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축복

교회의 축복/마18:19-20

교회의 축복
마18:19-20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면서 창립11주년 기념예배로 드려지는 날입니다. 오늘 다른 교회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의미를 찾겠지만 저희교회로서는 이 예배가 창립11주년 기념예배에 의미가 있는 귀한 날 입니다. 저희교회가 창립된 지 벌써 11년이나 되었습니다. 뒤 돌아보면 순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창립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저희 집사람은 예본이를 출산할 시기에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어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우리가 1월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만은 지방회에서 인준을 안 해주는 바람에 5월 10일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본이 엄마도 참석하지 못한 체 창립예배를 드려야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차례나 교회를 이전하던 중에 오늘 이 자리의 교회로 이전 해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전 1년 후에 I. M. F가 터졌고 그래서 저희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자를 내고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빚을 갚게 되었고 제정도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또다시 이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빛을 내어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또 다른 각도에서 체험하리라 믿습니다. 성도님들 중에 혹시 부담스럽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 이전을 할 때 계셨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부담으로가 아니라 영광과 은혜로 성전 이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교회의 주인의식을 가지면 은혜를 체험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전해야할 곳을 놓고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2월에 계약을 해 놓고 지금까지 이사를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가 결정이 되었습니다. 만은 이런 과정을 통해 저는 인내와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기다리는 체험도 있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허락 하에 진행되어지는 일이라면 또 다른 신비함을 교회를 통해서 나타날 줄 믿습니다.

저희교회가 창립11주년을 맞이해서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신비함과 능력과 축복에 대해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삶이 달라지고 주님의 임재 함을 날마다 깨닫고 복된 삶을 이루시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을 축원 드립니다.

여기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각 개인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너희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했을 까요? 이것은 ‘내 이름으로 모인 곳, 즉 성도들이 함께하는 곳의 임재, 다시 말하면 교회의 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시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의 ’나‘가 모여서 교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혼자 있어도 주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그 ’나‘가 두 세람이 되어 함께 모이는 곳에 주님이 함께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함께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의 함께함은 어떤 공동체로서의 신비함을 이루기 위한 함께함입니다. 그 공동체로서의 신비라는 것은 고린도 전서12: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가 모이면 이미 개인의 모습에서 몸의 형태가 공동체로 바뀌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는 몸이 되고 \'나’는 지체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는 몸이 되고 각 개인은 그기에 붙어서 떨어져서는 안 되는 지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가 모이면 몸이 되고 그 몸의 각자가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지체는 떨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체의 역할이나 축복은 몸에 붙어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몸에 붙어 있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떨어져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체가 왜 존재하느냐하면 섬기기위해서 이지요. 각 개인은 자기를 위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지체가 지체를 위해 섬기는 일이 있어야 다른 지체가 살아갈 수 있는 신비를 알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팔이면 팔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리와 목과 입과 눈과 다른 여러 가지 지체가 협력을 해 주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팔이 입을 섬기는 것 같습니다. 밥도 넣어 주고 입을 즐겁게 하지만 결국 그 밥이 입으로 들어가야 힘을 얻어 팔이 힘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는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이 말씀이 오늘 가정과 교회와 세계를 충만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교회의 힘이 됩니다.

교회의 신비는 첫째, 모임의 역사에서 나옵니다. 본문에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라고 합니다.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모여야 합니다. 떨어져 나가면 내가 손해입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손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다른 모든 공동체의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하며 또 모였을 때의 엄청난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임은 누구의 이름으로 모였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입니다. 주님의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하는 것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빌립보서 2장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에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이렇게 대단한 능력과 신비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으로 구원을 얻고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가난한자에게 낙심하고 좌절한 자에게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능력과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네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고 명령했을 때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 능력이 예수그리스도이름의 능력을 통해서 나타난 놀라운 능력이지요.

