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는 교회 건강한 성도, 건강한 교회 시리즈 (2) 계2:8-11 며칠 전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오늘 친구 집에 갔는데 엄청 부자다. 집이 2층이고, 차도 2대나 있는데 벤츠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부럽냐?”“부러우면 그 집에 가서 아들해라” 그리고 나서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집이야말로 ‘세계에서 제일 부자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가 부자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받았으니 얼마나 부자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父)와 아들(子)이 함께 사니 우리는 부자지간이고, 그것도 큰 아들, 작은 아들, 둘이나 있으니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부자가 아니냐? 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부자=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굴리며, 좋은 옷을 입고 다니고, 좋은 가구들을 소유하고 있으면 부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집에서 가진 것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이것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일반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부자의 정의는 다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시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부자는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주님께서는 일반적인 기준과 완전히 반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머나 교회는 환난이 많고, 여러 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 “네가 가난한 자다”라고 하지 않고, 반대로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뒤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실제로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라고 책망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주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궁핍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부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지난 주 ‘첫 사랑의 열정을 회복하는 교회’가 바로 건강한 교회의 출발임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웰빙처치, 건강한 교회 시리즈 두 번째 시간입니다. 건강한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머나 교회가 바로 주님 앞에서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함께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고난을 이기는 교회가 영적으로 부요합니다. 서머나 지역은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izmir)입니다.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에베소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면 서머나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해 아래 모든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 ‘아시아의 왕관’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서머나에는 환난과 궁핍이 있었습니다.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받는 박해와 어려움을 말합니다. ‘궁핍’은 종교적 박해 속에서 교회가 겪는 물질적인 어려움을 말합니다. 당시 서머나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서머나의 모든 시민은 매년 로마 황제 가이사를 섬기는 제단에 가서 충성의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가이사는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충성 맹세를 하고 증명서를 발급 받았습니다. 그 증명서가 없으면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은 충성의 맹세를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엄청난 핍박과 환란을 받았습니다. 주후 156년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였던 폴리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참배하기를 거절했던 폴리캅과 인근지역 성도들 11명이 유대인들의 밀고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폴리캅의 인격과 덕망을 흠모하던 총독은 \\\"예수를 욕하고 황제의 신상에 절하면. 당장에 풀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86년 동안 내가 섬겨온 주님, 그분은 언제나 나를 인자로 대하셨오. 내가 어찌 그분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총독이 다시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고 말하자 폴리캅은 조용히 \\\"어서 맹수를 부르시오\\\"합니다. 총독은 다시 \\\"네가 맹수를 두려워 않으니 너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러자 폴리캅이 말합니다. \\\"총독이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심판을 위해 예비 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을 두려워하시오\\\" “나는 86년간을 섬겨온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분만이 나의 왕이시고 구세주가 되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남기고 화형대에 묶여 불길 속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교회는 순교의 피를 먹고 지금까지 자랐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고난을 믿음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1866년 27살의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에서 쪽 복음을 뿌리며 순교했습니다. 양화진에 가보시면 이름 모를 수많은 선교사들이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 와서 뼈를 묻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산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도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피 흘림을 통한 고난의 순교의 흔적이 오늘 우리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고난을 이기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신앙의 길은 평탄한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영광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노라면 믿음의 시련이 다가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21)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고난 받는 길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전도하지 않으면 욕먹을 일이 없습니다. 혼자 조용히 믿으면 누가 핍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핍박 받는 것이 두려워서 조용히 믿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삶으로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복음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능욕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1-42) 우리 성지교회가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생명을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11월 19일 예수 생명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서머나 교회와 같이 목숨 걸고 예수 증인이 되고자 할 때 주님 앞에 인정받는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 부요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기쁨으로 여기고, 주님 앞에 헌신 할 때 주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받는 복된 성도, 복된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충성하는 교회가 영적으로 부요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란과 가난 가운데서도 충성한 교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한 부분의 원어를 보면, 계속해서 믿음을 신실하게 지키되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되게 지키라는 격려입니다.