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을 아십니까? 눅15:20
오늘 저희 교회 창립12주년 기념 홈컴밍데이에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메시지를 시작하기 전에, 음악 한 곡을 먼저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들으시고 누구의 노래인지, 제목이 무엇인지, 그리고 노랫말이 어떤 내용인지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부른 노래인지 아십니까? ‘프레디 아귈라(Freddie Aguilar)’라는 가수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만, 그는 필리핀출신으로 긴 머리에 통 키타 한 대 달랑 메고 1970년대에 많은 대중가요를 히트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면 이 노래 제목을 아십니까? ‘아낙(Anak)’이라는 제목의 노래입니다. 노랫말이 영어도 아니고, 한국말도 아니고 천국방언인가 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필리핀의 타갈로그어(Tagalog) 노랫말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노랫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적인 갈등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그 노래는 한국의 시각장애 가수 이용복씨에 의해 ‘아들아’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곡입니다. 그리고 일본어, 중국 광동어, 말레시아어, 중국 만다린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영어, 네덜란드어, 등 많은 나라 말로 번역되어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적이 있습니다. 잠시 그 노랫말을 소개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태어나던 그날 밤, 우린 모두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 사랑스런 나의 아들아, 천사 같은 너의 모습을 우린 언제나 보고 있었지. 엄마는 밤새워 애태우며 네 우유를 데워 주었지. 아빠는 온종일 네 곁을 감싸며 지켜 주었지. 너는 어느새 자라서 자유를 달라고 했었지.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졸랐지. 사랑하는 아들아, 변해가는 너의 모습에 우린 너무나 가슴 아파했지. 엄마 아빠의 마음에 아픔을 남기고 너는 떠나 버렸지. 지금 네가 가는 그 길은 거칠고 험한 길이지 갈수록 험하고 나쁜 길이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너도 이젠 후회하겠지. 엄마는 언제나 울고 있단다. 너도 이제는 후회의 눈물이 두 눈에 고여 있겠지. 너도 이제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겠지. 너도 이제 후회의 눈물이 두 눈에 고여 있겠지.“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적인 갈등을 표현한 이 노랫말이 필리핀 사람의 특유 리듬과 함께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는 이 노랫말을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잘 그려 놨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는 부모님의 기쁨이 되었지만, 자라면서는 서서히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나중에는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이 노랫말은 우리 인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프레디 아귈라’의 ’아낙‘이라는 노랫말과 같은 이야기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에 바로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본문을 보통 ’탕자의 이야기‘라고 하는 말합니다만, 사실은 ’탕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아들의 관점에서가 아닌, 아버지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집나간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이 속한 누가복음 15장에는 3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둘째는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셋째는 오늘 본문인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언뜻 보면 잃어버린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잃어버린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찾고자 하는 주인, 혹은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잃은 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느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앞으로 자신이 받게 될 재산을 미리 달라고 당돌하게 말했습니다. 원래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상속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겠다는 것입니다. 불효자도 이런 불효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뜻 둘째 아들에게 그의 몫을 나눠주었습니다.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많은 돈으로 흥청망청,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재물이 많았을 때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있는 돈 다 날리게 되자, 전부 떠나갔습니다. 재물을 모두 날린 그는 갈 곳 없어 어떤 사람의 집에 빌붙어, 겨우 돼지 돌보는 일을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15~16절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처량한 신세가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배가 너무 고파서 돼지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자식이 부모님을 떠난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모님을 떠날 나이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떠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면 인생이 비참하게 됩니다. 아마 제가 12살인가 13살 때로 기억이 납니다. 그 때가 방학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누나,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는 식사 자리에서 제가 방귀를 꾸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빨리 제 손을 엉덩이에 댄 후, 뒤에서 배출된 가스를 제 손으로 받자마자 어머니 입에 가져갔습니다. 얼떨결에 식사자리에 일어난 해프닝에 아버지, 어머니가 깜짝 놀라셨습니다. 저는 웃자고 한 행동이었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숟가락을 놓으시면서 “너, 지금 무슨 행동을 그 따위로 하는 거니?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을 하는 거야. 이 에미가 그렇게 가르쳤니?”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웃집에 사는 친한 친구가 자기 어머니에게 하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모방한 행동이었는데,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때 어머니께서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고 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침밥을 먹는 도중에 훌쩍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처음으로 가출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아침밥을 먹는 도중에 집을 나왔으니까 아마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약12시간 동안 가출했습니다. 아침밥 몇 스푼 먹은 이후로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은 먹지 못하고 저녁 8시까지 있다보니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이 홧김에 집을 나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저는 하는 수 없어서 저녁 8시에 집에 다시 들어가면서 그 때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가출하면 배만 고프고 나만 손해다. 