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상은 부요한 교회 계2:8-11 성지 순례를 갔다온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거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일곱교회는 모두 터키지역에 있었던 교회인데, 이 지역은 우리가 알다시피 불행하게도 지금은 모두 강력한 회교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 영향으로 에베소에도, 버가모에도 두아디라에도, 빌라델비아에도 교회는 모두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 강력한 회교의 박해밑에서도 교회를 지키며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서머나입니다. 그럼 서머나 교회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믿음의 뿌리를 이어올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비결을 함께 나누고 우리도 이렇게 승리하기를 소원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위치한 터키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로, 현재는 이즈밀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곳은 무역의 중심지였기에 부유하고 번창한 도시였으며 로마의 정치적인 정책과 황제숭배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기에 로마 중앙정부로부터 큰 배려를 받았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살기에는 매우 힘들고 불편한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이 도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이 그 도시의 모든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사단의 무리라 하실 정도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 도시에서 경제권을 박탈당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서머나교회는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했겠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궁핍과 환란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서머나교회가 환란과 궁핍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문제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환난이었고 또 하나는 궁핍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환난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공동체이므로 이 진리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때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더군다나 반대하는 세력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때에 교회는 큰 환난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양무리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때문입니다. 교회가 믿는 진리를 누군가가 반대를 하면 교회는 그대로 당하든지 아니면 그 반대를 피해 숨어서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초대교회는 어느교회를 막론하고 로마의 중앙정부로 부터, 혹은 유대의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심한 신앙의 핍박을 받았습니다만, 특별히 서머나 교회가 이 편지를 받은 시점은 그 환란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기독교 핍박에 있어서 네로와 쌍벽을 이루던 바로 도미티안 황제였습니다. 그는 네로가 세운 기독교 말살정책을 확대해서 조직적으로 진행시켰을 뿐만아니라 한술 더떠서 자기를 신격화시켜 로마 식민지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자기를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투옥당하거나 화형당하거나 짐승에게 던져 지거나 톱으로 켜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극한 환란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또 다른 어려움은 궁핍이었습니다. 로마정부와 유대인들의 신앙탄압은 그들의 경제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앞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도시의 경제권을 유대인들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보복을 가했고, 또 친로마적인 정치와 로마황제숭배의 영향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 때문에 사회적 진출이 막혔고 매매가 금지되는 때였습니다. 심지어는 관리들의 묵인하에 반대자들이 기독교인의 재산을 공공연하게 약탈해가기도 했으니 서머나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어렵고 궁핍한 생활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의 상황속에 있던 서머나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참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었고 궁핍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부요하고 풍성한 자들이 바로 이 서머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외부적으로 볼 때, 지질이도 가난하고 참으로 볼품없고 비천하게 보인 교회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도 그리했고 자신들이 볼 때도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라고 인정하십니다. 그 다음을 보면 재미있는 비교가 나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을 사단의 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하는 의미는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고 율법을 운운하고 종교적 행위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참으로 신실한 것 같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저들의 정체는 실상은 사단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이 보셨을 때 겉모습과는 달리 사단의 회라고 판정받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었지만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라고 인정받은 서머나교회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참으로 기쁘고 인정해주시는 성도가 되어야지, 주님이 보실 때마다 쟤는 얼받게하네!....한다면 얼마나 불행입니까? 저 사람은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말하고 주여 주여하지만 \\\"실상은 나를 불신하고 있구나! 혼자 진실된 것 같지만 실상은 거짓된 자구나! 혼자 깨끗한 것 같이 하지만 실상은 구더기와 같구나! 혼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구나! 보면 보면 열받네.....라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어떠한가? 내가 나보기에 어떠한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님 보시기에 내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한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 말씀대로 실상은 부요한 자로, 실상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로, 실상은 풍성한자로, 실상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받게 되시기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은 서머나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주님이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과 궁핍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정체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네가 지금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오해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는데 내가 다 안다. 우리가 지금 개척교회를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건축을 하려고 하는 교회가 아닙니까? 네가 지금 아무도 안가려고 하는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고와 봉사를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네가 흘리는 눈물을 알고, 네가 흘리는 땀을 알고, 네가 엎드리는 기도의 무릎을 알고, 네가 당하는 모든 아품을 안다. 내가 안다\\\"라고 하십니다. 서머나 교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보고계시고, 나를 아신다고 한 것을 마음에 새긴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고통속에서도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주님이 알고계신다는 그 사실하나로 믿음을 지키며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어떤 주님이십니까? 8절을 보면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어려움과 환난과 궁핍을 아시는 주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입니다. 처음이요 나중인 분이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은 지금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이미 주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고, 이들의 승리를 위해 주님이 이미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아시는 주님께서 왜 이들의 고난과 어려움을 그냥 두고보고 계십니까?