주님께서는 이 이름으로 우리를 모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의 능력과 신비는 이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어떤 사상적 교양이나 교육적 계몽을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문화적 친교를 위해서나 지역 발전을 위해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은 예수이름, 즉 예수라 함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섬김과 예배를 통해 하늘나라의 신비함을 누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간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기적이 있었고, 치유가 있었고, 생명의 말씀이 있었고, 천국의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끊임없이 모여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모임이 계속되어야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있고, 치유가 있고, 생명의 말씀이 있고, 천국의 복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인 자들의 신비한 체험을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모일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두 번째로는 말씀의 신비함입니다. 모임은 그 수 자체가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수 가운데 주님이 임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생존시에는 주님 자신이 친히 모인 무리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그 군중들은 그의 성육신의 영광을 직접 목도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고 주님이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친히 목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하는 현장 이였지요. 그렇다고 볼 때 그 모임 자체가 보유하는 힘은 얼마나 강렬했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실 때 마다 타나나는 기적과 역사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지상의 왕으로 착각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능력 이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피 흘려 세우신 교회가 어떻게 그 놀라운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하늘나라로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요14:16) 지금 그 약속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교회에 임재 하여 주님의 능력을 교회가 소유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사도들은 오순절날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저들에게 임한 성령은 방언을 통해서 모인 무리들을 충만케 했습니다. 오늘 날도 교회에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 많은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성령의 임재는 우리를 충만케하며 은혜의 힘, 능력의 힘, 축복의 힘을 체험하는 복된 역사가 있음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우리의 교회생활에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뜨거움을 체험한 후 얼마나 담대했는지 모릅니다. 저들을 죽이고 옥에 가두고 핍박을 가하는 자들 앞에 당당히 나가서 ‘너희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 나셨고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으로 세상을 담대하게 맞이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드려내었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부귀영화와 세상이 주는 그 향락 속에서 성령을 통해 담대하게 세상을 거부하며 변화시키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강림은 베드로가 설교할 때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교회의 탄생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주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모이는 수가 날마다 더 했습니다. 저는 에스겔서 47장 1절부터 말씀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과 맥을 같이하는 말씀이라 여깁니다. 여기서 물이 성소를 통해서 나온다고 합니다. 성소를 통해서 물이 나와 이 물이 흘러서 숲을 이루고 나무가 자라고 강으로 가서 생물이 살고 고기가 풍족하고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서 어족이 풍부하고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고 또 이 물로 인해 나무의 실과를 먹으며 그 잎사귀는 약재로 쓰임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3장38절에서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7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성전이요 그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생수라고 합니다. 그리니까 이 물은 말씀이요 진리요, 성령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전에서 나온다고했습니다. 성전에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셔야합니다. 말씀의 생수, 진리, 성령의 충만함은 주님이 함께하는 성전의 모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물을 받아 마신 사람이요, 이 물을 마음에 채운 사람들입니다. 이 물을 마시고 채운 사람이 가는 곳마다 무엇이 삽니까? 생명이 삽니다.

숲이 살고, 나무가 살고 열매를 맺고, 어족이 살아가는 축복이 물로 인해서 나타나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생명이 소생하고, 치유함을 받고, 축복을 누리는 복된 은혜의 주체자이며 인생의 주인공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역사를 성소에서 나오는 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얼마나 중요하며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시는 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모이는 곳에 주님이 임재 합니다. 그 주님의 임재 속에 성령의 역사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을 받는 복된 심령, 성령 충만함을 욕심내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교회의 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는 살아있는 말씀, 항상 있는 말씀, 운동력 있는 말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려 쪼개기까지 하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성전에서 그 말씀의 임함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중에 임재하심이 됩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성장하게하고, 우리를 깨끗하게 정결하게하며, 주를 위해 복음적 사명, 선교적 사명을 다하도록 하며 하늘나라의 산 소망의 기업을 보장받게 하며, 그 말씀대로 축복받는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고, 은혜 받는 자는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은 성령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은 말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어 지며 그 말씀의 생수를 교회를 통해 공급받는 복된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셋째, 기도의 힘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을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는 말씀에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바로 앞 절에서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이것이 교회의 힘입니다. 함께 합하여 기도하는 역사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임재 한다고 했지요. 사실 주님이 임재 하는 것만큼 크고 놀라운 응답은 없습니다.

