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눅11:5-10
교회 창립 20주년을 맞아서 그 20년 전에 설교하던 저로서 오늘 여전하게 하나님의 주신 건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 나누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인도의 어느 한 수도사가 갠지스 강변에 앉아서 수도를 하고 있는 중인데 힘이 다 빠져 떠내려가는 전갈을 한 마리 발견한 것 같습니다. 물도 좀 탁한데 떠내려가는 전갈이 모든 다리를 뻗어버린 채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수도하는 사람은 어떤 소신을 갖고 어떤 철학을 연구하고 수도하고 있었는가 하면,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죽어가는 것은 살려야 한다 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누구든지라고 하는 것은 밉든지 곱든지, 또 무엇이든지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던지 아니면 징그러운 지렁이가 되었던지 그런 것 따질 것 없이 생명 가진 것이 죽어간다면 살리는 것이 마땅하다 라는 생각으로 전진하고 있었던 사람인데, 마침 힘 빠져 떠내려가는 전갈을 보고서 살려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 얼른 나무막대기를 하나 주어서 힘껏 뻗어서 그 전갈을 그 나무에 붙게 했습니다.
힘 다 빠져 죽어가던 놈이 자기 앞에 나무막대기가 오니까 겨우 기어 올라타 가지고서 가까이 가까이 이제 올라옵니다. 그래도 혹시나 떨어질까바 조심해서 끝까지 살아나오도록 기대를 하고 있는데 이놈의 전갈이 이 수도사 손 잡은 막대기에 끝까지 오더니 그냥 기어올라오면 될텐데 수도사의 손가락 끝을 물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아팠던지 그냥 자기도 모르고 이렇게 떨쳐버렸는데 이 전갈이 또 저 멀리서 떠내려옵니다. 위로 던져졌는데 또 이렇게 떠내려옵니다. 그러면서 손이 아파서 애를 쓰니까 지나가는 행인이 모두 이 장면을 보고 서서 하는 말이 \"여보시오 당신 미쳤소이까? 그 전갈이 당신을 무는데 물줄 몰라서 그 전갈에게 막대기를 던지는 겁니까? 또 그놈의 전갈을 건지려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려야 된다는 생각으로 또 막대기를 되떠내려오는 전갈에게다 붙였습니다. 그 전갈은 또 올라왔는데 다 올라오기 전에 또 손을 물어서 이제는 손이 퉁퉁 부어옵니다. 또 물었을 때에는 이제 떨쳐버리지도 아니하고 퉁퉁 부어가면서 자기 손등까지 올라오게 해서 결국은 안전하게 육지로 와서 이제 기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얼굴 색깔이 새까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몸이 퉁퉁 붓기 시작합니다. 그때 둘러섰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시오. 우리가 뭐라고 합디까. 그놈의 전갈을 왜 건져냅니까?\"라고 모두 책망하듯 안타까운 심정으로 어쩌면 죽을 것같은 이 수도사를 향해서 말들 하게 되었을 때 이 수도사가 말하기를,
\"전갈의 무는 것은 그의 특징이요 나는 죽어가는 놈을 살리는 것이 나의 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할 일을 다했을 뿐이요. 전갈이 무는 것이 자기 사명이기 때문에 자기 사명 무는 것을 한 것처럼 나는 저 죽어가는 전갈을 살리는 것이 내 사명이기 때문에 살리는 것 뿐이요.\"라고 말하고는 그냥 푹 꼬꾸라져 죽어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 같습니다마는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이 수도사같은 자세는 꼭 누구의 자세와 같으냐? 우리 주님의 자세와 방불하다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곧 자기를 보내시면서 \"너는 가서 사랑하라.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라.\" 이 명령을 주어서 내려보냈습니다.
