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형제사랑/벧전1:17-25 2001-11-08 10:01:14 read : 99
저는 그 동안 베드로전서 1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네 차례에 걸쳐서 설교했습니다. 첫 설교의 제목은 \'흩어져 사는 선택받은 나그네\'이었습니다. 그 설교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루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살다가 떠나는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두 번째 했던 설교는 \'시련 속에서 빛나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시련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얻을 구원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설교는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네 번째 설교의 제목은 \'은혜를 소망하는 자의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 설교의 핵심질문은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소망하는 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답은 거룩한 삶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따르던 사리사욕을 따르지 말고 우리 아버지의 거룩함을 본받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1장의 마지막 부분을 가지고 구원과 형제사랑의 관계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배경은 고난의 삶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지금 많은 고난과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런 고난과 시련에 처한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고 고통 당하는 형제들을 서로 돌보고 사랑하면서 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I. 구원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구원\'이란 말 대신에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구속\'이라는 말은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일반인들에게 \'구속\'이라는 말을 쓰면 얼른 감옥에 갇히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구속\'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의미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종이나 노예를 풀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예를 풀어주려면 그 노예의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그 노예를 사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값을 치른다는 개념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노예를 회복시킨다는 의미가 가장 중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처음에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사실상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살던 시절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지금은 동산의 밖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서 다시 그 분과 함께 동산에서 사는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동산은 물리적인 동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구속, 즉 구원의 의미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1.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받았습니다. (18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구속적 활동의 결과는 사람들을 과거로부터 구속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과거를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헛된 생활로 묘사합니다. \'너희 조상의 유전한\'이라는 말은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생활방식을 가리킵니다. \'망령된 행실\'은 헛되고 쓸모없는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런 헛된 종교생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전통의 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여러 유전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 유전은 처음에는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들의 해석이 첨가되기 시작했고,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나중에는 그 해석이 그들의 유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 되는 유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유전을 자연스럽게 지키며 살았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전혀 거부감이 없이 지키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망령된 행실\'이라고 합니다. \'망령되다\'라는 말은 \'헛되고 공허하다\'는 뜻입니다. \'행실\'은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상생활\'을 의미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헛되고 공허한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들의 유전을 지키면서 삽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우상숭배와 미신이 들끓고 있습니다. 첨단 산업체도 처음 시작할 때에나 사업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사람들은 신문에 게재되는 띠에 따른 운세를 보고 운세가 좋으면 괜히 기분 좋아하고 운세가 나쁘면 괜히 기분상해 합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으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런 일들이 과연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없이 전통적으로 해 오던 일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따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들을 공허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하려고 애를 씁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 의학의 힘으로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발상이 그런 것입니다.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어보겠다고 계속 애를 쓰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줄 알고 미친 듯이 돈을 번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한이 되어서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에게 주면 행복할 줄 알고 죽을힘을 다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된 것이 아니라 폐인이 되는 예를 우리는 재벌 2세들을 통해서 종종 보아왔습니다.
공부만 잘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것도 역시 목적이 옳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공부를 못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고 지식인의 문제입니다. 최고의 지성들이 포진해있는 정계, 재계, 관계, 학계, 법조계 등에서 썩은 악취가 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은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언덕을 향해서 계속 돌을 굴리고 있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어보겠다고 헛된 노력을 해왔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삶이 그 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돈을 벌고 공부하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런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런 공허하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런 우리를 우리 아버지께서 구속한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공허하고 이룰 수 없는 일에 매여 살지 않도록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런 허무한 일에 매여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어보겠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런 망령된 행실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19절)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하셨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구속하셨습니까? 노예를 구속하려면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의 끝에는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을 통해서 구속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금이나 은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값이 될 수 없습니까?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은 분명히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값비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얻은 구원이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해방하는 대가도 역시 그런 영생에 합당한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영원한 것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가 되었습니까?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값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해방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유월절과 희생제사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물을 잡아서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사실은 죄를 지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동물을 희생제사로 드림으로 그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문자적으로 말하면, 동물희생은 인간의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동물과 인간은 창조 때부터 같은 부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결국 값이고 대가이므로 그 값이나 희생은 적절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희생은 결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적절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죄는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겉으로 흠이 없는 양을 잡는다고 해서 우리의 죄가 사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또 다른 인간만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물희생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완전히 성취하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그림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구약에 있는 희생제사의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은 흠이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에서 해방을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은 그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 대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3.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20-21절).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희생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인간이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하여 계획을 바꾸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우리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셨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그 예수님께서 나타난 것이 말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세에 대해 아주 편협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말세가 언제입니까? 말세는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세에 관심을 두면서 그 말세를 재림 때로 이해하는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초림한 이래로 말세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그 분의 놀라운 말세의 계획을 시작하셨습니다.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확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 사실을 증거하여 확신케 해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 분의 섭리 가운데에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이전에 행했던 헛된 생활을 반복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 형제사랑에 대하여
이제 베드로 사도는 형제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옮겨갑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형제사랑에 관하여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형제사랑의 기초는 바로 중생, 즉 거듭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않는 씨로 된 것입니다. 여기서 \'썩어질 씨\'가 가리키는 것은 다음 구절에서 나옵니다. 24절을 갈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베드로는 우리 육체를 씨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생명을 이어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에게 육신의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육신의 생명이 결국은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아무리 영광을 누려도 그 영광은 결국 풀에 있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지만 우리의 생명은 결국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유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썩지 아니할 씨는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항상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씨\'라는 말은 평소에 쓰이는 \'씨\'라는 말과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쓰인 단어의 강조점은 씨 자체보다도 그 씨를 뿌리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뿌려주신 말씀의 씨를 통해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살아 있고 항상 있습니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살아있고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씨를 누군가 자신의 사역자를 통해서 우리 마음 밭에 뿌려 주셨습니다.