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충성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충성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하기 싫고, 관심이 없고, 견디기 힘든 일일지라도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의 원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내 위치나 직분 때문에 하는 것은 온전한 충성은 아닙니다. 나는 무시를 당하고, 손해를 보고, 욕을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이라면 죽을 각오를 하고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대표적인 우상숭배의 지역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데아 로마’라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서머나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신전에 와서 신상에 절을 하고 증명서를 받아갔습니다. 증명서가 있어야 집을 사거나 취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증명서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가는 데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합당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적으로 서머나 교인들의 삶은 궁핍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궁핍을 선택했고,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충성이란 내가 좋을 때는 하고 나쁠 때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가난해질지라도 가난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적인 풍요보다 영적인 풍요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면류관에는 두 종류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디아데마\\\' 인데, 이것은 ‘Sign of Loyalty’(왕권, 권력)의 상징입니다. 즉 왕이 쓰는 왕관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스테파노스\\\'입니다. 바로 이 말에서 ‘스데반’(면류관)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스테파노스는 ‘Pride of Victory’입니다. 승리의 표시로 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쓰여진 단어는 ‘스테파노스’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수고하고 훈련하고 인내하고 절제한 그 절정에서 평가받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수고와 땀의 대가를 지불함으로 얻어지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에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죽기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 굳게 지켜 충성할 때 그 수고와 인내의 결과로 영광스런 승리의 면류관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줄 믿습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바로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 약속을 붙드는 교회가 영적으로 부요합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둘째 사망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이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이 땅에 잠시 잠깐 머물다 가는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형벌 받을 둘째 사망을 두려워했습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증서를 쓰고 도장을 찍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의 약속을 너무 의지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지나치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경험이나 물질, 지식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한 순간에도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물질 때문에 고생하는 것도 한 순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통해 서머나 교인의 믿음을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시는 이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히11:24-27) 모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왕자로서의 세상의 안락함이나 권세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명예나 부귀영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잡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의 리더십의 원천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면 자기도 모르게 불쌍해 집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더 아름다운 것이 있습니다.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이 있습니다.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십시오. 이 땅의 것에 매이지 마시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자유한 삶을 사십시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십시오. 여기 세상의 보이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귀하게 여긴 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의사 이상호 선교사님입니다. 그분은 경희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풍요롭고 안락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도 한의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린 남매와 아내를 데리고 이상호 선교사님은 불모지의 땅 스리랑카로 갔습니다. 선교사님의 집안은 믿는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선교사로 헌신하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과 열정, 그리고 자신을 한의사로 만들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합니다. 그는 스리랑카 반군이 자리 잡았던 곳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치료했습니다. 어떤 때는 수 천명이 몰려와 쉴 틈 없이 일했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습니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주님을 위해 포기했습니다. 그는 모세처럼, 거룩한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스리랑카의 죽어가는 영혼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습니다. 그와 함께 사역했던 분들이 장례식장에서 읽었던 조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봉사활동은 무슨 상품도 유행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바람 한번 맞지 않고 피지 않는 꽃이 없다고 하듯 오늘의 아픔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나가겠지요. 그리하면 나는 또 잊은 채 다가오는 하루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일이 되어 비가 올지…… 바람이 불지는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다부지게 가슴을 펴고 일어나야겠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내 주위의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나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사랑이야 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 더더욱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상처 입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웰빙 성도, 웰빙 처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물질의 풍요로움보다도 영혼의 풍요로움을 더 사랑하는 자임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충성하는 성도,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붙잡고 영광스런 하늘의 면류관을 소망하는 성도, 이들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어떤 고난이나 시련이 와도 영혼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성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바로 신실하신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이 말씀을 가지고 작곡한 최용덕 집사님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영적 부요함을 추구하는 웰빙 성도, 웰빙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