이 명령을 받아 내려온 예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명령이 사랑이었기 때문에 나를 만나는 사람이 다 친한 사람이든지 나를 잡아죽이려는 원수든지 그것은 따질 것 없고, 나는 무조건 사랑하리라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도 사랑하고 주님을 원수처럼 여기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다보니 자기가 환영만 받은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그 사랑 때문에 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자기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미운 사람이든지 고운 사람이든지 그게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아버지의 아들이면서도 이 세상 올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종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기 때문에 상대가 누가 되었던지 자기에게 유익 불유익 그런 것 상관없이 모두를 사랑하다가 그의 생애를 마친 그런 모습을 우리가 바라보면서, 그러한 주께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신바 그의 종들에게 또한 바라신 것이 무엇이냐?
17장 7절서부터 10절까지의 말씀으로 그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라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권면하고 계신 겁니다.
종이라면 그 종이 주인의 밭을 다 갈고 해가 졌을 때에 들어오면 주인이 그 종더러 \"수고했구나. 얼른 올라와서 저녁 식사하라.\" 차려놓고 권하겠느냐는 겁니다. 땀을 다 흘리고 진하여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늦었구나. 내가 배고프구나. 우리 주인의 가족들을 위하여 상을 차리고 그리고 허리에 띠를 띠고 우리가 다 먹는 동안에 물도 떠다 나르고 찬거리도 더 가져오고 수종들라. 그리고 우리가 다 식사한 후에 네가 먹든지 말든지 하라.\"
그리고 그 주인이 그렇게까지 다 한 종을 향하여 사례하겠느냐? 그렇게 다 충성한 그 종이 그 주인에게 대하여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겠느냐? 진정한 종이라면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나는 이 일에든지 저 일에든지 무익한 종이라. 유익을 구할 수 없는 다만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다만 한 것 뿐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참 종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무엇을 경계해서 이토록 자기 할 일 곧 시킨 것만 하고 시킨 것 외에는 아무 말 말라 하고 계신 것일까요? 주인이 시킨다면, 그의 종이라면 자기가 죽든지 말든지 하고 싶든지 말든지 그 자기가 하는 일을 베풀어서 유익을 얻을 사람이 자기에게 곱든지 밉든지 따질 것 없이 주인의 명령만을 생각하고 시킨 것만을 순종하고 다하고 난 다음에도 아무 것도 바라지 아니하는, 아니 바랄 수 없는 그런 자가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이 말씀 하신 이유는 제자들의 그 17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모습을 보고서 그와 같이 경계했습니다.
제자라면 나의 종이라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경계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고 하니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네게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주인으로서의 명령은 무엇이냐? 하나도 용서요 둘도 용서요 한 번도 용서요 일곱 번도 용서요 일흔 번의 일곱 번도 너희는 용서할 것이니라. 용서만 하면 실족치 않을텐데 너희가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된다면 그는 실족케 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아이라고 하는 것은 곧 성도들 중에 신앙이 어리고 그리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기에는 아직 능력이 부족한 그런 자를 가리켜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대할 때 너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야말로 너희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 덮어주고 또 덮어주라.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은 용서뿐이니라. 그러므로 용서 외에는 다른 일을 맡기지 않았다 그런 것입니다.
용서만 명하였으니 용서만 하고 용서를 하되 하고 싶은 자에게 용서하고 하기 싫은 자에게 아니할 것이 아니라, 너의 체면이 무슨 상관이며 상대에 따라서 하고 말고 할 것이 무엇이냐? 종이란 것은 주인이 시키면 원하든 원치 않든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용서 또 용서 일곱 번 용서 용서할지니라. 그 외에는 너희에게 아무 것도 맡기지 아니했느니라. 아무 말도 말지니라. 그것은 너희의 권한 밖이니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건만 5절로 6절에 보면 이 제자들이 묘한 말씀으로 주님을 괴롭힙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용서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종으로서 용서하는데 믿음이 더 필요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능력을 더하소서\' 이런 뜻도 되겠습니다.
진정 종이라면 주인에게 무엇인가 주시는 대로 받아 나와서 그 받아 나온 것 가지고 하라는 것 그냥 하는 것이 종일진대 \"능력을 더 주소서. 기구를 더 주소서. 나 무엇 좀 더 할랍니다.\" 이것이 종이 가질 수 있는 자세냐 그말입니다. 종은 그럴 수 없는 겁니다. 종은 주인이 정해주는 것이 자기의 한계가 되어야지, 자기의 기분을 따라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겁니다.
