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것 없는 교회 사41:14-20,눅17:5-10
오늘은 우리교회가 9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90년 동안 이 교회를 지켜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90년 전 지금의 재동인 홍술해골 김창제 선생댁에서 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린 3월 첫주일은 7일이었는데, 90년 후인 3월 첫주일도 7일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1909년은 나라가 대단히 어려운 때였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북촌의 어른 몇 분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시작된 교회가 우리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기울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길은 교육과 신앙의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박승봉 유성준 장로님은 1908년 지금의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인 기호학교를 세웠고, 그 이듬해인 1909년에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당장 나라를 되찾을 수는 없다고 본 이분들의 이런 판단은 참으로 옳았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기관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억압과 착취, 불의와 불평등에 맞서서 자유와 평화, 사랑과 섬김을 펼쳐가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며 목적이라고 볼 때 이 교회는 제대로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런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만큼 성장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90년이란 세월 속에서 우리 교회가 과연 이런 교회의 사명을 얼마나 제대로 감당하여 왔는지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점검되어야 할 것입니다.
115년밖에 안된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 비하면 90년은 비교적 오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역사가 중요한 것은 그만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이 교회가 성숙되고 그 본래적인 사명을 수행하였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90주년을 맞이하면서 냉철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과연 우리는 자랑할만한 교회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 역사에 비해 오히려 성장하지 못한 교회로 오늘에 이르렀기에 어떻게 보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신생교회들이 대형교회로 성장하여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모습에 비한다면 안동교회는 너무 초라할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크기보다는 제대로 교회다운 교회가 되었는가가 문제라고 볼 때 우리의 부끄러움은 큰 교회가 되지 못하였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지만 제대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였다면 거기에 자랑할만 것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자기 교회들을 자랑하지만, 교회 자랑은 어리석은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랑은 사람들이 꾸며 놓은 그 무엇을 내세우는 것이기에 바로 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이건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라면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룩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할 일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9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람들이 이룩해 온 자취에서는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부끄러운 일만 발견할 뿐입니다. 교회들이 역사를 집필하면서 공통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는 사실을 그대로 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그대로 쓸 때에 너무 부끄럽고 덕스럽지 못한 일들이 그대로 노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부끄러운 역사와 관련된 장본인이나 그 후손들이 살아 있을 때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그런 부분은 삭제하거나 얼버무리거나 미화하여 사실을 왜곡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에 덕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의 바탕에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자기의 교회로 여기고 있는 이기심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몇대에 걸쳐 이 교회에 출석한 교인들이 있지만, 안동교회가 그분들의 교회는 아닙니다. 안동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그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워진 교회임을 우리가 분명히 알 때 지난 역사 속에 나타난 부끄러운 일들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면서 앞으로 제대로 하도록 반성의 계기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훌륭한 신앙의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 출애급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 왕국의 기초를 놓은 훌륭한 왕 다윗, 이들은 모두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중심적인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역사에는 이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 자기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했다가 망신당한 일,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일 등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도 젊었을 때 혈기왕성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하였던 일 때문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던 일, 거기서 40년을 은둔하여 살았고,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서도 자기의 약함을 내세워 거절하였던 일,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어 광야로 나아가 잘 인도하다가 물이 없다고 아우성 치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서 반석을 두 번 내리치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던 일은 모세의 위대한 생애 가운데 오점으로 남겨진 역사들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자기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 죽여버리고 그 여자를 찾이한 일, 그로 인해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쫓겨 나간 일은 너무나 큰 오점으로 남은 역사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일들은 생략하고 성경을 기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므로, 우리로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하도록 이끌어 준 것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신앙이 뛰어나고, 모세의 영도력이 뛰어나며, 다윗이 참으로 훌륭한 신앙이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능력을 더하여 주시므로 이룩한 일이기에 결국 그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치는 것입니다.
우리 안동교회 90년의 역사 속에도 부끄러운 역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창립주일 때마다 훌륭한 몇 분의 신앙 선조들의 업적을 위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만, 오늘은 우리 역사 속에 남은 부끄러운 일들을 들추어내므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안동교회가 우리의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로 더욱 확고하게 서가는 계기로 삼으려 합니다.
