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 (1) 마25:14-30
2월은 우리 성광교회가 이 땅에 태어난지 49주년을 맞이하는 참으로 뜻 깊은 달이다. 앞으로 우리는 교회창립 50주년, 희년을 준비하는 일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창립주일이 있는 2월의 표어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로 정하였다. 그리고 매 주일마다 주님을 기뻐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자기 집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한 어린이는 우리 집은 강남에서 수 십평 아파트라고 했다. 한 어린이는 우리 집은 아름답고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떤 어린이는 우리 집에는 없는 것이 없는 별거도 다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들 생각에는 좋은 집은 큰 아파트라고 생각한다. 값 비싼 집이라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집은 좋은 사람들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크고 좋은 집이라도 그 집에 도적이 살면 도적소굴이 된다. 나쁜 사람이 살면 나쁜 집이 되는 것이다. 초가삼간이라도 거기에 좋은 사람들이 살면 좋은 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 중에도 어린이처럼 큰 아파트가 좋은 집이라고 생각하여 큰 집에 사는 것에 대하여 은근히 뽐내는가 하면 전세 집에 사는 자는 기가 죽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다. 수천명, 수만명 모이는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수천명이 모여 오케스트라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며 멋있는 설교를 듣는 것을 좋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 당시 헤롯의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었다. 하루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롯의 성전에서 나올 때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건축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입니까?\\\" 감탄 할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큰 건물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말씀하셨다. 이것이 주님이 성전을 보시는 관점이다. 예수님은 성전의 겉모양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서 예배하시는 성도들을 보셨다. 그 성전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을 보시며 \\\"네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며 영적으로 더러워진 성전, 타락한 성전을 채찍으로 그들을 쫓아내시며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헤롯의 성전은 완성을 보기도 전에 주후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로마의 군인들에 의하여 다 무너졌던 것이다.
우리는 나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사람을 보되 그 심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겉을 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마음을 보신다. 특히 우리는 교회를 평가할 때 조심해야 한다. 나의 짧은 지식이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이렇쿵 저렇쿵 말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강도의 소굴처럼 보시고 사람이 보기에 하찮은 교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름다운 교회로 보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우리 가정을 어떻게 보느냐 우리 성광교회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성광교회를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2월 한 달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성광교회를 어떻게 보시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믿고 순종하는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가정의 아름다움은 몇평 아파트에 살고 집안에 어떤 가구가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어떤 식구들이 사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가정이 결정되는 것이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과 수천명의 교인과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있는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에 어떤 교인들이 있느냐, 그 교회에는 어떤 목사와 어떤 장로와 어떤 안수집사와 권사 어떤 집사와 교인들과 어떤 어린이들로 이루어졌느냐에 따라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결정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인은 어떤 자들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는 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은 목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장로와 집사와 권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우리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두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청지기란 단어는 현대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는 종이라고 했다. 영어 성경에는 청지기를 servant, 종, officer, 공무원으로 되어 있다. 종과 청지기는 그 개념이 다르다. 종은 단순히 주인이 시키는 일을 그대로 하는 자이다. 여기에는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사용할 수 없다.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따를 뿐이다. 그러나 청지기는 다르다. 주인이 어떤 일을 시키면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살려 더 효과적으로 일을 하는 자이다. 이런 청지기를 영어로 잘 표현한 단어가 바로 manager 이다. 이 말은 지배인, 경영자를 뜻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에게 맡겨주셨다.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만드셨다. 그러므로 주인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을 맡겨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대한민국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춘천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성광의 성도 모두에게 이 춘천성광교회를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우리 가정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에게 자녀들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재물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목사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장로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집사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권사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성가대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교사의 직분을 맡겨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청지기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부여 받았다. 