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사랑)

에베소 교회(사랑)
계2:1-7



계시록의 일곱 편지들 중 첫 번째 것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졌는데, 에베소는 그 자체의 명성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로마 주의 수도였고, 로마에서 동양으로 가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두번째 선교 여행에서 에베소를 방문하려던 시도가 좌절당했으나 그곳이 전략적 중요성이 너무나 중요해서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거기로 직행하여 그 도시에서 2년 반을 보냈습니다. 이후 에베소를 떠난 후에도 디모데를 뒤에 남겨두어 에베소교회를 사역하고 또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중에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냈으며, 후에 디모데에게 2번이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세 가지 미덕이 있었습니다.

(i)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시며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수고란 부지런한 노동을 의미하며 기진맥진하기까지 하는 노동 혹은 격렬하고 힘을 소모시키는 노동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고 힘든 일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활동적인 교회였습니다. 아마도 \\\"상조회\\\"나 \\\"봉사 활동연맹\\\"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구성원들은 외로운 자를 환대하며 아픈 자를 간호하며 젊은이를 찾아보았습니다. 분명 몇몇 사람들은 예배당을 만들고 관리하며, 바느질과 뜨개질하는데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글도 쓰고, 요리도 하며 청소도 하고 조직을 짜기도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정말로 근면한 꿀벌집단이었습니다. 모든 지체가 무엇인가 바쁘게 수고하였습니다. 그들은 부지런했으며 양심적이었습니다.

(ii) 그들의 인내입니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지인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에베소는 많은 종교들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 곳은 황제 숭배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곳 주민 몇몇은 동양에서 온 마술을 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아시아의 모녀신인 다이아나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데, 바울의 설교로 인해 대소동이 났었습니다. 바울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으로 개종하니, 다이아나 신전에 바쳐지는 은으로 만든 신의 모형의 판매가 감소하자 그 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들의 기득권의 옹호를 위해 바울을 심하게 대적하여 소요를 일으켰고 결국 그 소요 이후.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보낼 당시 바울은 이미 에베소를 떠났고 또 죽은지도 꽤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민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것과 공개적으로 푸대접을 받으며 사적으로 헐뜯음을 당해도 교히를 굳건히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는 중 어떤 이들은 고객을 잃고, 사업이 어려웠다. 수많은 장사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건을 팔려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시장보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황제나 혹은 다이아나를 숭배를 하지않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추방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신체적인 폭행도 견뎌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인들은 주님을 배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2절에서 내가...네 인내를 알고 라고 한 것입니다.

(iii) 주님이 그들을 칭찬했던 것은 소위 정통성입니다. 6절에 보면, 에베소에는 니골라당이라 불리는 자칭 사도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정확히 그들이 누구였으며 무엇을 가르쳤는지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들의 가르침 때문에 예베소 성도들이 중대한 오류에 빠져 있었는데, 특히 부도덕한 것을 묵과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이라는 이름이 버가모, 두아디라와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도 암시적으로 언급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시아에 있는 전 교회에 사악한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그러한 이단 교사들의 침투가 있을 것에 대해 경고했었습니다. 그의 세 번째 선교 여행이 끝날 무렵 밀레도 섬에서 장로들을 불러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굶주린 짐승들이 양떼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 에베소 성도들은 니골라당의 교훈이 사단에게서 온 것인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알아보려고 \\\"영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함께 모여 성경도 찾아보고 기도하며 그들이 받았던 초대 사도들의 교훈과도 비교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인들은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처럼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였습니다. 에베소인들은 속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을 분별하는 귀한 은사를 소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통성은 손상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한다고 해서 그러한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 관용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류나 악을 포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에베소성도들이 니골라당 사람들을 미워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3절) 시험과 환난을 참을 수 있었으나, 이 악한 사람들의 무리는(2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찬란한 교회입니까!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교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회원들은 봉사로 바빴고, 고난 중에 참았으며 신앙의 정통성도 가졌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그들에게 요구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가지가 부족했습니다. 4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한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여인을 애인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와 약혼했으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녀는 다른 애인들인 가나안 땅의 신들과 놀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창녀 짓을 했습니다. 그녀는 부정한 여인이 되어 참 남편을 버렸습니다.

신약에서 새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옛이스라엘이 여호와께 결혼하였던 것같이, 그리스도께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에베소인들에게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인들은 남편에 대한 처음의 황홀하던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차가와 졌습니다. 그래서 신랑은 그의 신부가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종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변덕스러운 음부 이스라엘을 품에 안으려 했던 것처럼 지금 주님께서는 교회를 향하여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남편에게 대한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 교회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는 것이 수고와 인내와 정통성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진실하고 산 교회의 첫 번째 증표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결코 산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많은 일을 합니다. 각기 맡은 사역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교회의 모든 일은 생명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을 언급한지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세대의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경고에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비틀거리며 약해지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정력으로 수고한 것이지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끈기로 인내한 것이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그들의 정통성으로써 시험하였지만 사랑이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 없는 수고는 정말 고단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단지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위하여 7년 동안 일할 수 있었는데, 그가 보낸 7년은 창세기 29:20에 의하면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수일 같이 그에게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모든 수고는 사랑의 노동이 아니면 고역이 됩니다. 고난을 참는 것도, 사랑으로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지지 않는다면 힘들고 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금욕적인 무관심으로써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과, 대적 앞에서도 사랑 때문에 미소짓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진리를 수호하려는 정통성도 사랑이 그것에 넣어주는 온기와 생명과 아름다움이 없이는 냉냉하고 죽었고 냉엄한 것입니다. 에베소인들은 악한 행위와 니골라당의 말들을 미워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신학적 정확성은 결코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류와 악을 미워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그렇게도 많이 말하고 읽으면서도 왜 모른척하십니까? 도대체 무슨 법을 지키고 싶습니까? 사랑은 그 자체가 \\\"왕의 법 (the royal law)\\\"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은 지식보다 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지식은 교만케 하는 반면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단지 영리한 사람에게 바람을 집어 넣어 부풀게 할 수 있지만, 사랑은 굳건한 인격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물에 관한 것이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인격을 포함하여 인격체 관한 것입니다. 또 교리에 관한 지식은 단면적이며 정적인 일이지만 사랑은 상호적이며 성장하는 것입니다(8:1-3).

피조물이 그 창조주를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 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한 때 복음으로 왕성하던 에배소 교회가 수세기가 지나면서 에베소 교회의 예배는 거의 죽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찬송은 단조롭고 영감을 불리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되었고, 기도는 이교도의 주문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영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물에 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만 한다면, 그의 발 앞에 앉아 그의 얼굴을 구하며 매일 그의 말씀 듣는 시간을 보내기를 열정적으로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것은 에베소 교회가 부족했던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sentiment)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 단순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충성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의지의 통제를 받는 것이요, 그 사랑을 순종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증표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드러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21에서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하면서 어떻게 감히 그를 사랑한다고 주장하겠습니까? 진실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기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며, 그의 기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그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그 사랑을 사유화하고 내면화하는 그런 경건주의자적 경험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20, 21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라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형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실재적인 감정이나 애정이 아니라 행동에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교도의 사랑의 개념은 얻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주고 싶어하는 욕망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 없는 사막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를, 아니 어떤 교회도 그냥 내버려두시고는 만족치 아니하십니다. 그분은 그 교회가 다시 사랑의 오아시스로 오도록 부르시고 계십니다.그해서 2장 5절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세 마디 간결한 명령을 발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임하여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행위를 가지라고 명하십니다. 따라하십시다.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