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


두아디라 교회
계2:18-29


얼마 전에 교회의 복사실에 있는 기타를 한번 쳐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줄이 풀려 있어서 아예 소리가 나지 않았고, 또 하나는 줄이 맞지 않아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줄이 풀려진 기타를 가지고 연주를 하려면 줄을 탱탱하게 당겨서 각각의 음을 바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기타는 원래의 목적대로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의 연주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결산할 때 이 연주가 어떠했나를 가지고 결산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부분은 아예 연주되지 않았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신앙의 줄이 느슨하게 풀어져 있을 때입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편하게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의 삶은 연주 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부분은 연주한다고 했는데 도저히 듣지 못할 정도로 소리가 엉망일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말씀으로 제대로 조율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소리는 나는데 듣기가 싫습니다. 공해입니다. 또 어떤 때는 정말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면서 멋진 연주가 되었던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내 삶에 있어서 영적 긴장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으면서도 그 줄이 하나님의 말씀에 맟추어서 제대로 조율이 된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깨어 있으면서 모든 일을 주님의 뜻대로 할려고 노력할 그때, 그때에 한 말과 한 행동과 한 모든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입니다. 기가 막힌 연주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냥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연주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연주되고 있습니까? 제대로 된 소리를 내고 있습니까? 악기의 줄을 팽팽하게 당기고 각각의 음을 맞추어서 거기에 혼을 불어넣어 연주하고 있습니까?

저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들을 보면서 한 교회, 한 교회의 연주를 듣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름다운 연주를, 어떤 교회는 아예 연주가 되지 않고 있고, 어떤 교회들은 연주가 되기는 되는데 불협화음을 내고 있습니다. 이 교회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듣는 부분을 우리가 잘 적용하고, 책망받는 부분을 유념하여 우리의 삶에서 몰아낼 때 그때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연주가 될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바른 교리와 바른 행동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처음 사랑이 식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 교회의 연주는 주님앞에서 간절함과 사모함과 가난함 마음이 빠진 신앙의 연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연주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연주가 아니라 자기들을 기쁘게 하는 자기도취의 연주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고치지 않으면 주님은 이 연주자를 바꾸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연주는 어떠했습니까? 주님을 감격하게 했던 연주입니다. 그들은 환난과 궁핍과 훼방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정절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를 했던 교회였습니다. 버가모교회의 연주는 왠지 음란한 분위기의 연주였습니다.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여 우상숭배와 행음의 죄에 빠졌던 것이죠. 주님은 이 교회의 연주를 아름다운 연주로 바꾸시려고 이들과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경고한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아디라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어떠합니까?
버가모교회와 비슷한데 그 농도가 좀더 심합니다. 더 음란이 깊은 모습입니다.
먼저 이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8절입니다. 두아디라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같은 분으로 나타납니다. 즉 모든 것을 아시는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은 두아디라교회가 지금 주님앞에 숨기는 죄가 있다는 것이고 심판받을 만한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이끄는 대로 행음하고 우상숭배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하기 전 까지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사업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이들에게는 에베소 교회와는 달리 사랑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이 많았습니다. 즉 처음보다 나아지려고 애을 썼던 교회입니다. 처음 연주보다 더 나은 연주를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섬김과 봉사와 믿음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았고 풍성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이들의 연주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연주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이세벨을 용납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아마도 이세벨이란 이름을 가졌던 여자라기 보다는 구약의 이세벨처럼 공동체에 굉장히 심각하고 나쁜 영향을 미쳤던 여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세벨이 어떤 여자입니까? 아합왕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이방여자로서 바알신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에 끌여들여 이스라엘 전역이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물들게 했던 여자입니다. 이와 같은 여자가 두아디라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을 꾀어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알기 위해서는 두아디라라는 도시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도시는 경제가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양모업, 염색, 가죽업, 의복, 요업, 도자기업등이 발달한 경제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그냥 발달한 것이 아니라 조합형태로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조합들이 각자의 수호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직업을 가지면 그 직업의 조합원이 되어야 했고, 조합원이 되면 그 조합의 수호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이들이 섬기는 수호신은 단순히 직장에 세워진 우상앞에 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합원의 축제에 참가해야 하고 그때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어면서 음란한 파티에 끼어야 하는 적극적인 이교행위였습니다. 즉 이 도시에서 생업에 종사하려면 그 조합이 주도하는 이런 음란하고 우상숭배로 가득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는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아디라 교회의 신자들은 요즘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앙인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직장에서 강요할 때 겪지 않을 수 없는 갈등과 고통을 매일 경험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요구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갈등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회의 요구대로 살지 않으면 사회에서 따돌리게 되고 생활이 어렵게 되고, 또 사회의 요구를 따르게 되면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런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처음에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가지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나타나서 예언까지 하면서 \\\"우리가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면 입술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 한 조합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교인들을 꾀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먼저 그렇게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니 안그래도 이런 문제 때문에 갈등하던 교인들이 얼마나 이 가르침이 솔깃했겠습니까? 그 동안 가책과 고민의 쇠고랑을 차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신탁을 받았다고 하는 여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 쇠고랑을 벗기고 풀어주니 얼마나 후련했겠습니까?