여기에 앉아 계신 성도들 중에 청지기가 아닌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보다 소유권 문제이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만든 자들이 아니다. 창조주가 아니다. 맡은 자들이다. manager이다. 관리인이다. 지배인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 교회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피로 사신 주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서울노회 장로고시 면접시험 때 질문 하나로 큰 문제가 되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 교회의 주인은 누구겠는가? 목사인가? 장로인가? 교인인가? 만약 우리 인간이 교회의 주님이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인간의 집단이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오직 주님이시다. 우리는 청지기뿐이다. 이 소유개념이 분명치 않는 자에게 아무리 불같은 열심히 있다 하여도 그는 교회를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불같은 노력을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열심은 대단하다. 불처럼 뜨겁다. 그러나 불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불이 올바르게 사용될 때에는 불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불은 모든 것의 근본 힘이 되는 것이다. energy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이 잘못 사용될 때, 불은 가장 무서운 인류의 적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불로 태워 버리면 재 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을 표현할 때에 불로 표현한다. 그만큼 불은 무섭기 때문이다. 위험한 것은 이 소유개념이 확실하지 않는 자가 교회의 일꾼이 되어 불같은 열심을 낼 때에 그 교회는 참으로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불같은 시험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청지기는 자기의 소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이다. 나의 몸도, 나의 자녀도, 나의 시간도, 나의 물질도, 나의 영혼도, 나의 직분도, 나의 지식도, 나의 모든 것이 하나도 나의 것이 아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때론 내가 어떻게 나은 아들인데?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학위인데?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증인데? 내가 어떻게 해서 얻은 직책인데? 모두 나의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어리석은 부자는 이렇게 독백을 한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리라.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내 몸도 내 것이요 내 영혼도 내 것이요 내가 모은 재산도 내 것이요 그리고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며 즐기는 편안한 삶을 살수 있다는, 모든 것의 소유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우리도 늘 하고 있다.
그러나 참 청지기는 모든 것의 소유권은 하나님이시라는 철저한 청지기의 정신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꿈에라도 내 돈, 내 자녀, 내 집, 내 몸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철저한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가시기 바란다.
청지기의 특징은 주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맡았다는 것이다. 본문 15절에는 \\\"그 재능대로\\\" 라고 하셨다. 어떤 청지기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청지기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청지기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셨다. 양만 많고 적게 맡겨 주신 것이 아니라 재능도 각각 다르게 주셨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자 중의 하나가 바로 박찬호 야구선수인줄로 안다. 하나님은 박찬호 야구선수에게 야구라는 다섯 달란트를 주셨다. 만약 박찬호에게 공부를 시킨다면 그는 분명 낙제점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박찬호 선수가 공부를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박찬호 선수에게는 공부하는 재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야구하는 재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재능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교육은 오직 한가지 재능, 공부 잘하는 것만으로 승부수를 띄우려고 한다. 이래서는 어떻게 세계의 무대에서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겠는가? 공부 잘하는 것은 수백개의 재능 중의 한가지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하게 만들지 않았다. 어떤 자에게는 공부를 잘하는 재능을, 어떤 자에게는 음악을 잘하는 재능을, 어떤 자에게는 만들기를 잘하는 재능을, 어떤 자에게는 활을 잘 쏘는 재능을 주셨다. 하나님은 한가지만을 하시는 답답하신 분이 아니시다. 모든 것을 다 하시는 다양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한가지 재능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재능을 주셨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자기의 재능은 좋고 다른 사람의 재능은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재능은 다 소중하고 다 아름답고 다 좋고 다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아직도 우리 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공부 잘하는 이 한가지만 귀하고 다른 것은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에게 교회학교 교사를 권했더니 \\\"목사님, 저는 차분하게 앉아서 가르치는 것은 못합니다. 그러나 도시락 만들라고 하면 저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하나님은 그 분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보다는 봉사하는 은사를 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29절에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는 다 같지 않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내가 맡은 직분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맡은 직분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맡은 사명에 충성하면서 다른 사람의 맡은 일을 돌보아 주는 성숙한 믿음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청지기는 작은 일부터 충성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작은 일은 시시하게 생각해서 하지 않는다. 작은 일을 하라고 하면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섭섭해 한다. 이것은 청지기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10절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 느니라\\\" 하셨다. 우리는 큰 것을 가장 좋아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는 정말 작은 나라이다. 세계 어린이들이 세계지도를 그릴 때에 우리나라는 그리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이렇게 작은 나라인데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나라 일을 하는 자를 대통령이라고 한다. 사실은 대통령이 아니라 청지기이다. 봉사자이다. 대학교, 서울에는 대교가 얼마나 많은지, 성수대교, 한강대교, 한남대교, 천호대교, 영동대교, 대사, 술에도 왕대포가 있다. 우리나라는 큰 大자를 빼어 버리는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것과 같이 나라 안은 온통 큰大자로 가득하다. 정말 우리나라는 작은 것에 대하여는 너무 성실성이 없다.
