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가모 교회

버가모 교회
계2:12-17


신앙 생활은 하면 할수록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가치관과의 정면적인 충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편해질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은 여기에서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마음이 편하기는커녕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부담이 생기고 혼란이 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세상이 주는 가치관속에서 별일 없이 잘 살아왔는데 예수 믿고 나니, 말씀을 들을때마다 자꾸 이전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라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지금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신앙이란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건강에 관한 것이든, 인간관계이든.....지금 자신의 삶에 좀더 도움을 주고, 더 위안을 주고, 힘을 주는 그런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독교신앙에 입문하면 처음부터 듣는 말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다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하니 굉장한 갈등이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런 갈등과 혼란속에서 일단 말씀의 원리대로 순종하고 나면, 삶의 방향을 전환하고 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얻게 되면서 전혀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신자들이 이렇게 성경에 약속된 영적인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삶을 바꾸지 못하도록 공격하고, 가치관을 바꾸지 못하도록 공격하고 유혹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원색적이고 무식한 방법입니다. 목에 칼을 대든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절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식의 위협과 핍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회유와 유혹입니다. 꼭 그렇게 믿을 필요가 있나? 적당히 믿으면 되지.....라고 유혹해서 결국은 믿음이 내 삶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는 방법입니다. 사탄은 늘 이 두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공격하고 신자를 공격합니다. 오늘 버가모교회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이 세상의 이 두가지 공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반응해야 하는 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버가모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버가모라는 도시를 이해해야 합니다.
버가모는 에베소, 서머나와 함께 소아시아의 3대도시중 하나입니다.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로마치하 식민지의 수도역할을 했던 행정도시이며, 위치상으로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8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세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신전입니다.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고, 승리의신 아테네 신당도, 지도자의 신 디오네소스의 신당도, 역대 로마황제의 신당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신전이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상을 섬기는데 활발했던 도시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로 이 도시가 자랑했던 것은 주전400년부터 주후400년까지 소아시아에서 가장 병을 잘 고치는 장소로 이름 나 있었던 아스클레피온이라는 병원과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유명했던 갈렌이라는 의사였습니다. 버가모는 아스클레피온과 갈렌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신을 숭배하고 서약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버가모는 병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이용해 역시 우상숭배의 길로 사람들을 빠지게 하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세 번째는 버가모에는 당시 2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던 대규모 도서관이 있었고 이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에 이런 큰 도서관이 있었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문화인이고 지식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는 책들이 대부분 반 하나님 적이고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타락하게끔 하는 그런 책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버가모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도시를 이렇게 자랑했지만 주님은 이런 버가모를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13절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사단의 위는 사단의 보좌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정치, 문화, 의료, 지식 모든 면에 있어서 사단이 맹렬하게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던 거대한 우상숭배의 물결과 세속화의 도시가 바로 버가모라는 도시입니다. 주님은 이 어두운 우상의 도시와 세속화된 도시의 한가운데 버가모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왜요? 진리는 어두운데서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참된 거룩과 사랑은 세속화속에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세속화되고 죄가 만연한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절은 어디에 많이 있습니까? 산좋고 물좋은 산속에 다 있습니다. 교회는 산속에 있으면 안됩니다. 교회의 진리는 책상에 앉아서 깨닫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웃과 부딪치면서, 전도하면서 이 죄악된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면서 삶속에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산속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풍조가 있습니다. 절은 자꾸 산속에서 내려오려고 하고 교회는 자꾸 산속으로 들러가려고 합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단의 보좌가 있는 도시에 세워진 버가모교회는 이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감당했을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버가모교회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버가모교회의 승리의 모습입니다.
13절을 다시 보면,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에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감사하게도 버가모교회에는 안디바와 같은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
안디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디바\\\'라는 이름의 뜻이 \\\'모든 악을 대항한다\\\'이므로 특정 인물보다는 이 교회에 있었던 충성된 무리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버가모는 어두운 도시였고, 죄악의 도시였고, 우상숭배의 도시였고, 사단의 보좌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이 거대한 죄악의 물결과 세속화의 물결속에서도 이 도시의 악과 대항하며 주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죽기까지 충성했던 믿음의 사람들, 그 사람들을 안디바라고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크리소스톰이라는 초대교회의 교부이요 유명한 설교자에게 하루는 그의 제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때 크리소스톰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 되겠구나\\\" 이런 사람이 안디바입니다. 예수믿는 신앙 때문에 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한다 해도 오히려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서 주의 이름을 붙잡고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이 어두운 세상을 진리로 밝히는 사람안디바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몸된 교회는 산속에 세워지면 안됩니다. 사단의 보좌가 있는 세상 한 복판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 한 복판에 세워진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런 안디바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거대한 불신앙의 흐름이 시대의 사조가 되어 믿는 자를 향해 덮쳐오는 그 때에 자신의 삶으로 예수가 주 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설령 그들에게 끌려가고 쫒겨나서 죽고 떨어지더라도 죽기까지 충성하는 증인들 말입니다. 요즘처럼 자신의 안락과 출세를 위해 너무나 쉽게 신앙을 던져 버리는 이 시대속에서 우리는 안디바같은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그리워집니다. 살아있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신앙고백이 삶의 현장에서 증거되어 지고, 생명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입술과 삶으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고백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그리워집니다. 감사하게도 버가모 교회는 이런 충성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점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교회는 이런 안디바와 같은 일군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한우리교회에 안디바와 같은 많은 충성된 증인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 다음은 버가모교회에 떨어지는 책망입니다.