겐지스 강변에 앉았던 수도사가 살리는 것이 사명이라면 자기가 죽든지 말든지 살리는 것 하다가 죽는 것이 참 수도사의 할 일이요, 사랑을 명 받고 내려오신 주님께서 주님을 좋게 여기든지 밉게 여기든지 심지어 죽이려는 자든지 상관할 것 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시는 바로 이런 주님. 제자들도 그리해야 될텐데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주께서 일 맡기시면서 그 일할 사람에게 그 일할만큼 능력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더이상의 믿음이 필요없는 겁니다. 더 이상의 능력이 필요 없는 겁니다. 그러나 더 달라 라고 합니다. 더 받아서 더 갖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5절로 9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천국을 전파하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종으로 내어보내실 때 일 시키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도구를 주지 않고서 내어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일을 맡겼다면 그 일을 감당할 만큼 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소개해 드린 이 인용의 성구를 보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받은 것 선에서 거저 주어라.\"라고 했던 겁니다.
이 열 둘뿐만 아니라 또한 70인에게도 마찬가집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달리 70인을 내어보내었는데, 이 사람들이 나가서 사역을 해 보니 놀랍게도 귀신이 항복하고 병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서 기뻐서 주님 앞에 와서 놀라운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역시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을 권세를 나갈 때 주었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일하러 내어보내면서 장비를 주지 않고 보낼 주인은 없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든지 종들에게 일을 시켜 장에 가서 무엇 무엇을 사오라 라고 할 때에 돈 안 주고 사오라는 주인은 없습니다. 사 올만큼 돈을 반드시 주어서 사오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에는 그 일을 감당할 만큼은 충분히 능력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70인처럼 능력이 안 온 것처럼 생각하고 갔지만 현장에서 일을 해 보면 맡기신 일을 감당할 만큼은 이미 능력이 와 있었다 그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은 용서하라는 명을 받고서 용서말고 무엇을 더하고 싶었는지 \"믿음을 더하소서.\" 그랬어요.
아주 당돌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아주 속이 상하셔서 하신 말씀이 6절 이하에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히어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제자들의 이같은 자세를 볼 때 용서하라는 명령 내렸으면 용서만 하면 될텐데 용서 안 하는데 무슨 능력이 더 필요하며 무슨 믿음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 시킨 대로 하면 되는 것인데.
그런데 믿음을 더하소서, 다른 말로 하면 능력을 더하소서 했던 것이지요. \"너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면 너희에게 권능을 주면 너희는 멀쩡하게 뽕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가서 심기우라 할 자들이다.\" 뽕나무가 뽕밭에 있어야지 바다에 심기우면 살겠는가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해변가에 뽕나무가 있어서 해풍에 뽕나무 잎이 구멍이 나고 못쓰게 되었을 때 그 능력을 받아서 차라리 \"이 뽕나무를 저 뽕밭에 가서 심기우라 하기를 원합니다. 능력주소서.\" 이렇게 해야 될텐데 이 제자들은 서로 이 앞장에도 보면 \"누가 크냐?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이렇게 다투던 자들이었습니다.
너희에게 능력을 주었더면 너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가서 심기우라 했을 것이라. 그러니까 이 뽕나무는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뽕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뽕나무입니다. 뽑혀서 바다에 가서 심기우라.
너희가 능력을 받아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이니라. 너희가 큰 직분을 가졌으니 그렇게 정죄하면 되는 것이니라. 너희가 교회로서 교회 권세로서 땅에서 매면 옳거나 그르거나를 따지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교회 권세로 풀면 하늘에서도 풀 것이다 했으니,
내가 너희에게 능력을 더 주면 너희에게 믿음을 더 주면 너희의 자세를 놓고 볼진대 뽕밭에서 잘 자라고 있는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가서 심기우라 할 자들이라. 너희는 너희를 자랑하고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준 사명이 무엇이냐? 용서가 아니더냐. 그것 말고 너희가 더할 것이 무엇이냐?
