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 이야기/계2:8-11

서머나 교회 이야기
계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아시아는 지금의 터어키를 말하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는 지금은 이즈밀이라고 불리는 도시입니다. 이즈밀은 지금도 터어키에서는 수도 이스탄불 다음으로 큰 도시입니다. 지금만이 아니라 예전의 서머나도 큰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와 버가모와 더불어 어디가 가장 큰 도시인지를 경쟁하는 도시였습니다. 서머나는 주전 3,000년 전부터 이미 항구가 발달하여 모든 물자가 풍부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 도시에 있는 크리스챤들은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이유는 뻔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경제, 사회 활동이 억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의 기독교는 다소 변질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왕왕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와전된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에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예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다분히 현세적이고 물량적으로 쓰입니다. 마치 자기에게 있는 종교성에 대한 보상으로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얻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잘 섬길수록 근심, 걱정이 없어지고 행복하고 좋은 일만 생기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니까 예수만 제대로 믿으면 병도 나을 수 있고 부자로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신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예수를 잘 믿는데도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굉장히 신실한 사람인데도 중한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정도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정도가 비례한다면 성경에 나온 숱한 신앙 위인들은 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바울이나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은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아서 그런 고초를 겪은 것입니까?

그 사람들이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고 결국은 순교를 당한 이유가 뭡니까? 신앙이 나빠서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신앙이 좋아서 그런 일을 감수한 것이라고 우리는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신앙이 좋아서 그런 고난을 당했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를 잘 믿어서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면 어딘가 모순이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을 신령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세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당장 듣기에는 달콤할지 몰라도 말이 맞지 않습니다.

일단 기독교회사에 순교라는 단어가 없어져야 합니다. 순교가 뭡니까? 차라리 생명을 포기할지언정 신앙 절개를 굽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징벌로 죽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켜서 죽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북한이나 중국, 이슬람 국가들이 전부 그렇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숨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신앙이 시원치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예수를 제대로 안 믿어서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 예수를 믿는 바람에 그런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도 그런 교회였습니다. 서머나라는 도시는 흥청망청 모든 것이 넉넉했는데 유독 거기에 있는 신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대체 뭐하는 분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으면 당연히 천군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태연하게 말씀만 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2:9)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형편을 전부 다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환난이 있는 것, 궁핍이 있는 것 그리고 유대인의 훼방이 있는 것 모두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 훼퍼라는 독일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가 미쳤으면 기사를 죽여서라도 승객들을 보호해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로 히틀러에 대항했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것도 두렵지 않고 매 맞는 것도 괜찮답니다. 죽는 것도 무섭지 않은데 꼭 한 가지만은 도저히 참기 힘들었답니다. 자기가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감옥 밖은 너무도 조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옳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면 밖에서는 데모를 하든지 구명 운동을 하든지 자기에게 동조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너무도 조용합니다. 자기가 대체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의미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서머나 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환난과 궁핍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환난과 궁핍은 어지간한 것이 아닙니다. 환난은 무거운 짐에 짓눌려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의 몸이 어느 만한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아무리 무거워도 근육이 견디는 데까지는 견딜 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압력이 계속 가해지면 얘기가 다릅니다. 근육이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면 결국 창자가 파열되고 뼈가 비틀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피의자를 심문해도 고문을 할 수 없게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만 해도 고문이 있었습니다. 인두로 지지기도 했고 주리를 틀기도 했습니다. 죄인의 두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나무를 끼워 다리를 비트는 형벌을 가하는 것이 바로 주리를 트는 것입니다. 혹시 압슬이 어떤 형벌인지 아시니까? 압슬(壓膝)은 누를 압(壓), 무릎 슬(膝)자를 씁니다. 말 그대로 무릎을 누르는 것이 압슬입니다. 죄인을 묶어 놓고 무릎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형벌입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그런 고통이었습니다. 고문으로 쓰일 만한 고통이었습니다.

