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지근한 교회 계3:14-22 국내에 어느 유수한 교회에서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여러분이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조사의 내용입니다. 여러 종류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믿음이 적어서 못 옵니다.’ 라는 대답이 8%, ‘퇴근을 늦게 하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라는 대답이 10%, ‘멀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대답이 18%, ‘아침잠이 많아서 그렇습니다.’가 25%, 그리고 ‘의지가 부족해서’ 라는 대답이 28%로 제일 많았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주목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이것이 저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대답한 사람이 업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더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신 ‘의지가 부족해서 하지 못합니다.’ 라는 대답이 제일 많았습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의지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우리 가운데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무줄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무줄은 잡아당기고 있는 동안에는 늘어나지만 손을 놓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은 외부적인 압력과 강요를 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 달라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외부적인 간섭이 떠나가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미군이 왜 이라크에서 철수를 하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전쟁은 이미 끝났는데, 그러나 힘들게 사담 후세인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에 미군이 철수를 해버리면 다시 옛날처럼 독재정권, 반미 정권이 들어올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군해버리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 갈까봐 적어도 자치적으로 정부를 구성하고 나라가 어느 정도 세워진 다음에 손을 떼려고 하는데, 여러분 그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도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남의 나라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이기는 것은 쉽지만, 나라를 바꾸는 것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너희도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부탁을 했는데, 세 번 다 제자들이 잠이 들어있었다 그랬어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 하셨는 줄 아세요? ‘그만 쉬고 자라’ 그랬어요. 그 말은 예수님이 졌다는 얘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길 수 없었어요. 너희가 깨어서 기도하라는 잔소리로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스토리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신 다음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안 계신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자기가 알아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죽기까지 충성했더라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느냐? 이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의지와 싸워서 사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내부적으로 변화시켜서 주님을 순종하고 섬기는 것이 나의 뜻이 되게 하시고 나의 즐거움이 되게 하시고 자원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시고 부득이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무엇을 안 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흔히들 외부 사람들이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이냐 했을 때, 안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뭐도 안하고, 뭐도 안하고.. 그러나 긍정적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몰라요. 여러분 제가 누차 말씀드리는 것처럼 욕망의 부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없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분들은 욕망이 없습니다. 식욕도 없고, 명예욕도 없고, 성욕도 없고 아무런 욕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이라는 것은 부정적으로 안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무엇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 몸을 바치고 여기에서 거룩함이라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저희 아이에게 야채를 먹이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야채를 먹일 때는 흥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먹으면 뭘 해주겠다.’ 이러면 큰 인심을 쓰는 듯이 겨우 야채를 먹어줍니다. 본인을 위해서 먹이는 건데, 마치 ‘내가 이 야채를 엄마를 위해서 먹어요.’ 하면서 억지로 먹습니다. 그나마 그걸 먹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여러분 그러나 이제 철이 들면 입맛이 달라져서 옛날에는 시금치라든가 야채라든가 샐러드 같은 것을 억지로 먹었는데, 사람이 성장하면 그게 맛있어집니다. 입맛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도 입맛이 변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그저 명예, 세상적인 부귀, 이런 것만이 좋은 로 알았는데, 사람이 거듭난 다음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 목적, 사명, 즐거움,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송가 493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이 2절을 보면 ‘주 안에 감추인 새 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여러분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변화입니다. 이전에 좋던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이전에 좋던 것을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고 나니까 예전에 좋던 것이 이전 럼 좋지가 않아요. 이전처럼 즐겁지가 않아요. 기쁘지가 않아요. 오히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다른 더 즐겁고 더 보람 있는 일들을 발견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이건 누가 강요한다고 됩니까? 사랑을 어떻게 강요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우러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소원을 두고’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등장을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고 하나는 우리의 소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소원하게 하신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하면 야채 먹는 것을 생각하잖아요. 좋은 줄은 알겠는데 내키지를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더라도 싫어해요.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그 말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내가 원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소원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미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느냐? 우리가 기도하다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야망, 거룩한 비전, 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우러나오면 그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목사가 돼야 되겠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시어머니를 잘 섬겨야 되겠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형제와 화목해야 되겠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동차끼리 서로 접촉 사고가 났을 때, 혈기 부리지 않고 ‘내가 설사 조금 손해 보더라도 평강으로 해결해야 되겠다.’ 우리의 소원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 이예요.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늘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고 힘들고 자기를 부인하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그래서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는 음식처럼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래 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즐거움으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기쁜 사람, 이웃을 섬기는 일이 기쁜 사람, 교회 가는 일이 기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새벽기도회가 기쁘지 않으면 하지 마세요. 그러면 됩니다. 무슨 사람들 죄의식 까지 줘가면서 ‘의지가 부족해서 그래.’ 백날 그래 가지고 기도의 사람을 만들 수 있나 보세요. 