주인이면 일 명할 때에 필요한 장비와 능력을 주실 것이요, 참다운 종이라면 주인이 주신 대로만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의 자세와 그 위치는 무엇이냐? 주신 대로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넘치는 것은 더욱 문제라는 것입니다. 안 하는 것은 게을러서 안 하는 것입니다마는 넘치는 것은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는 월권이 된다 그것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와 다섯 달란트 받은 자 그들은 받은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최선을 다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모두가 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회계하고 보고를 드릴 때 주인은 어떻게 했느냐?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또 다섯을 남겨 열이 된 사람에게 \"너는 열 배를 주노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이여,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참으로 기쁘도다. 나의 기쁨의 잔치에 네가 들지어다.\"
이 내용이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나타나 있는데, 또한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를 남겨온 사람에게도 주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칭찬과 보상을 똑같이 해 주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하나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많은 것을 받아서 많이 했으니 천국 가서 상급이 많겠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회계하고 상을 주실 때는 많이 했다고 많이 남겼다고 많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다 했으면 그에게 대하여 주시는 상급은 똑같다 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물론이요 이 세상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 잘 돌아가지만, 자기의 받은 바를 넘치게 된다면 이것은 불행이 생기는 겁니다. 분쟁이 생기는 겁니다. 질서가 유지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는 누가 훌륭한 자냐?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자가 훌륭한 자입니다. 사단은 누가 사단입니까? 자기의 위치를 떠난 자가 사단입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가 곧 사단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유다서 1장에 보면.
주께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두 달란트를 미리 줄 때에 그에게서 바란 것이 얼마였겠습니까? 두 달란트였습니다. 그가 만일 두 달란트만을 주면서 두 달란트를 남겨오기 바랐는데 의외로 다섯이나 열을 남겨왔다면, 너 무슨 능력으로 이것을 해 왔느냐고 할 겁니다.
주인은 주신 것 외에 더 바라지 않습니다. 종은 시킨 대로만 하고 그리고 그 무엇도 바라지 않을 때 종으로 여기는 겁니다. 다섯 달란트 준 자에게 다섯 달란트 이상 기대한 것이 아니었지요.
이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로서 받았으나 아무 일도 아니한 게으른 한 달란트의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두 달란트를 받았던지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지 하나님께서는 그 주신 대로만 일 해오면 그것을 만족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누가복음 17장 5절의 제자들은 어떠한 모습이었습니까? 무조건 용서만 하면 될텐데도 용서만 하는 것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능력을 우리에게 더해 주소서. 믿음을 더해 주소서.\"
제자들은 그 더 받은 능력가지고 그 더 받은 믿음가지고 무엇을 더하겠다는 겁니까? 그 주인은 용서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엇 다른 것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용서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판단도 하리라. 그리고 정죄도 하리라. 그런 월권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7절부터 있는 오늘 본문 말씀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지금 17장에 나타난 이 제자들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많이 주십시오. 누구보다 많이 하겠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이르거든 나를 주님 우편에 앉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종은 그런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을 더 받아서 더 큰 믿음을 받아서 하나님이 지금 명하신 그 한계 이상 많은 것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볼 때에는 \"너는 나의 종이 아니니라. 너는 나의 권위를 도전했느니라. 네가 나의 뜻을 거스리고 무엇을 더 하겠다는 것이냐?\"
그런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에게 믿음 조금만 주면 그것 조금 가진 믿음을 가지고서도 얼마나 부풀려서 너희가 일하겠는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뽕밭에 있는 뽕나무를 뽑히어 바다로 가서 죽으라 하지 않겠는가.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는 화로다. 너희의 무엇을 가지고 실족케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명하신 것은 종으로서 용서만 하고 사랑만 하라고 한 것인데, 그 이상 무엇을 더 하려고 너희보다 약한 자를 어린아이같은 신앙인을 향하여 욕하고 판단하고 비판하여 그를 실족케 만들어 이 회에서 끊어지게 만들려고 하느냐?
