아닙니까? 이건 남자, 여자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예요. 주님이 멀어지신 게 아니 예요. 우리가 멀어진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진리라는 것은 그 진리를 우리가 선포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내해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도 진리를 다 소화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고 우리 자신도 진리를 실천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진리가 진리가 아닌 것이 아니 예요. 그러므로 진리를 믿는 사람은 인내해야 됩니다. 1774년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아직 그 진리를 실천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지만 그것을 진리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천국은 씨 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그 천국의 진리를 뿌린 다음에 그것이 싹이 나고 열매가 나기 까지는 한 철 기다려야 됩니다. 봄에 뿌리면 여름을 거쳐야 가을이 오게 돼있습니다. 우리가 견뎌야 되는 시즌이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인내가 있어야 믿음의 효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별로 역사를 하시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까? 교회 성장 연구소라는 단체에서 연구를 해본 바에 의하면 교회가 기도를 시작하고 6개월이 지나고 응답이 오기 시작 한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응답이라는 것도 당장 오는 게 아니 예요.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면 즉시 들으시지만 그 응답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로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차원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먼저 영적인 차원에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가시적인 차원으로 나타나기를 시작을 하는데,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열매’라고 부릅니다. ‘열매’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맺기까지는 열매가 보이지 않는 동안에 인내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주님이 칭찬하시면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주리라’ 무슨 말씀을 지켰어요?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요 오늘날 주님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인내를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