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살아야 된다

교회가 살아야 된다./계3:1-6

교회가 살아야 된다.
계3:1-6





오늘은 우리 교회를 창립한지 14년이 되는 해 입니다. 개척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14년이나 흘렀습니다. 교회를 세우면서 많은 간증도 있었고, 위로와 감격과 은혜가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창립 14주년을 맞이하여 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 감사합니다.

물론 많은 것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 아쉬움은 있습니다마는 정리되지 않은 부분까지 감사로 이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꼭 어버이주일에 창립예배가 드려져서 어버이주일에 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 편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로서는 감사한 일이지요. 오늘도 14주년을 맞이하여 교회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 중에 사데 교회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왜 하필 사데 교회냐? 칭찬받은 서머나나 필라델피아 교회도 있는데 말입니다. 모범된 교회를 따라가야 되지 않느냐는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마는 우리 교회는 성전을 건축하고 올해를 축복의 한 해로 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님의 경고를 분명히 들어야하고 이 시대의 교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느냐, 특별히 일곱 교회 중에 어떤 교회의 모습을 취하고 있느냐 하는 관점에서 사데 교회를 예로 들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의 현재 지명은 사르디스입니다. 사데의 뜻은 ‘남은 자\\\\\\\' 또는 ‘남은 물건’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강가와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데의 이러한 지형학적 위치가 적들이 침입했을 때 방어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도시적인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17세기에 지진으로 기둥들만 남아있지만 한때는 굉장한 도시였습니다.

이 곳은 과일과 양모 생산이 유명한데 특히 생산되는 양모를 염색하여 옷을 만드는 일이 사데의 중요 산업이었습니다. 사데 교회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주석가로 유명한 멜리토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되면서 교회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의 문제가 문제였냐 하면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내적인 피폐로 안일과 부도덕의 모습이 교회에 깊숙이 침투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곳은 금화를 처음으로 만들어 이웃 도시 국가들에게로 보급하던 곳입니다. 당시 문명이 앞서 있던 이집트나 히타이트에서도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는데 사데의 리비아 왕국이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금화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사데 지역에 금이 많이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양모염색과 금채취로 인해 사데는 부유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사데 지역의 주된 신앙 대상은 키벨레 여신이었습니다. 지금 가보면 거의 기둥만 남아 있는데, 신전 옆에 작은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보면 이교도 신앙에 기독교로 개종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 교회처럼 혹독한 비판을 받은 교회도 없습니다.

1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또한 2절에는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은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어떤 부위에 병이 있다면 그 부위만 치료하거나 도려내면 되지만 영적으로 죽은 것은 마치 온 몸이 병들어 전체적으로 죽어가는 것과 같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데 교회는 외적으로는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살았지만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데는 고대 루디아의 수도입니다. 주전 7세기에 알리아테스라는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루다아를 57년간 통치하면서 아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그의 아들 크로에수스가 왕이 되었을 때는 엄청난 부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크로에수스 왕비가 엄청나게 잘 생긴 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한 날에 이 크로에수스 왕이 자기 신하인 기데스에게 왕비의 몸매가 천하일품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니까 기데스 신하가 하는 말이 ‘어떻게 보지 않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왕의 생각이지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이 ‘그래 이 왕의 말을 못 믿는다는 말이지, 그러면 언제 왕비가 목욕을 할 때 뒤에서 몰래 훔쳐보아라’ 그랬습니다. 측근인 기데스가 ‘어떻게 왕비의 알몸을 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도저히 그런 짓을 할 수없습니다.’ 그런단 말입니다. ‘왕의 명령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왕비의 벗은 몸을 왕의 허락 하에 보게 됩니다.