14절입니다. 두어 가지 책망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두어 가지라고 버가모교회가 책망할 것이 적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두가지의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고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의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버가모교회에는 한 편으로는 안디바와 같은 충성된 증인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고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세속화된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발람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발람은 민수기 21장부터 25장을 읽어보면 나오는 선지자로서 모압왕 발락에게 팔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포섭되었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돈에 팔려서 모압을 위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는데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세 번 다 저주대신 축복을 하고 맙니다. 그때 발람이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하지 못하고 저주하게 하지 못하니 하나의 간교를 발락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무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올무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가만히 우상의 제물을 놓고 여인들을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이 여인들과 간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물량공세와 미인계입니다. 보기 좋은 세상의 것들을 미끼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허물어 버려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하는 방법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올무에 걸려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다가 염병이 돌고 2만4천명이 죽고 맙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일부러 방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폐기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율법은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은 필요없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기들이야 말로 신앙적인 자유함을 아는 자들이고, 자기들처럼 이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율법의 멍에에 얽메여 있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으면서 자기 멋대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니골라당입니다. 다시 말하면 쉽게 예수 믿는 것이 바로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고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합니다. 전혀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분들은 좀처럼 구속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배만 드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생활은 일체의 간섭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이런 니골라당의 모습이 많은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신앙이 너무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배만 드리고 나머지 생활은 전혀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이미 그 사람은 신앙의 순결을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자유이지 이렇게 신앙적으로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잘못한 것중에 하나가 이런 자들이 교회를 떠날까봐 죄를 책망하지 못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방종한 삶을 살거나 우상숭배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도 책망하지 못합니다. 오직 축복을 비는 설교와 위로로 가득찬 설교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교인들의 올무가 됩니다. 교인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 저렇게 살아도 교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단지 축복만 해주는구나.....이런 것은 누룩처럼 교회에 퍼집니다. 쉬운 신앙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에게 편지하면서 이런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믿는 자는 믿는 자의 길이 있고 믿는 자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사는 방식을 바꾸지 않고 믿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음란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그 음란한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수고하지 않고 남의 노력으로 사는 자는 자기 스스로 노력하면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음란한 생활을 즐기면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이 비웃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매우 위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핍박과 박해보다 더 치명적이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 바로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입니다. 말없이 우리를 무너지게하는 쉬운 신앙에로의 유혹입니다. 세속화와 타협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 이런 요소가 있다면 빨리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16절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속히 임하여 주님 입의 검으로 우리와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세상과 구별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과 싸우기를 포기한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주님이 그들과 싸우시겠다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는다면 주님이 여러분과 싸우실 것입니다. 그 입의 날센 검으로 우리와 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변화가 없는 신앙을 거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담이 되고 마음이 무거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안디바처럼 충성된 증인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왜 세상속에 존재합니까?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포기하고 목회자와 교인이 서로 암묵하에 자신들의 삶을 간섭하지 말라는 식으로 교회가 흘러가면 그 교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님 우리가 헌금해서 먹여 살리니까 일주일동안 힘들게 살아온 우리들에게 변하라든지, 십자가를 지라든지, 헌신하라든지, 회개하라든지, 그런 잔소리 말고 축복이나 해주고 위로나 해달라고 바라면 안됩니다. 또 목사는 그런 교인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의 종이 될 때 그 교회는 사명을 잃어버리고 망해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가름침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목회자와 교인이 함께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설교가 전쟁같습니다. 교인들은 지금의 삶을 놓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고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해야 된다고 소리치니 무슨 전쟁을 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의 힘으로 되겠습니까? 설교자가 소리친다고 되면 벌써 다 변했겠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강하게 불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이 우리의 심령과 교회가운데 흘러 넘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변화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내어놓고 겸손하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은혜의 힘으로 날마다 안디바와 같은 삶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런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렇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감추인 만나를 받습니다.
감추인 만나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떡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상에게 무릎꿇지도 않고 세속주의에 물들지도 않고 끝까지 주의 이름을 붙잡고 깨끗한 신앙을 지키는 자에게는,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인 만나인 예수그리스도를 먹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루하루를 무엇으로 사십니까? 이 감추인 만나를 알고 계십니까? 하늘로부터 내려진 산떡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먹는 양식이나 취미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 공급받는 하늘의 만나, 감추인 만나인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기만 하면 쾌락과 즐거움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참된 만족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만족, 참된 만족은 감추인 만나를 먹을 때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 오늘도 나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이 있는 자가 감추인 만나를 먹는 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감추인 만나가 끊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새 이름이 새겨진 힌 돌을 받습니다.
그 당시 힌 돌은 재판석에서 무죄를 선언할 때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흰돌은 자유입니다. 승리하는 자에게 주님은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이 새겨진 흰돌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주어진 참된 자유의 삶입니다. 지금 버가모교회가 거짓 자유에 속아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거짓 자유와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참된 자유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에 묶에 꼼짝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한 삶을 지키기 위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단의 보좌가 있는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이런 참된 자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