너희는 잘 생각하라. 받은바 한 달란트의 사람, 한 달란트를 받고 한 달란트만 더 남겨 왔으면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남겨온 사람과 똑같은 위로와 축복을 받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취한 조처가 무엇이겠습니까?
받고도 감당하지 아니한 자에게 조처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그 하나마저도 빼앗아라. 그리고 저를 대문밖에 내어보내 슬피 울며 이를 갈도록 하라.\" 했습니다. 받고도 받은 만큼도 아니한 이 사람은 게을러서 아니한 이 사람은 그래도 죽지는 않았습니다. 받은 것 뺏겼을 뿐이요.
그리고 또 두 번째로는 바깥에 가서 우리의 즐거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게 하라 그 정도였습니다. 슬피 울며 이빨은 갈지라도 죽이기까지는 안 했습니다. 받은 바를 하지 아니한 게으른 자는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받은바 보다 넘친 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라는 것 말고 그 이상을 했던 사람들, 실족케 될 자도 용서해야 될텐데 오히려 더 판단하고 정죄하여 그를 실족케 만들었다면, 커다란 연자맷돌을 로프줄 갖고 와서 그 연자맷돌에 있는 구멍에다 로프를 끼어서 넘쳐서 시키지 않은 것까지 하여 남을 비판하고 정죄한 저의 목에 묶어서 함께 빠뜨리우리라. 살고 싶어도 살려두지 아니할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종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해서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로 압니다. 넘치도록 충성하면 되는 줄로 압니다. 그렇게 가르쳤기에 모든 사람들은 받은바 능력도 크고 자기 받은 대로만 일하면 되는데,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났으면 이 명령은 특별한 믿음이 더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믿음을 더 주시옵소서. 능력을 더 주시옵소서.\"
집에서 기도하는 것도 모자라 교회 와서도 목을 놓아 부르짖고 그것도 모자라 저 산기도 가서 부르짖고 기도원이 있는 동네에 가 보면 산 나무 뿌리마다 붙들고 늘어져서 말갛게 되었다는 겁니다. 뭐 했느냐? 능력을 더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맡겨주신 일 맡기실 때 그 일은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직성에 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에게 왜 그런 일만 시켰을까? 왜 나에게는 두 달란트만 주었을까? 다섯을 주시지 않고.
\"내가 두 달란트밖에 받지 못했으니 주여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다섯이고 열이고 남기겠나이다.\" 이렇게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마는 그는 주인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가 종의 신분임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더 많이 하십시오. 더 많이 하십시오.\" 할 것이 아니라 \"받은 바대로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만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두 달란트 주고 다섯 달란트를 결코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야 되고, 백성의 자리에 앉을 자는 백성의 자리에 앉아야 되고, 방백의 자리에 앉을 자는 방백의 자리에 앉아야 되고, 장로의 장리에 앉을 자는 장로의 자리에 앉아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서 덜하는 것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게으르다는 결론과 함께 받은 것마저 천국에서는 뺏겨버릴 것이요 그리고 큰 잔치에 들지 못하는 그런 슬픔을 당하겠지만,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가 모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넘치고 백성의 자리에 앉을 자가 백성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넘쳐서 방백의 자리 장로의 자리로 올라가고. 장로의 자리에 앉을 자가 장로의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백성의 자리에 가고 또 모세의 자리에 올라가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위와 처소를 주셨는데 이 지위와 처소를 떠나면 하나님은 어찌 말하셨느냐? 죽어 마땅할 사단이라 했다 그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더 주십시오. 더 주십시오.\" 이런 야단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교회 안이든지 사회든지 나라든지 가정이든지 받은바 자기 위치에만 있으면 가정도 건강하고 사회도 건강하고 교회도 건강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는 질서의 나라인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상급이 더 크고 백성의 자리에 앉았다고 상급이 작으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제자리를 지키는 자에게는 상급이 같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직자들은 가운을 입고 그 위에 이 어깨에다가 스톨을 걸칩니다. 또 어떤 교파에서는 목을 감싸는 하얀 칼라를 옛날 중고등 학생들이 칼라했듯이 때묻지 말라고 칼라를 목깃에 끼우기도 합니다. 혹이는 이 스톨을 하고 나면 마치 자기가 성직자로서 큰 권위있는 상징이 바로 이 스톨인줄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걸치지 못한 자는 빨리 걸치고 싶어하고, 그 스톨을 걸치고 나면 \"빨간색을 걸쳤느냐, 노란 색을 걸쳤느냐? 몇 줄이냐?\" 이런 것까지 따지기도 하고, \"작은 것 걸쳤느냐, 죽 늘어뜨렸느냐?\" 해서 스톨을 걸치고 나면 모양도 달라지고 걸음걸이도 달라지고 목소리도 달라지고 이렇게 대단한 권위의 상징인줄 압니다.