그 몸매를 보니까 왕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문제는 이렇게 훔쳐본 기데스를 왕비가 알아차린 것입니다. 왕비가 신하 기데스를 불러서 하는 말이 “나는 한 남편만 모시고 산다. 그리고 내 몸은 한 남편만 보아야 된다. 그런데 네가 내 몸을 훔쳐보았으니, 네가 죽든지 아니면 내 남편이 죽어야 된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로에수스 왕의 신하인 기데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는 죽기 싫고, 살길은 왕을 죽이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섬기던 왕을 죽이고 맙니다. 그리고 왕비를 아내로 맞이하지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기데스를 왕으로 인정 못하겠다고 들고 일어납니다. 이때 크로에수스 왕의 재산인 금화를 백성들에게 뿌리듯이 나누어줍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 먹고 시끄러운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잠잠하고 태평한 것 같으니까 어느 날 솔론이라는 장군을 부릅니다. 기데스가 솔론장군에게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왕입니다’하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솔론장군이 하는 말이 ‘누가 가장 행복한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고 없는 것에는 행복을 알 수 없고, 죽을 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살아남을 수가 없지요. 이만큼 기데스가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만과 방자함이 어디까지 미치느냐하면 그 당시 강력한 나라인 고래스를 침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래스 왕이 ‘잠자는 사자를 건드려!’ 당장에 군사를 모집해서 쳐들어옵니다. 그런데 워낙 성곽이 천연요새라 들어가는 문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들어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래스 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는 있을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을 돌면서 쓰레기를 어디에 버리는지 찾게 되는데 어느 날 쓰레기 버리는 조그만 구멍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병사들을 그 구멍으로 침투를 시켰는데 강력히 저항할 것으로 여기고 들어가 보니 그 성이 조용한 것입니다. 아무도 없어요.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샅샅이 뒤지는데 기데스 왕과 기족들을 어디에서 발견했냐 하면 굴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돈이 많고 부귀영화를 누린다하더라도 그리고 지금 굴속에 살아있다 하더라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는 말씀이지요. 기데스 왕이 굴속에 살아있지만 그것이 산 것입니까?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굴 속에서 끌려나온 기데스 왕이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사형장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솔론 당신 말이 맞았소, 솔론 당신 말이 맞았소.’ 그러니까 고래스 왕이 사형을 멈추고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데스 왕이 ‘지금은 당신의 재산이 되었지만 사데 지역의 엄청난 금화와 부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줄 알았소.’ 그 소리를 들으니까 고래스 왕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물론 기데스 왕의 재산이 고래스 왕의 재산이 되지만 쉽게 인정을 하니까 기분이 좋을 수밖에요. 그러면서 솔론 장군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장군에게 누가 가장 행복하나 물으니까 ‘누가 가장 행복한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있고 없는 것에는 행복을 알 수 없고 죽을 때 알 수 있습니다.’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이 꼭 맞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래스 왕도 좋은 깨달음이다 생각해서 기데스를 죽이지 않고 한적한 곳에 집을 지어 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살았느냐는 말입니다. 주일에 교회는 옵니다. 신앙의 모양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주인이 돈이나 부귀영화가 되어 이것이 행복이라고 느끼며 살아가지만 그것으로 인해 굴속에 갇히고 살았지만 죽은 것처럼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부유한 도시에 있었습니다. 양모를 염색하는 주된 산업을 통해서 부를 축척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습니다. 내적 생명력, 참된 사랑, 성령의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어떤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어떤 실수를 한다 할지라도 살아 있으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한국교회가 많은 싸움과 분열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도가 살았고 예배가 살았고 내적 생명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교회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비록 시험이 있고 분쟁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고 죽어가는 교회는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프로그램의 다양화와 성도들의 친밀한 교제와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비롯해서 새벽기도, 성경공부, 금요심야예배, 수요예배 등 열심을 다해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개개인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 영혼에 살아있지 못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두려운 것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갈급해 하며 메마른 영혼을 달래지 못하는 교회가 되면 어떻하나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더 이상 교회에 기대하지 않고 위로와 힘을 받지 못한다면 분명히 교회의 역할을 재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성도들의 생명력 있는 삶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가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이처럼 죽은 영혼이 되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교회가 생명의 성장과 감격을 놓치지 말자는 뜻에서 사데 교회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죽어가는 사데 교회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고 계십니까?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입니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없는 것을 굳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것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그것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교회는 찬양이 살아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찬양을 Em겁게 해 보십시오. 정말 그 찬양 속에 감격이 있고 확신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178장을 몇 시간을 불렀더니 성령께서 강하게 마음을 감동시키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중심을 다해 기도하는 자세로 찬양을 귀하게 드려보십시오. 다릅니다. 느낌이 다르고 은혜가 다르고 감격이 다릅니다. 그런데 찬양에 소홀하고 찬양시간이 줄어들고 찬송해야 될 시간에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런 것으로 인해 영혼이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뜨겁지 못하지만 입술을 통해 찬송을 하지 않습니까?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나도 모르게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찬송의 열정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다시 한번 찬송의 뜨거움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예배를 통해 찬양시간을 맞이했으면 이것이 우리에게 찬양의 드림이 남은 것입니다. 