안동교회 초대 목사로 한석진 목사님이 오셨는데, 이 분은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가운데 한 분으로 가장 진취적인 분이었습니다. 오시자마자 바로 교회당 건축을 시작하시어 1912년에 2층 벽돌집을 완성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건축이었습니다. 그의 목회는 당시로서는 개혁적이고 과감한 것이어서 교인들이 미쳐 따라가지 못하였지만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1914년 어느 날 한목사님은 안동교회를 훌쩍 떠나버리셨던 것입니다.
\"일부 교인들 중에서 그의 재래의 인습과 규례를 무시하고 주위를 꺼리지 않는 급진적이며 독재에 가까운 일처리 방침이며 그리고 사소한 신변문제로 불만을 품고 은근히 자기를 반대하는 기색이 있음을 알게 되자 그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과 성미를 죽이고 일할 사람을 꼭 원 하면 하나님께 그런 사람을 구하여 주시기를 새로 주문하시오]하고 곧 교회를 떠났다.\"
여기서 \"사소한 신변 문제\"란 한석진의 장남인 한민제(韓民濟)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 인사동에서 대한의원을 개원하고 있던 한민제는 어려운 아버지의 생활을 경제적으로 돕기는 했으나 자유분방한 생활 특히 도박에 몰두하므로 아버지의 속을 상하게 하였고, 이것이 교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한석진은 주저하지 않고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안동교회의 첫 번째 시련이었습니다.
안동교회가 교회당을 건축하였을 무렵인 1912년에 교회 앞 큰집에 윤치소 장로님이 이사를 오셨습니다. 물론 그 때는 아직 장로님이 되시기 전입니다. 친구분인 이주완 장로님이나 한필상 장로님의 권유로 교회에 나오시기 시작하였고, 그러면서 아주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셨습니다. 중간에 한석진 목사님이 그만 두시게 되자 더욱 교회를 잘 섬기셨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 나오자마자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셨고, 1917년 교회에 나오신지 5년만에 이주완 유창겸과 더불어 장로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젊은 층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윤상훈을 비롯하여 유진혁(兪鎭赫, 유호준 목사의 선친), 서정우(徐廷瑀, 서장석의 선친), 이정섭(李晶燮) 등입니다. 이들의 불만은 안동교회에 온지 얼마 안된 윤치소 집사가 장로로 피택된 데에 있었습니다. 그의 재력을 보고 장로를 시켰다고 그들은 불평하였고 곧 안동교회를 떠났습니다. 그중 윤상훈은 갓 설립된 하교교회로 가서 후에 장로가 되었고, 유진혁은 아주 교회를 떠나 만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윤치소 장로님의 장립은 훗날의 역사에서 돌이켜 볼 때 초기 안동교회를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안동교회를 위하여 교동에 사시던 그 댁을 안국동 8번지로 이사하게 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윤장로님은 1944년 돌아가실 때까지 안동교회를 일제 총독부의 여러 간섭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하셨던 것입니다.
1927년 김우현 목사님 부임하시면서 안동교회는 체계가 잡히고 여러 면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929년 처음으로 창립 기념일을 정하고 20주년 기념예배와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청년들이 나와서 열심히 활동을 하였고, 이윤재 장로님을 중심으로 시온회가 조직되어 눈부시게 활동을 하였습니다. 젊은 목사를 중심으로 청년들이 열성적으로 교회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열심은 1930년 여름까지 계속되다가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시온회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던 이억길을 담임 목사가 치리하여 출교(黜敎)한 사실에 대하여 젊은이들이 반발을 하여 교회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그를 출교한 것은 그가 같은 교인인 유부녀와 일으킨 스캔들 때문이었는데, 청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유산 계급(부르주아)을 두호해서 프롤레타리아인 가난한 청년을 좇아낸다\"고 항의하면서 다른 교회로 나가버렸던 것입니다. 잘 나가던 김우현 목사님에게 이것은 큰 시련이었습니다. 청년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목사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이 때 상당수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므로 사실상 [시온회]는 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우현 목사님을 도와 교회를 섬기던 이윤재 장로님 이 사건 후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당회 서기로 교회를 잘 섬겼는데, 1933년 봄 일어난 벚나무 사건 때문에 결국 안동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1933년 봄 안동유치원 졸업생의 아버지가 졸업기념으로 벚나무 20그루를 기증하자 김목사님은 별 생각없이 그것을 예배당 뜰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이윤재 장로님 김목사님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왜 하필 왜놈의 꽃을 교회 마당에 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창경궁에 \'사꾸라\'를 심은 뒤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그였기에 예배당 마당에 \'사꾸라\'를 심는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일 때문에 가까웠던 김 목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였고, 결국 안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로 옮겼으나 유억겸의 권유로 다시 안동교회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교회는 큰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김우현 목사님이 안동교회를 떠나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임병철 장로님 때문이었습니다. 