죽어도 가출은 하지 말자. 부모님께 야단을 맞더라도, 부모님으로부터 혼이 나더라도 부모님이 나를 내보내시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떠나지 말자.” 왜 그렇습니까? 부모님 곁에 붙어 있는 동안 배고픔의 문제는 해결되지만, 집 떠나면 먹을 것 먹지 못하고 고생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가출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가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부모님을 떠나면 잘 살 수 있다고 자꾸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면 인생은 비참해집니다. 물론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허구헛날 술 먹고 욕하고 때리고 부수고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진짜 본성은 참 좋은 분입니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아버지들은 속으로 안타까워하고 뒤에서 눈물 흘리고 혼자서 고민하는 분들입니다. 아들이 비뚤어질 때 속으로 마음 아파하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말씀은 단 한 절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의 세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기다리시는 아버지(Waiting) 첫째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갈 마음을 먹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거지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20절을 NIV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So he got up and went to his father.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for him, he ran to his son, threw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 NIV 영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들이 아직 집에 가까이 오지 않았음에도,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불쌍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들을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다.\' 여기 \'아들이 아직 집에 가까이 오지 않았음에도\'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아직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지만 그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태임에도 아버지는 저 멀리에서 오고 있는 사람이 집나간 둘째 아들임을 금방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집을 나간 뒤부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아들이 평생 동안 피땀 흘려 모아놓은 자기 재산을 빼앗다시피 받아가지고 집을 나간 아들이었지만, 자기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있음에도 당돌하게 미리 유산을 나눠달라는 아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그날부터,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아버지의 눈에는 저 멀리에서 오는 그 사람이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유대인들의 이야기 중에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어머니와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딸이 가출했습니다. 10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딸이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기를 받아주실까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캄캄한 밤중에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집 안 밖으로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딸은 집 가까이 접근하여 대문을 살짝 밀어보았는데, 대문이 ‘삐그덕~’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대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딸은 집안에 들어가 눈물을 흘리며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다시 돌아온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네가 집나간 뒤로, 밤마다 불을 켜두고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그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멈추고 세상길로 갔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나간 뒤로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2) 측은히 여기시는 아버지(Compassion) 둘째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측은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다같이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집나간 둘째 아들이라는 확신이 들자, 아버지 마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기 ’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compassion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망만 잔뜩 안겨주고 떠났던 아들이 괘씸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의 모습에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측은히 여겨주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측은히만 여기고 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한 숨에 달려간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 다시 돌아온 아들을 얼싸안고 목 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아들아 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네 모습을 보니까 고생을 정말 많이 했구나? 네 얼굴을 보니까 밥도 먹지 못하고 살았구나? 그래 잘 왔다. 이 얘비는 네가 떠난 후부터 얼마나 너를 보고 싶었는지 아니? 네가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너는 아니? 그래 잘 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래 잘 왔다.“라고 하면서 아들의 얼굴을 비비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언제 샤워를 했는지 모를 정도로 냄새가 진동하는 아들의 모습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언제 머리를 잘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도 상관하지 않고 측은히 여겨주었습니다. 여러분, 둘째 아들을 측은히 여겼던 이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측은히 여겨주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측은히 여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가 실패하여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김집사야, 이집사야, 그 동안 힘들었지? 고생이 많았구나? 남편도 없이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지? 내가 다 안다. 네가 부모님 떠나 물설고 낯 설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유학 와서 어려운 영어로 힘들게 공부하는 것, 내가 다 알고 있어? 이민 와서, 한국에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힘든 일을 하는 것, 내가 다 알고 있어.”