그러나 이 스톨의 유래는 권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서 나왔느냐? 소와 말들이 메는 멍에를 상징해서 종의 멍에라는 뜻에서 스톨을 걸쳐주는 겁니다. 그리고 목에다 하얀 칼라로서 목을 뒤감는 것은 무엇이냐? 개 목줄입니다. 유래가 거기서 나온 겁니다.
이제 너에게 스톨을 걸쳤으니 너는 종의 멍에를 메었노라. 너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가 가자는 대로 갈 뿐, 그가 하라는 것만 할 뿐,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이 밭을 두 마지기를 갈든지 한 마지기를 갈든지 주인이 이랴 하면 너는 멍에를 멘 이상에는 끌어야 되고 주인이 그만 할 때까지 너는 쉬지 못하는 것이니라. 이 스톨의 유래가 멍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세움받을 때 이 스톨을 씌우는 것은 무엇이냐? 너는 지금부터 종의 멍에를 가졌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너는 네가 아니요, 주인의 뜻대로 할 것이요, 네 기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분대로 너는 살아갈 존재가 되었느니라.
그래서 제일 첫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이 스톨을 네 목에 걸치고 나를 따르려고 하면 제일 첫 번째 할 것이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겠느냐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겠느냐 바로 그것이지요.
전쟁에 나가는 배는 다 전쟁에서 이길려고 나갑니다. 요즘에는 큰 기관실이 있고 동력을 가졌습니다마는 옛날 큰 범선으로서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그 배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수많은 노젓는 사람이 있습니다. 백성이 노를 젓기도 하고 포로를 잡아다가 노를 젓게도 하는데, 노젓는 사람은 배 방향을 알도록 배를 구조하지 않습니다. 배의 방향을 잡을 사람은 저 위에 선장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젓는 사람은 이 배가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저어라 하면 젓는 것이요 왼쪽 젓고 오른쪽 쉬어 하면 왼쪽 젓고 오른쪽 쉬는 것이고, 빨리 저어라 하면 빨리 젓는 것이고 늦게 저어라 하면 늦게 젓는 것이고 명령을 듣고서 그대로만 하는 것이지 노젓는 사람이 수십명 저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데 앞과 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노만 잡혀있습니다. 그리고 소리만 들립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젓습니다. 이 배가 지금 38선을 넘어가는지 넘어오는지 적진으로 들어가는지 왜 빨리 가고 늦게 가는지 그것 알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노젓는 사람이 노만 열심히 저어야 할텐데 명령을 받고 노만 저어야 할텐데 \"이 배가 지금 어디로 가는가? 왜 적선이 저기 있는데 배가 이리 가는가? 속도를 지금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인가?\" 전부 선장 자리로 뛰어 올라가서 선장이 잘하느니 못하느니 이렇게 한다면 그 배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배입니다.
