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

첫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
계2:1-7



[계2,3장]에는 7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첫 교회인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는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도시였습니다. 당시 수도는 버가모였지만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였기에 아시아의 관문이었고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순회재판소가 있는 몇 안 되는 자유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는 아데미신(인간과 동물의 생식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우상도시였습니다.

이런 에베소에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교회를 설립했고[행18:18] 바울이 2년 반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행19:19]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바울의 복음을 듣고 변화된 도시입니다. 이런 일로 반대자들 때문에 디모데를 후계자로 세우고 바울은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그 때의 신앙적 열기가 사라지고 처음 사랑을 잃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7교회 중 첫 교회인 에베소교회의 편지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하시는 바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

이제 7교회에 보낸 편지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7교회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게 다시 짚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를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계2,3장]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7교회는 당시 로마의 통치 지역인 아시아도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들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날 교회들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혀 과거에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계시록은 예언이기 때문에 그때의 교회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은 앞으로 나타나게 될 실제적인 일곱 교회를 말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교회들도 결국은 배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른 견해의 대표적 의견입니다.

또, 7교회를 전 교회 시대로 나누고 각 교회별로 각 시대를 구분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취하는 해석인데, 에베소 교회는 주후 70년부터 312년대까지의 교회시대, 서머나 교회는 주후 170년부터 312년까지의 교회시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 자의적입니다.

다른 해석은 7교회를 그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일곱 교회에 국한한다는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이 [계2,3장]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가장 타당한 해석은 요한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7교회이면서 오늘날 종말에 처한 전 세계 교회들에게 주시는 편지라고 보아야 합니다.

칭찬과 책망

7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다 다르게 묘사되는데 그 모습과 그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가 연관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묘사됩니다. 일곱별은 이미 일곱교회며 사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붙잡고(크라테인)”은 주님께서 교회를 완전히 장중에 넣고 계시다는 말로, 지배와 통치권을 말합니다. 또한, 어떤 물건을 손아귀에 넣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어서 소유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에베소교회의 주인이요, 지배자란 의미입니다. 에베소교회만이 아니라 우리교회에도 주님은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란 표현은 교회를 위하여 계속 사역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잇는 곳이라면 언제든 어디서는 자신의 일을 쉼 없이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칭찬과 책망을 합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들어 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절]

칭찬의 내용은 행위, 수고, 인내, 진리수호, 인고(忍苦) 등입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수고와 인내입니다. “수고(코포스)”는 땀을 흘리기까지 일하는 것, 심신이 기진맥진하도록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교회는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을 위하여 수고할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인내(휘포포네)”는 거듭 닥치는 시련과 고난에 씩씩하고 용기롭게 대처하여 은혜와 영광으로 만드는 힘입니다. 고난은 대부분 “자칭 사도”나 “니골라 당”에 의한 것입니다.

그릇된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분변하여 성도 가운데서 추방하는 일을 잘한 교회입니다. 니골라당은 버가모교회의 편지에서도 나타나는데,[2:15] “발람의 교훈을 받드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어원상으로 니골라와 발람은 같은 말입니다. [민25:1-5]에는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을 난잡하게 섬기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근원이 바로 발람입니다. 사람들은 부도덕과 죄로 꼬이는 사람이 바로 발람입니다. 실제적으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니골라[행6:5]는 나중에 이단자가 됩니다.

니골라당의 주장이 있습니다. 율법은 이미 효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선한 것은 영뿐이므로 육체는 어떤 짓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성도는 은혜 안에 있기에 어떤 짓을 해도 보호받고 어디를 가도 은혜 안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세상과 타협한 자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오늘날도 많습니다. 이 이단은 교회 밖에서 온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나타난 이단입니다. 다행히 에베소교회는 이런 이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단을 가리다 보니 사랑이 없어졌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사랑이 이제는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처음 믿을 때의 열정이 식었다는 말입니다. 첫 사랑의 감격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화평했고, 마음이 뜨거워 기도하고 남을 도왔던 교회가 이단자들을 색출하려다 보니 그런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회개와 열매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 회개의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십니다. [5절]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첫 사랑을 잃은 원인을 진단하라는 말입니다. “떨어진”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1절]에서 주님은 오른손으로 교회를 붙잡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떨어진 교회라고 합니다. 주님의 통치권과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떨어진 것입니다.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하나님나라에 관심이 없으면 떨어진 것입니다. 지금 에베소교회의 상태가 그렇다고 합니다. 그걸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기도 하지만 행위의 변화입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행위는 칭찬꺼리였지만,[2절] 지금의 행위는 회개꺼리[5절]입니다. 주님은 지금 에베소교회에 행위의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생각과 회개, 행위의 변화로 이어지는 진정한 회개가 없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하십니다. 촛대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옮긴다는 말은 교회의 소유권을 사탄에게 넘긴다는 말입니다. 사자(使者)에게서 뺏고 성도에게서 뺏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촛대란 바로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하지 않는 교회는 성령이 떠난 교회가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재하시지 않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회개하면 생명나무의 괴실을 먹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생명나무”를 이상하게 해석하여 이단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생명나무는 계시록의 말씀을 들려주는 특별한 사람이고 열매는 그가 전하는 말씀이라는 해석이 그른 해석의 대표적 예입니다.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의 금단의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창2,3장] 첫 사람 아담이 먹을 수 없었던 열매는 둘째 아담 메시야, 예수님께서 먹게 할 것입니다. 천국 생명의 근원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나무며 그 분이 주는 천국의 삶이 바로 열매입니다. 이 삶이 바로 낙원인 천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계3:20]과 같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에베소교회는 당시의 교회이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입니다. 첫 열심과 사랑을 잃고도 회개치 않으면 화가 미칩니다. 주님과 떨어진 손을 잡고 첫사랑을 회복하여 천국의 복된 사람을 기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