교회 안에도 이 大자 사상이 들어와 작은 일은 좀처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남이 알아주는 큰 일, 생색나는 일에는 열심하지만 남이 알아주지 않는 작은 일에는 봉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지기의 자세가 아니다. 주님은 21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라고 하셨다. 우리 인간은 큰 것을 선호하지만 하나님은 작은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것은 작은 일, 그것은 곧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 힘들어서 남이 잘 하려고 하지 않는 일 인기 없는 일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 내가 잘 하고 싶지 않는 그런 일을 하는 청지기를 하나님은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다. 성광의 청지기 여러분, 작은 일에 충성하자 작은 일에 열심하자 작은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자 작은 자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자.
청지기의 생명은 충성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마치 큰 오케스트라의 한 맴버와 같은 역할이다. 오케스트라는 어느 한 사람만 잘해서 좋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수십명의 단원들이 모두 최선을 다하여 연주할 때 아름다운 화모니의 음악을 연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세계의 유명한 지휘자 중의 한 사람인 마이클 코스타라는 지휘자가 어느날 오케스트라 연습을 시키는데 갑자기 악기 하나가 조용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가만히 보니 피콜을 연주하는 자가 연주를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피콜 연주자는 아마도 피아노 소리, 큰 북소리, 트럼본 소리 같은 큰 소리에 그만 눌려 내 같은 작은 악기의 소리는 내어 보나마나 실망하여 연주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을 예리하게 알아차린 코스타는 큰 소리로 외쳤다. \\\"피콜로 어디 있소!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이 오케스트라가 살아나는 것이오 자부심을 가지시오 힘을 내시오 피콜로!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 오케스트라가 유명해 지는 것이요!\\\" 성광의 청지기 여러분, 여러분은 다 목사가 아니다. 다 장로가 아니다. 다 권사가 아니다. 나는 비록 작고 작은 일,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청지기이지만 그러나 내가 없으면 성광의 오케스타라는 안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일을 하는 목사만, 장로만, 권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작을 일을 충성되게 하는 내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끔 마음 아플 때가 있다. 성광 교회에서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자가 무슨 소용이 있어! 나는 돈도 없고, 지식고 없고, 능력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하며 일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볼 때 저가 마음 아픈 것 보다 이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더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큰 일보다는 작은 일부터 정성을 다하여 충성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청지기는 항상 정당한 충성을 해야 한다. 올바른 충성을 해야 한다. 어떤 자는 나쁜 일에 충성하는 자가 있다. 내가 왜 충성해야 하는가? 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항상 나의 충성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충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교회를 위한 충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나를 희생하는 충성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작은 자를 위하는 충성이어야 한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충성이면 안 된다. 사람에게 인기나 관심을 끌기 위한 충성이 되면 안 된다. 나의 이익을 위한 충성이면 안 된다.