노젓는 배만 그렇습니까? 요즘 군함도 마찬가집니다. 배의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저 위에 올라가서 그만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 밑에 있는 사람은 따르릉 따르릉 신호가 내려가면 신호의 표지를 따라서 그저 엔진을 올렸다가 껐다가 빽을 했다가 전진을 했다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겁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던지 말았던지 기관실에 있는 사람과 노젓는 사람이 그 선장을 향하여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질서인 것입니다. 그래야 그 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그렇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맨 앞 조정석에 기장도 들어있고 그리고 서너 사람 같이 탑니다. 그러나 맨 캡틴에게 권총을 주는 겁니다. 왜 줍니까? 하이재킹 하는 사람 잡으라고요? 아닙니다. 하이재킹하는 사람 막을 사람은 밖에 있는 승객실에 있는 사무장이 양말 있는 곳에 권총을 차고 다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것이고 안에 있는 기장에게 왜 줍니까?
이 비행기를 움직여 가는데 조정사가 조정간를 잡고 나가는데 옆에 항법사와 옆에 있는 무슨 기계 다루는 사람이 \"어 이리 가면 안됩니다. 고도를 올리십시오. 내리십시오.\" 제멋대로 돌리면 되겠습니까? 싸움이 일어나면 되겠습니까? 캡틴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바로 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야 비행기가 바로 가고 배도 바로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어떠냐? 그렇습니다. 종은 종의 위치를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에게 준 만큼만 능력대로 일해야 되는 것이지 아니하는 것도 탈이지만 그는 죽임까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넘치는 것은 연자맷돌을 매이우고 바다에 빠뜨리워지는 그런 형편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부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20년동안 주의 종들로서 우리의 이 20주년 기념예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이냐? 무익할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오늘날 이 산해원의 이 작품을 두고서 거대한 성공작이라 누가 평한다면, 그것은 이 거대한 성공작품을 낼 수 있도록 오직 주인께서 주셨고 그 주신 대로만 했을 뿐 거기에 넘쳤으면 넘친 자도 살아있을 수 없고 거기에 넘쳤으면 이 작품이 나왔겠는가?
그러나 20주년 오늘을 맞으며 반드시 저와 여러분이 함께 회개해야 될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년 전에 이 교회를 향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설계라는 것은 아마 오늘 우리의 이 현장 작품보다 컸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주께서 시켜주는대로 있으라는 위치에서 받은 만큼만 말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아니하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게으른 자도 없이 받은 대로 최선을 다하고 둘 받았으면 둘만 하고 다섯 받았으면 다섯만 하고 제 위치만 지켰더라면 오늘 우리 산해원은 더 이겼을 것이고 더 컸을 겁니다.
오늘 대표하여 우리의 모두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에게 쇠꼬챙이를 가지고 들어와서 쇠창살을 부수고 들어와서 공격을 하고, 참 미안합니다마는 오물을 갖고 와서 뿌려대고, 우리의 간판을 뽑아가서 지근지근 밟고, 우리의 들어오는 길을 태산같은 드럼통으로 막아 가지고서 어려움을 주고 할 때에 그러나 우리는 힘에 힘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에 이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상대가 강하게 들어온다 하더라도 아무리 아닌데 이단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우리를 어렵게 하고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할지라도 우리의 할 일은 비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명령은 정죄가 아닙니다. 사랑할 뿐입니다. 용서할 뿐입니다. 얼마나 외쳤던지 오늘 기도자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 일색으로 용서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네가 왜 나서냐? 나보다 잘났느냐? 넌 뭔데 혼자 그렇게 특별난 짓을 하느냐?\"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서로 다투고, 용서와 사랑만 20년 동안 한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특히 약한 어린아이같은 신앙인을 향하여 \"왜 끊을 것을 못 끊었느냐? 왜 가족끼리 싸우느냐?\"
\"집사와 권사가 되어 가지고서 연보대에 헌금하는 것 보니까 동전 골라하더라.\" 온갖 소리로서 우리의 맡겨준 사명 외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그리하지 않았으면 오늘 이 작품은 이보다 컸을 줄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은 것보다 더 넘치게 했던 것, 용서를 빌어야 할 줄로 압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내가 더 큽니다. 나를 오른편에 앉혀 주소서.\" 용서하라고 할 만큼 믿음과 능력 주었는데 \"믿음을 더해주소서.\" 이렇게 성숙되지 못했던 제자들, 그 제자들처럼 우리가 그토록 살았으나 주께서 그 제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더 훈련시켜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참으로 주의 모습을 갖게 하여 이 세상에 내어보냈던 것처럼,
20년이 되는 오늘까지 우리를 연자맷돌 매우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기다려 지켰듯이 20주년 될 때까지 우리를 지켜주신 것 감사하십시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힘입고 앞으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용서입니다.