궁핍도 그렇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일체의 경제 활동을 박탈당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당시 서머나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다고 했습니다. 도시 전체는 부유했는데 유독 서머나 교회 교인들만 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절대적으로 빈궁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가난한 것과 북한에서 가난한 것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어지간한 집에는 전화도 있고 TV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도 하루 세 끼 먹는 양식 자체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의 가난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하는 가난이 아니라 좋은 옷을 입지 못하고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가난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자칫 잘못하면 굶어 죽을 수 있는 가난입니다. 지내기에 불편한 가난이 아니라 지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가난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있는 궁핍이 그런 궁핍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유대인의 훼방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세계의 경제를 주름잡고 있습니다. 미국이 중동 모든 국가의 원망을 받으면서도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이유가 자국(自國)내에 있는 유태인들의 입김 때문입니다.

당시의 서머나도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서머나의 모든 상권은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이 장악했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막강한 재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로마의 관리들을 구워삶아서 로마 황제를 섬기기를 강요받는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갔습니다. 로마의 관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자기들은 빠져나가고 대신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로마에서 아무리 황제를 숭배하라고 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회 - 사단의 모임이라고 정죄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을 사단의 회라고 정죄했다는 얘기는 그들이 그만큼 사악했다는 뜻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받은 고통이 그만큼 극심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을 가리켜서 실상은 너희들이 부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이런 생활에서 무슨 부요가 있습니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고 악몽일 텐데 부요하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얘기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 가난한 것이고 어떤 것이 부요한 것인지를 새로 정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알부자라고 합니까? 어느 만큼 비싼 옷을 입고 다니느냐, 어느 만큼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느냐, 끼고 있는 시계가 얼마 짜리냐 하는 것으로 알부자를 따지지 않습니다. 외모에 관계없이 실속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허름한 집에서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녀도 얼마든지 알부자일 수 있습니다.

부요하고 가난한 것을 따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겉모양을 따지는 세속적인 안목으로는 서머나에 사는 일반 사람들이 부요한 사람이고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안목으로는 그들을 가리켜서 유대인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전부 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나라는 로마에 빼앗겼지만 황제 숭배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부요한지 가난한지를 따지는 것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나타난 것밖에 따질 줄을 모릅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부요한 것이고 가진 것이 없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가졌느냐 말았느냐가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부요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부요하다는 얘기는 어느 만큼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느 만큼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장차 그들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이 어느 만큼 풍성하냐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인정받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들을 몰라도 주님은 그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이상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서머나 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바른 교회인지 주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합니까? \\\"이제 내가 곧 가서 너희의 억울함을 풀어 주마. 너희가 받는 환난을 없애 주고, 궁핍을 없애 주마. 또 너희를 훼방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본때를 보여 주마!\\\" 이런 말씀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아직도 고난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앞으로도 마귀의 시험이 남아 있고 또 받아야 할 환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받은 고난이 뭐가 부족해서 아직도 고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까? 대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어떤 분입니까?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계2:8)



주님께서 스스로 소개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살아난 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각 교회마다 주님에 대한 소개를 달리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2;1)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주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계2:12)



버가모 교회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교회의 상황이나 형편에 따라서 달리 설명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유독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처음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형편에서는 이 얘기가 가장 필요한 얘기였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처음이며 나중입니다. 시작이며 끝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일을 시작하게 하신 분이 주님인 것처럼 일을 끝맺게 하는 분도 주님입니다. 지금 자기들이 받는 고통이 언제까지나 마냥 계속 될 것 같지만 주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면 결국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극심한 환난에 시달리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분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십 일 동안 환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십 일은 문자적으로 열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는 제한된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환난에 시달릴 때는 그 환난이 끝없이 계속 이어질 것 같지만 이 세상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습니다.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훈련병의 일과는 늘 고달프기 마련입니다. 모든 훈련이 다 힘들었습니다만 가장 힘든 훈련은 화생방 훈련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런 훈련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가스실에다 집어 넣는 것입니다. 들어갈 때는 방독면을 쓰고 들어가는데 들어간 다음에는 방독면을 벗게 합니다. 그때의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온몸이 따가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눈을 비비면 더 따갑습니다. 단 1초도 서 있기 힘든데 그런 속에서 줄을 맞춰서 정렬하게 하고 군가를 부르게 합니다. 방독면을 쓴 채 버티고 서 있는 조교가 마치 저승사자로 보였습니다.