임병철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편집국장까지 하게 된 유능한 일꾼으로 기회가 되면 일본에 건너가 신학교에 유학하려고 하였던 분이었습니다. 1936년 7월에 그가 장로로 피택되자 장로로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생각을 바꾸고 1936년 12월 노회에서 장로 시취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우현은 곧 유학을 떠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장로가 되려고 하느냐 하며 만류하였으나 본인이 고집하기에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면접할 때 시찰장 김익두 목사와의 문답에서 직장 때문에 성수주일(聖守主日)을 할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불합격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임병철은 김우현의 반대로 불합격된 것으로 오해하면서 매일 새벽 6시에 모이던 성경공부도 흩어지고 신학 유학도 포기하여 버렸고 결국 그는 김목사 반대 운동을 하게 되었고, 이래저래 김우현 목사님은 교회를 떠날 생각을 굳히고 1939년 3월 안동교회를 떠나신 후 오랫동안 교회 목회를 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1953년 장로교가 기장과 예장으로 분열되면서 안동교회는 1955년 11월에 기장 경기노회로 가기로 결정을 하였는데, 이에 반발한 방순원 장로는 새문안교회로 옮겨갔고, 권사님들이 당회에 진정서를 내어 중립으로 있을 것을 진정하였으나 그대로 기장에 머물러 있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당회가 불신임을 받게 되었고, 1959년 7월에 장로시무투표를 실시하여 네 분이 장로 시무를 그만 두게 되고 안태인 이해동 두 분만 남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장로 시무 투표는 오덕유 목사님 때인 1964년에도 실시되어 장로 전원이 시무를 그만 둔 적도 있었습니다.
1961년 7월에 예장으로의 복귀와 이금식 목사 절대 지지한다는 247명 교인의 연명 청원서가 작성되어 당회에 제출되었고, 기장으로 가야한다며 이 목사님을 반대하는 사람과 예장으로 가야 한다며 이 목사님을 지지하는 교인들로 나뉘어 한 동안 교회가 시끄러웠던 것입니다. 결국 1962년 안동교회는 예장 경기노회로 복귀하였으나 그해 12월에 이금식 목사는 사임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동교회 역사 속에 여러 가지 부끄러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이 교회는 90년의 역사를 기록하며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인간의 잘못에도 하나님은 그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며 그의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허물과 실수와 과오가 있음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할 때까지 하나님이 보전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역사의 부끄러운 점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칫 교회의 자랑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려 하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에서 보듯이 교회는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한 후에도 다만 \"무익한 종일 뿐\"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버러지 같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이사야서 말씀을 아울러 우리가 기억하면서 90주년에 우리가 이룩한 조그마한 업적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룩된 것이기에 그에게 영광과 찬양을 돌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역사에서 잘못한 점들을 찾아내어 기록하고 기억하여야 할 이유는 우리가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깨어지기 쉽고 실패하기 쉬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90년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교회를 이끄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였던 80세 된 모세를 부르셔서 민족 대이동의 지도자로 삼으셨던 하나님은 자랑할 것 없는 90년의 역사를 가진 안동교회를 부르셔서 21세기 하나님의 역사를 같이 협력할 역군으로 세우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앞으로도 안동교회는 자랑할 것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뿐입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을 하고도 주인의 저녁 시중을 드는 종과 같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이 시대적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면서도 늘 겸손하게 또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앞으로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로 항상 우리의 자리를 지켜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90년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난날들의 부끄러움을 교훈 삼아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은 판단을 따라 행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 말씀을 좇아 바른 교회, 마지막 날에 칭찬 받을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