우리가 20주년을 넘어서는 이날부터 비판할 사명을 받느냐? 정죄할 능력을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허물을 덮을 일은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계속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특별한 20주년 예배를 드린다고 하니 순서들이 일반 20주년 드리는 예배처럼 소위 설립자라고 하는 저에게 교회가 큰 것을 베풀려고 하고 수고한 장로님들과 성도님들 그리고 바깥에 있는 분들도 호의를 베푼 분들 우리에게 땅을 판 사람들까지 감사패 공로패 다 주자고 계획은 세웠습니다마는,
오늘 이같은 말씀을 성령으로 종의 눈에 들게 하시며 머리에 담으시고 심령 가운데서 떠나가지 아니했으니 주여 그러합니다. 우리는 종이기를 원합니다. 종의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크든지 작든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면 그 누구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했을 뿐입니다.
작품이 적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작품 수준이 안 되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용서만 하면 될텐데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 하다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던 제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기다렸다가 성령주어 예수님처럼 되게 하셨던 주여,
오늘 20주년 이후에는 더 지켜보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정말 주님을 주님으로 알고 내가 종인 줄을 알고 주님이 시킨 것만 하고 더이상 안해보려고 노력하겠사오니 또한 우리의 장래 가운데서 영광을 받아주시옵소서.
이러한 생각으로 사람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순서는 빼자고 했습니다. 오늘 하루쯤이니 저로서 꽃을 하나 큰 것 하나 꽂고 올라와서 때로는 강단에서 주님을 대신하여 서는 대언자가 되기도 하니 주님께 꽃 꽂아드리는 심정으로 해 드리려고도 했으나,
오늘 이 말씀을 20주년을 맞는 우리들의 감사예배와 기념예배에 메시지로 삼아서, 사람은 아무 것도 받지 말고 안 받을수록 종인 것이니 누가 큰 일을 했거나 사람의 보기에 저 말단에서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으나 받은 대로를 다 했으니,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볼 때에 단에 있는 자나 아래에 있는 자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에 칭찬하듯 똑같은 칭찬을 줄줄 믿으니 누가 특별히 꽃을 받고 누가 특별히 공로패를 받고 예우를 받겠느냐. 모든 영광 주님께만! 모든 영광 주님께만!
462 장 찬송 부르시겠습니다.
기도
거룩하신 주여, 20년전 그 첫날부터 오늘까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 주여, 오늘 우리가 이 현장을 봅니다. 주께서 또한 이 현장을 봅니다. 오늘 말씀을 좇아 저희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리는 이 작품에든지 저 작품에든지 무익할 종이라. 다만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이 성경의 구절이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만큼 우리에게 일을 주셨고 우리는 주의 종 되어 다만 일 했을 뿐입니다. 여기 더한 자 다섯 달란트, 덜한 자 두 달란트 그게 주께 무슨 차이가 있나이까? 자기 받은 만큼만 그 위치에서 일하였으면 주께는 똑같으니 주여, 우리 모두가 감사합니다.
여기에 이 20년 감사예배에 더 잘난 자 없고 못난 자 없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누구보다 더 했다면 더 주신 것 가지고 한 것 뿐이니, 아무도 나서지 않나이다. 우리 모두의 감사를 모두가 드리는 영광을 주님만 홀로 받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이제는 교회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무궁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 충만 인도 역사하심이, 2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산해원 교회와 성도들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무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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