우리는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때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꿩을 잡는 것이 매라는 생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서적인 방법이 아니다. 청지기의 자세가 아니다.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는 것 중요하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으나 만약 다섯 달란트를 남기 종이 거짓말과 남을 속이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면 주님은 칭찬대신 책망을 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자를 우리는 부러워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성공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남을 속이면서, 거짓되면서 성공한 것은 참 성공이 아니다. 우리는 60년대 잘 살아보세 노래하면서 새마을 운동을 열심히 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잘 사는 것, 결과만을 추구해 왔다. 그래서 당시 진실을 말하는 자들이 고통을 당한 일이 많다. 그 한가지 예를 들면 당시 공장들을 건설하여 공장을 가동시키려고 하니 환경적인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이때 교수들이 이것은 안 된다고 반대를 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우리는 어떻게 잘 살라고 그 과정을 올바르게 교육하지 못하고 군대식으로 무조건, 빨리 잘 살자만 했다. 그래서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급속도로 잘살게 되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잘 살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부작용들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잘 살게 되니 이제는 죄짓는 일들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충성인가? 누구를 위한 충성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우리의 충성은 때론 원숭이의 어리석은 충성과 같이 되어 주님에게도, 교회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해를 주게 될 것이다. 심리학 교수가 원숭이를 잘 훈련시켜서 자기의 심부름 꾼으로 데리고 살았다. 원숭이는 이것 저것 참으로 잘 했다. 어느날 교수님이 잠을 잘 때에 원숭이는 옆에서 부채로 시원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데 없는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교수의 얼굴에 앉는 것이었다. 원숭이는 부채로 파리를 날렸다. 멀리 날아갔던 파리가 다시 와서 교수의 얼굴에 앉았다. 원숭이는 참고 다시 부채로 파리를 멀리 날렸다. 파리는 날아갔다가 다시 와서 앉았다. 이때 원숭이는 깊이 생각을 했다. 이 파리가 다시 날아와서 교수님을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원숭이는 이렇게 하면 교수님을 귀찮게 하는 파리를 영원히 없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는 큰 돌을 가지고 와서 파리가 오기를 기다렸다. 파리는 자기 죽는 줄도 모르고 다시 날아와서 교수의 콧잔등에 앉았다. 원숭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때다 하고는 큰 돌을 들고 있는 힘을 다하여 교수님의 콧잔등에 앉아 있는 파리를 향하여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런 충성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과잉충성이다. 이런 충성은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 이런 충성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주님은 이런 충성을 원하지 않으신다.
충성된 청지기와 게으른 청지기에게는 주님이 정당한 상급과 심판이 있다. 성광의 청지기들은 모두 충성된 청지기가 되어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된 자리와 더 많은 것으로 상급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 상급은 이 세상에서도 주신다. 그러나 저 천국에 가서 더 좋은 것으로 더 확실하게 주신다.
성광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청지기로 봉사할 날이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우리는 청지기로 일하지 못하는 날이 곧 오게 되는 것이다. 속히 오게 되는 것이다. 젊었다고 많은 날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항상 오늘에 충성해야 한다. 오늘만이 나의 날이다. 80년대 한참 대모가 심할 대의 일이라고 한다. 연세대학교 학생회 임원 중에서 대모에 앞장을 서서 늘 대모하던 학생이 어느날 배가 아파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했다. 가정이 어려워서 수술할 비용도 없었다. 교수들과 의사들이 돈을 모아 수술을 하기로 했다. 의사들이 수술을 시작하여 보니 이미 학생의 온 배에는 암이 가득하였다. 도저히 수술을 할 수 없어 그대로 다시 꾀 메고 말았다. 학생이 퇴원할 때에 의사는 학생에게 자네는 앞으로 6개월 밖에 살 수 없으니 세상으로 가서 한번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 두 친구에게 의지하여 퇴원하던 학생은 연세대 백향로 길에 무릎을 끓더니 큰 소리로 \\\"하나님! 6개월은 너무 짧습니다! 일년만 살게 해주세요!\\\" 두 손을 하늘로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6개월은 너무 짧으니 일년만 더 살게 해 주세요! 이런 심정으로 우리 살아가야 한다. 이런 심정으로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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