교회가 능력일 수밖에 없고 교회가 축복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주님이 피 흘려 세우시고 교회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교회에 함께하심을 여러 차례 언급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실 주님이 ‘ 교회에 임재 하셨다’하는 소리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데 주님이 임재하신 것의 귀한 의미는 우리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 한분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 한분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해 간다면 주님의 임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복된 것인지 알게 됩니다.

하박국서를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원망과 한탄을 품어 내었습니다. 예를 들어 1장 2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 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이 내용을 보아 잘 알 수 있듯이 하박국의 원망과 한탄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3장으로 가면 우리가 잘 알다시피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7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왜 이렇게 바꾸었습니까? 바뀐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성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한 신뢰성이 먼저 회복되었든 것이지요. ‘하나님 왜 이럴 수 있습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하는 마음에서 이제 하나님의 성실성과 전능성과 신실함을 깨닫게 되었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행복합니다. 이제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해답이시며, 안전이시며, 평안이시며 풍성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재에 대한 축복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신분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감사요 은혜요 축복이라 이 말이지요.

교회의 임재는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더 적극적인 이유는 주님께서 그 기도하는 교회의 현장에 축복의 응답을 실현시키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재는 이런 은혜와 감격이 있습니다. 이런 원리가운데서 교회가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는 것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교회의 기도는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는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 했습니다.

오순절에 다락방의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의 역사를 체험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했을 때 그 기도소리를 들어주시고 하나님이 옥에 천사를 보내 주셔서 베드로를 구출 했던 사건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기도는 우리 영혼의 독소를 빨아내는 거머리와 같다’고했습니다. 말하자면 심령의 질병을 기도로 치유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병든 자를 위해, 고통 받는 자를 위해, 낙심하고 좌절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되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하느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여기도하면 땅에서 풀 때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인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교회의 기도의 역사는 엄청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소속되어야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서로 기도로 협력해야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는 기도의 힘을 분출하는 곳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서 해결함을 받는 곳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해결함을 받는 곳입니다. 병든 자들이 들어와서 치유함을 받는 곳입니다.

교회 연합되어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한 몸으로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몸이라 했는데 예를 들어 손가락에 상처가 났습니다. 그러면 전 몸의 지체가 여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약도 바르고 조심도 하고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해 신경도 쓰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의 어려움을 교회가 기도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습이 교회가 합심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가 끊어지면 안 됩니다. 기도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이는 숫자가 늘어나는 부수적인 결과도 나타나는 것이지요.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는 모여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의 역사는 충만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질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임재 함을 깨닫게 됨으로 주님으로 인한 만족함을 얻고 기도를 통해서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은혜가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피 흘려 세우신 제단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를 상대로 핍박을 가하면 그 핍박을 가한 사람의 삶이 좋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 동기 목사님 교회에서도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참 인간으로서 저럴 수 있을까 할 정도의 아픔을 주었습니다. 상세히 말씀은 못 드리겠지만 새벽에 공기총을 들고 들어와서 다 쏴 죽인다고 협박을 하지 않나, 교회 유리창을 예배시간에 깨질 않나? 이로 말할 수 없는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지요. 안수집사입니다. 자기 교회 아니라고 그렇게 교회를 핍박해서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의 자녀들이 잘 풀리는 자녀가 없답니다. 우리지방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를 짓는데 방해하는 두 분이 있었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현장에서 누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두 분 다 암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결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지금 이 말씀이 현재 핍박을 하는 사람에게 들려지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말씀 해 봅시다. 역으로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 하면 그 만큼 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지기 바랍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을 절대로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교회는 성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를 위해 충성하시고 봉사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교회가 11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제 우리교회도 충성 자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성도를 통해 사람을 살리며 문제를 해결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므로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