그 속에서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애인 생각하면서 견딥니까? 고향에 계신 어머니 생각하면서 견딥니까? 그런 고통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은 다른 게 없습니다. 조금만 견디면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로 터져나오는 비명을 안으로 삼키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얘기는 우리가 자주 듣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면 자칫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과거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한 번 얻은 것으로 끝인데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과 지금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만일 구원하신 것으로 끝난다면 주님은 단지 \\\'고마우신 분\\\'일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지금은 우리 인생과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주인께 우리가 충성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충성의 범주에는 죽음까지도 포함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얘기는 자칫 감상적이 되기 쉽습니다. 마치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기로 굳게 다짐하면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진심을 보시고 어여삐 여기셔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죽음까지 담보로 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혹시 죽는다고 하더라도 충성을 보류하지 않는 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인데 죽도록 충성할 것을 조건으로 무엇인가 현세적인 욕심을 이루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쇼에 불과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무엇이 또 필요하다는 얘기입니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죽음 다음의 세상밖에 없습니다. \\\"내가 죽도록 충성할 테니까 이것을 해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거짓말입니다. 죽도록 충성한 사람에게는 죽도록 충성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현세에서는 보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어느 만큼 충성할 것인지를 우리끼리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음을 포함한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환난과 궁핍을 다 안다고 하면서도 \\\"그래, 수고 많았다. 그만하면 이제 되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복 된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 중에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예수를 마음대로 믿을 수 없을 때였습니다. 그가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도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11명의 교인이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폴리캅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다가 잡혔습니다. 주후 156년 2월 22일, 그때 폴리캅의 나이는 86이었습니다.

로마의 총독은 평소 폴리캅의 인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폴리캅의 나이가 너무 많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권유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만은 거짓말로라도 가이사가 신이라고 한 마디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풀어 주겠소. 일단 풀려난 다음에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예수를 믿으면 어떻겠소?\\\"

그러자 폴리캅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는 한 번도 나를 서운하게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잠깐 편하자고 주님을 서운하게 한단 말이오?\\\"

\\\"아니, 정 그러면 당신은 천상 저 타오르는 불 가운데로 던져지게 될텐데 저 불이 무섭지도 않소? 제발 한 마디만 하시오. 그러면 살려주겠소.\\\"

\\\"잠깐 뜨거우면 끝날 불이 무서우면 영원한 불은 어떻게 하란 말이요?\\\"

그때 하늘에서는 우렁찬 음성이 들렸습니다. \\\"폴리캅,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폴리캅,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폴리캅만 그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음성을 들었다고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교회의 역사에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화가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신사 참배에 반대하다가 잡힌 교인 중에 이기선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신사 참배를 하라고 아무리 협박을 하고 회유를 해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이기선 목사를 심문하던 형사가 물었습니다.

\\\"이봐요, 목사 양반. 아무리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도 좋지만 우리 천황께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 다 죽이라고 했소. 대체 어떻게 하시겠소?\\\"

\\\"천국 법도 지키고 나라 법도 지켜야죠.\\\"

\\\"그게 무슨 소리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으라 했으니 예수를 믿고, 신사 참배 안 하면 죽인다 했으니 죽으면 될 것 아니요?\\\"



참으로 면류관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는 면류관을 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면류관을 받는다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당시는 운동 경기가 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마다 경기에서 이긴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당시는 로마가 세계 최강대국이었으니까 개선 행진도 수시로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개선 장군에게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 면류관이 주어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면류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 쓸 수 있습니다. 경기에서 이긴 사람, 주어진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만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면류관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그 자격이 생기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거룩한 날, 성일 허락하셔서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게 하셨사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바라옵기는

저희들 아버지를 예배할 때마다 저희의 마음과 생각이 오직

하늘 아버지만 앙망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저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일이 결단코 있지 않게 하옵시고

저희들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우리의 우리 된 모습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오라

오직 다시 올 그날을 소망하면서

그때의 모습으로 우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저희의 영안을 열어 주시옵소서.

저희의 귀를 열어 주셔서

하늘 아버지의 신령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옵시고

정녕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옵소서.

혹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방해받는 일이 없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