그렇게 가지고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러나오는 일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러나오는 소원을 허락을 하십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예전에 나눈 예화입니다만 주일날 아침에 어머니가 아들 방에 들어가서 문을 똑똑 두드렸어요. “야 일어나라 교회 갈 시간이다.”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야 늦겠다.” 아무런 응답이 없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문을 탁 열고 들어가서 이불을 제치고 “야! 교회 가야지!” 그랬더니 아들이 돌아누우면서 “엄마, 내가 교회 가기 싫은 이유를 두 가지만 말씀 드릴게요. 첫째는 교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도 교인들이 안 좋아요.”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그럼에도 너가 교회를 가야하는 이유 두 가지를 내가 말하겠는데, 첫째는 너가 올해 50살이고 둘째는 너가 그 교회 담임 목사다.!” 그런 이유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게 아니고 정석은 기쁨으로,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한번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더 이상 갈등도 없고 노력도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쓴 사도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3가지를 염려했습니다. 첫째는 배교를 염려했습니다. ‘배교’라는 말은 신앙적인 배신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냥 영적으로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한 번 믿었다가 예수를 의도적으로 떠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예수 안 믿겠다.”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등을 돌리는 것을 배교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니까 신문에 점쟁이들 광고가 나가지 않습니까? 그 중에 ‘한때 목사 되신 설교하던 내가 무당이 된 사연’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이가 없어서.... 그 사연을 듣고 싶어요. 여러분 그런 것이 배교입니다. 예수를 믿던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엔도 슈사코가 쓴 ‘침묵’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당할 때 앞장서서 박해하던 사람이 옛날에 가톨릭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배교를 하고 이제는 교회를 미워하게 됐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옥에 가느냐? 한번 구원을 얻었더라도 잃어버릴 수 있느냐? 그걸 경고한 책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런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도들이 염려한 것은 이단입니다. 이단은 배교와는 다릅니다. 믿기는 믿는데 교리가 잘못된 것을 말합니다. 교리가 잘못됐어요. 통일교라든가 안식일 이라든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든가 우리나라에도 계룡산에 가면 이단이 많습니다. 옛날에도 이단이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이단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를 보면 ‘이미 세상에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왔다’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가 아니고 여러 명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 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그랬습니다. 이단이란 말은 끝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몰몬교의 교리를 보면 처음은 같은 것 같아요. 그들도 하나님 믿지요, 예수님 믿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믿지요. 그런데 그 끝에 가보면 아주 엉뚱한 게 나와요. 하나님에게 부인이 있다. 우리가 죽으면 다 신이 된다. 이런걸 보고 이게 이단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도들이 염려한 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미지근함입니다. 커피는 뜨거워야 좋지요. 콜라는 차가워야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콜라가 미지근해 보세요. 커피가 미지근해 보세요. 아무에게도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그랬습니다. 차라리 차가운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뜨거워 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습니다. 세리들, 창기들,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 같은 사람, 다 냉냉하던 사람들인데 예수를 믿으니까 뜨거워 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미지근한 사람은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고 섬기는 것도 아니고 안 섬기는 것도 아니고 이게 바로 미지근한 것입니다. 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교회가 오늘 공부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교회 역사의 일곱 단계라고 봤을 때, 라오디게아 교회가 맨 마지막 교회라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끝 날의 교회는 어떤 교회냐? 미지근한 교회가 된다, 이런 경고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미지근해 지는 이유가 뭡니까? 첫째는 그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미지근한 게 편합니다. 부모가 아들이 열심히 믿으면 염려합니다. “너 목사 되려고 그러지? 그러다가 선교사 될라” 본인 자신이 뜨거워지는 것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이러다가 광신도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적당히 믿어야 대인관계가 쉽죠. 뜨겁게 믿으면 튑니다. 불편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의도적으로 미지근함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소설을 보면 화로에 불이 타고 있습니다. 이 불은 우리의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 불에다가 물을 뿌립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꺼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꺼지지를 않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화로의 뒤로 돌아가 봤더니 성령이 거기서 몰래 기름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물을 끼얹고 성령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나마 우리의 믿음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신앙이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성령의 기음 부음을 사모해야 됩니다. ‘내 안에 기름을 채우소서. 가득히 채워 주소서 날이 새기까지 차도록’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해야 됩니다. 여러분 국이 불을 끄는 즉시 미지근해지기 시작합니다. 불을 끄면 안 됩니다. 우리의 성령의 불이 타올라야죠. 그걸 끄면 그때부터 신앙은 저절로 미지근해집니다. 제가 성령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불은 성령 이예요. 우리를 뜨겁게 하는 분은 성령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뜨거워 질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요, 세계적인 천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어렸을 때에는 평범했습니다. 두각을 나타내는 면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도 그렇고 본인도 아마 자기가 세계적인 천재라는 사실을 몰랐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천재성을 알게 됐느냐면 수학을 공부하면서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본인이 발견을 했어요. 그래서 물리학을 공부해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자기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내가 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재능과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시는 사명을 발견해야 그때부터 아 내가 열심을 내야 되겠구나. 공부해야 되겠구나. 노력해야 되겠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도 천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천재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뜨거워질 기회를 발견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이 강요하지 않아도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또 죄를 미워하고 주님을 섬기기를 즐거워하고 그것을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어느 나라의 임금이 이웃나라 임금에게 사냥개를 한 마리 선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어서 “제가 드린 사냥개가 말을 잘 듣습니까?” 물어보니까 말은 안 듣는다고 그래요. 여우 사냥을 데리고 나가면 안 물어 온데요. 그래서 그걸 기증한 임금님이 “아이고 제가 말씀을 못 드렸군요. 그 개는 여우 사냥을 위해서 훈련 받은 개가 아니고 사자 사냥을 위해서 훈련 받은 개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을 잘못 잡은 거예요.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아요. 여우를 쫓아다니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 예요. 잘못된 목적을 쫓을 때에는 별로 열심을 낼 이유도 없고, 별로 보람도 없어요.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뜨거워야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따라해 보세요. ‘누구든지’ 주님은 사람은 외모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