라고 측은히 여겨주십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를, 여러분들을 측은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용서하시는 아버지(Forgiveness) 셋째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다같이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향해 달려가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원래 원어는 입을 한번만 맞춘 것이 아니라, 맞추고 또 맞추고 계속해서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내가 너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중요한 사실은 아들이 용서를 빌기도 전에 아버지는 이미 용서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하겠다고 결정해 놓고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둘째 아들을 용서하셨던 이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용서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유대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고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셨습니다. “과연 인간들을 창조하는 것이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공의를 주관하는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여, 인간들을 창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끊임없이 불의한 일들을 자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거룩을 주관하는 천사도 거들었습니다. “저도 인간들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끊임없이 음란과 부정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던 정직을 주관하는 천사도 말했습니다. “인간들은 거짓을 좋아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조차 속이려 할 것입니다.” 이때 세 천사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랑을 주관하는 천사가 말했습니다. “물론 인간들은 공의롭지 못할 것이고 거룩하지 못할 것이며 정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최선을 다해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용서를 주관하는 천사도 거들었습니다. “저는 인간들이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천사와 용서의 천사의 말을 듣고 인간을 만들기고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의 전설입니다만,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들의 불의함보다도 더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55장 6절과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아버지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오는 자를 널리 용서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더라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고 용서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는 아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 완전히 변한 모습을 보고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역겨운 냄새가 물씬 났지만, 신발은 다 털어졌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불러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혀주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가락지는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은 종의 하나로 받아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아들로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너무 너무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님 곁을 떠났던 영혼이 다시 주님 앞에 나오면 하늘나라에서 큰 잔치를 벌이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러한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노란 손수건\'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The Reader\'s Digest)>에 실린 적이 있는데, 짧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마 읽어보셨든지,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광활한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버스에 가득 탄 젊은이들이 즐겁게 떠들고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창밖만 보고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청년을 발견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젊은이들은 그 청년에게 커피와 도너츠를 주면서 말을 붙였습니다. 이윽고 여러 가지 호의에 감동된 이 청년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청년은 고등학교 때 집에 있는 거액의 돈을 훔쳐서 무작정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먼 곳에 가서 얼마 있지 않아 훔쳐온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도둑질을 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이 청년은 거기에서 비로소 그가 부모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깨닫고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의 잘못을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용서해 주지 않으셔도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감옥에 있다가 출감하는 날, 고속버스를 타고 집 앞을 지나갈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께서 저를 용서하고 다시 아들로 받아주실 마음이 있으시다면, 집 앞의 큰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한 장 매어 달아 주십시오. 그러면 내려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럴지라도 저는 아버지를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집으로 보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만기가 되어 감옥에서 나오게 된 이 청년이 지금 고속버스를 타고 자기 집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모든 승객들이 숙연해져 있는 상태에서 드디어 버스가 그 마을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차마 고개를 들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버지 집 앞에 있는 큰 나무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서서히 커브를 돌면서 마침내 그 청년의 집이 저만큼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을 때, 모든 승객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노란손수건이 달려 있는데, 한 장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 가지마다 노란 손수건이 달려 전체 나무가 노랑색깔로 물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것도 모자라 그 앞에 어떤 노신사가 엄청나게 큰 노란 깃발을 들고 버스를 향해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청년의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버스 승객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타고 가던 버스가 멈추어 서자, 그 청년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버스에서 내렸고, 노란 깃발을 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버스 승객들은 꼭 껴안고 울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마치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후부터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돌아오너라! 얘야, 어서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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