굳게 하시면 회복됩니다. 찬양이 죽었다고 악기를 동원하고 드럼을 치고 물론 좋습니다. 도움은 되겠지요. 하지만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갈망이 먼저 일어나야 됩니다. 열린 예배를 드린다 하면서 강대상을 치워버리고 멀티미디어 영상매체만 동원한다고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예배에 도움이 될 뿐이지 우리가 지금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느냐하는 문제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받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처음에 주님을 믿고 감격했든 처음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율동이 없어도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없어도 좋은 교회 건물이 없어도 감격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을 때 사랑을 체험했을 때 주위환경 보지 않았고, 사람 말 듣지 않았고 분위가 따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씀 듣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에 뜨거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생각하고 그 믿음을 지키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개척을 할 때, 교회를 구입했을 때, 성전을 건축할 때 어려움이 있었고 힘든 일이 있었고 위기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속에 은혜가 넘쳤고 감사가 있었고 결국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지금 건축이 끝나고 다 되었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교회를 세우고 어떻게 해서 은혜 가운데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하고 그 믿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를 건축한 이유가 어디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데 있습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사명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해서 은혜의 자리로 이끌어 그들을 말씀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 교회에서 있어야한 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살다가 보면 눈물이 날 때가 있고 마음이 쓰릴 때가 있고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만날 때도 있고 앞이 캄캄한 위기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곳이고 위로가 있는 곳이고 힘을 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시는 주님께 인도하는 일이 교회에서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환경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사건을 통해서 참 많은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힘을 잃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해 교회가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이는데 그런 권세가 교회가, 성도들이 있는데 이런 권세를 통해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말할 때도 참 조심해야 됩니다. 성도들이 감정에 따라 기분에 따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요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여야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죽이는 말을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해서 상대방이 상처가 될까 기분이 상할까 정도는 가려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말은 생명을 살리는데 쓰이는 도구가 되어야지요. 예를 들어서 ‘나 시험에 들었어!’ 그런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이 나 좀 잡아달라는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역장이 구역원들에게 ‘나 시험에 들었어!’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물론 우리교회는 시험에 잘 안 드는 경향이 있지만 구역장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시험에 들었으니 너도 들으라는 말입니다. 말은 사람들을 세우고 살리는데 있지 자꾸 죽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것처럼 베데스다연못과 같다고 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모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베데스다를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아픔과 스트레스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40이 넘어가면 안 아픈 데가 없고 걱정거리 한두 가지 안 가지고 계신 분 없고 뜬 눈으로 밤을 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베데스다와 같은 이런 세상에서 주님이 찾아오신 곳이 있었습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듯이 예배를 통해 주님이 찾아오시고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찬송과 기도시간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치유하시고 위로하시고 해답을 제공하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십니다. 교회는 이처럼 주님이 찾아오시는 곳입니다. 38년 된 환자처럼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어도 하나님을 향해 서 계십시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사데 교회에 몇몇 남은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절에 ‘그러나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니라’ 성경은 ‘남은 자의 신학’이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요셉을 통해서 엘리야를 통해서 바벨론 포로 이후 포로귀한 자들을 통해서 그 다음에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한 헌신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합당한 자를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시간과 물질을 바쳐 충성하는 것도 좋습니다마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지 않으며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활발하게 움직였고 물질이 풍부해서 예물도 많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죄와 타협했다는 것입니다. 충성과 헌신이 우리의 죄가 보상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한 사실을 이들을 향해 주님은 죽은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통해 생명을 살립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께 인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런 남은 자의 축복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교회가 14주년이 되었습니다. 14년 동안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신 은혜를 감사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살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죽은 모습은 없는가? 한번쯤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비전을 앞세우기 전에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기 전에 내 안에 주님이 주인이신가? 생명이 자라고 있는가를 먼저 점검하고 이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붙들어내는 생명 살리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