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이미 그 고난을 경험하셨고 그 고난을 이기셨던 주님이 이들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면서도 왜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금 믿는 자들이 받는 어려움과 환난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거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가난의 삶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왜 허용하십니까?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그 어려움과 환난속에서 정금같이 단련되어지고 거룩해지고 정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것은 이 환난이 \\\"10일 동안\\\" 이라는 기간동안만 허락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여기, 10일이란 그들이 넘어지지 아니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의미합니다. 즉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십일\\\'은 너무 긴 기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짧은 기간도 아닙니다. 고난을 다 잊을 정도로 짧은 기간도 아니요, 그 고난에 져서 신앙을 다 잃어버릴 정도로 긴 기간도 아닌 시간입니다. 이 열흘의 고난은 참으로 우리를 정결케하고 영적으로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게 하는데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맘대로 죄짓고 산것도 아니고 그래도 기도하면서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대도 어려움이 올 때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인생은 왜 이 모양인가?\\\" 하며 신세타령을 해서도 안됩니다. \\\"복이 있니 없니\\\" 복타령을 해서도 안되고, 팔자 타령을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어려움은 주께서 아시는 것이요, 또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잠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인데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 환란이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려움 있을 때마다 이는 잠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인내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그 환란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 질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서머나교회를 위로하시면서 알려주신 10절의 소식은 너무나 두려운 소식이었습니다. 지금의 고난도 죽을 지경인데, 그 고난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더구나 그들 중 신실한 형제 몇 명은 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순교를 의미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짓된 위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고 무조건 앞으로 잘될 것이라고 위로하는 것은 자칫 그릇된 기대를 하게 함으로 더 견디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분명히 더 길어질 것인데 아무런 일이 없고 앞으로는 다 잘될 것이라는 식의 위로는 바른 위로가 아닙니다. 알려줄 것은 알려주어 마음에 준비를 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교회는 교인들에게 무조건 낙관적으로 좋은 말로만 축복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가 극복하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서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지금도 서머나 교회는 주님 때문에 고통속에 있지만 앞으로도 당분간 이 고통이 심해질 것이며, 심지어는 순교까지 당할 것인데 이것을 말하지 않고 앞으로는 잘 될것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희에게 앞으로도 십일동안 환난이 계속 될것이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 있는 어려움과 장차 있을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환난이 온다고 하는데 두려움이 없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대처방법을 보십시오. 그 두려움을 피하거나 잊거나 감추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열심을 다해 충성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난이 올 때 살려고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그 가운데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실제로 죽을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길이 생기고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살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 어려움 가운데 더 깊이 들어가보십시오. 폭풍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살 길이 있을 것입니다. 결코 고난을 싫어하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다 이유가 있고, 다 유익이 있다는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부딪쳐보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속에서도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분노를 품고, 원망을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대어들어봤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그 고난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죽도록 충성하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고난속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마침내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으로부터 받아누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고난속에 있을 때 우리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힘으로 이겨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게 하고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죽도록 충성하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이란 우리가 죽은 후에 영원한 운명이 갈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고난을 두려워해서 말씀을 포기하고 주님을 거역하면 정말 무서운 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망이 무서워서 주님을 부인하고 세상을 따라가면 나중에는 정말 무서운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죽습니다. 주님은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목숨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정말 중요한 것은 둘째 사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말씀을 대합니다. 이겨야 둘째 사망에 빠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믿는 사람은 이 심판에 빠질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군인은 싸워야 합니다. 적은 보고서도 싸우지 않는다면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유대인의 핍박과 로마정부의 핍박이 있다고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를 감추거나 숨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이겨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믿는 자는 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기는 자가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와 말씀으로 싸웟서 이기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고 환난이 있고 궁핍이 있어도 주님이 싫어하시는 원리와 싸우는 것이 믿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우리 삶의 사소한 현장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일상생활속에서 주님께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고 말씀의 원리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길이 막힐 때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는 현장에서 손님들에게 진실하게 장사하는 것입니다. 동료들과 이웃들과 함께 하는 음식점에서, 바이어들과 상담하는 테이블에서, 세금을 취급하는 의자 위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핍박을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이나 고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편하고 쉬운 신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런 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해주면 다른 교회로 가니까요. 그러나 주님이 오늘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믿음대로 살지 않고 싸우지 않고 말씀의 원리를 거스리는 자는 사실은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는 자는 이기는 자들입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