이때 두아디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여자를 책망하고 교회에서 몰아내어야 하는데 그만 이세벨을 용납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도 이세벨과 함께 그런 행위에 참여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연주는 깨어지고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더 밝아지고 편해진 것 같은데 경건은 줄어들고 영적으로 침체되고 말았습니다.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세상에서 살기는 더 편해졌는데 하나님과는 멀리 떠나 포류하게 되었습니다. 약한 지도자와 약한 교인들이 악한 이세벨을 용납함으로 그 악함이 교회 전체에 물들어가고 마침내 주님이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교회는 행음과 우상숭배의 죄에 깊이 물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경고
주님은 이 교회에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너희들이 우상숭배와 행음에서 돌이키고 원래의 아름다운 연주를 회복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경고는 주님의 긍휼입니다. 이세벨처럼 교묘한 죄인이라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그와 더불어 악에 빠져 행음했던 자들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음행의 죄에 빠졌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주님앞으로 돌아오면 다시 원래의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고 불구하고 회개치 않으면 침상에 던져버리겠다고 하십니다. 큰 환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행한대로 갚아 주겠다(23절)는 것입니다. 쾌락의 침상이 질병의 침상이 되고 자식들이 죽어나가고....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실 정도록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 대해 너무나 관용을 베품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 눈이 불꽃같은 분이 보고 계시고 그 발이 빛난 주석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대고 갚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환경이나 어떤 분들의 말을 통하여 회개할 기회를 줄 때 빨리 돌이키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목회자가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엇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들어야 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성도의 삶에 위기를 보고 기도하고 하는 말은 주님이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 하지 말고 고치십시오라고 말하면 들어야 합니다. 계속 무시하고 자기 욕심과 자기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교회에 이 악에 동참하지 않고 계속 깨어서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올 때 까지 계속 그 연주를 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유혹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때까지 계속되는 유혹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명이 붙어 있는 날까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주님이냐? 나의 쾌락이냐? 하는 싸움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줄을 느슨하게 풀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살면 어쩌면 우리는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고 있다고 비방을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감각이 없고 고지식한 사람으로 평가될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은밀히 눈물로 밤을 지새며 기도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굳게 잡으라는 말씀속에서 아직도 감당해야될 고통이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이럴때,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26절을 보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
28절을 보면, \\\'새벽 별\\\'을 주리라.

그러므로 굳게 잡읍시다. 비록 내가 어디에 와있던지간에 굳게 잡읍시다. 세상과 타협하여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지극히 적은 죄라도 용납하지 말고 미리 끊어서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며 성결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연주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