25절을 보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통해 우리에게 이 복음의 씨앗을 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것은 결코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뿌려주신 말씀의 씨앗이 어느 날 내 마음에서 싹이 트지 않았습니까?
저는 저를 향해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제 형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세상의 썩어질 씨앗이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졌겠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그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제 안에서 싹이 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 거듭남은 형제사랑의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세상적인 친교에 불과합니다.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내 기분에 따라 형제사랑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형제사랑의 가장 중요한 기초요 전제인 것입니다.
2.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성화되어
야 합니다 (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우리가 진리에 순종한 결과는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깨끗해졌다\'는 말은 완료분사인데, 헬라어에서 이 완료형은 동작은 과거이지만 그 효과는 현재와 미래까지도 남아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예수의 거룩한 생명이 우리 안에 계속해서 거하게 됩니다.
여기서 \'깨끗하게 한다\'는 말은 능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의롭다고 칭함 받는 수동적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성화의 과정까지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화의 과정도 물론 성령님께서 주도하시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도 결단하고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만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결단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속적으로 순종함으로 점점 자라가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매일의 삶이 점점 더 다듬어져 갑니다. 그런 성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신자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구원은 동료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시작되었다면 점점 더 성화되어 갈 것이고, 그 결과 다른 신자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까?
본문은 첫째로, 거짓없이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거짓이 없다는 것은 위선적이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진실하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십시오. 마음의 벽을 헐지 않으면 결코 참된 사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목장모임에서 삶을 나눌 때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뜨겁게\'라고 번역된 단어는 \'끊임없이 인내하면서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남녀가 불꽃이 튀어서 서로 빠지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겠지만 그래도 흔들리지 말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서신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서신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쓰여졌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피차에 흔들리지 말고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절박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절박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일수록 형제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가 IMF를 만났을 때 실직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시련에서 그대로 무너져버렸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시련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남편이 돈을 벌지 못한다고 집을 나간 아내가 있었고, 또 자신이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다고 집을 나가서 노숙하는 남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간에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던 가족들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가정을 깨뜨리는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힘을 합해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대부분 가족간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변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을 때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한 몸이 된 교회도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그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 말씀으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핍박과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까? 그럴수록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III.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과 형제사랑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큰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온통 그 아이만 예뻐합니다. 어차피 자식이 하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온갖 사랑을 혼자 다 받으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아이가 조금씩 갈등을 느낍니다.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사이좋게 놀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면서 인격이 성장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제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영적인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거듭났을 때에는 자신만 생각하면서 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면 하는 대로 그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거듭난 후에 점점 더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삶이 성화되면 주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고통 당하는 이웃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내게 그들을 섬기고 돌보도록 요구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지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주변을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현재 연약한 지체가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지체도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로 크게 낙심해 있는 형제와 자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처음 교회에 나와서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한 형제나 자매도 있습니다.
왜 우리 주변에 그런 연약한 지체가 많이 있습니까? 저는 그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그들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형제를 사랑하면 그 형제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사실은 내게도 유익이 됩니다.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말씀으로 양육하면 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은 그를 양육하는 사람에게 더 축복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섬기면서 오히려 자신의 신앙이 더 성장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런 환경에 처한 형제와 자매를 섬기고 돌보면 인생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할 기회를 얻으면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더 바르게 섬기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내 신앙이 점점 더 성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형제사랑이 구원받고 말씀 안에서 자라가는 신앙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구원받은 믿음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형제사랑은 단순한 친목도모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 가족 된 다른 형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요즘에 새로 등록하는 새식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신앙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많아지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새가족들을 심방하면서 그 분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며 아름다운 신앙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사랑을 나눌 분들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가족들을 심방하면서 그분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사랑을 나눌 분들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로, 부부간의 문제로 어려움을 당한 형제나 자매를 지켜보면서 누군가 그들에게 함께 사랑을 나눌 가정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외롭게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의 마음의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분들과 깊이 교제하고 기도하며 편지로 사랑을 나눌 분들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 혼자만 신앙 생활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어려움을 당한 지체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아침에 그런 주님의 음성을 들으신 분들은 제게 자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을 사랑으로 섬기겠습니다. 제게 한 가정을 맡겨 주십시오.\"
\"목사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가정을 찾아가서 그를 위로하는 일을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런 은사를 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그 일로 섬기겠습니다.\"
\"목사님, 부부문제로 가정문제로 어려움을 당한 가정이 있습니까? 제게 그 가정을 연결시켜 주십시오. 저희 가정도 그런 문제를 겪은 적이 있는데 제 경험을 통해서 그를 위로해 보겠습니다.\"
\"목사님, 제가 선교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으로 중보기도하는 일로 섬기겠습니다. 제게 그 일을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자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성숙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부족한 중에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족한 중에 형제사랑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다른 형제와 자매를 섬기며 사랑으로 돌볼 수 있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아침 말씀 가운데 저희들에게 권고해 주시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여러 형제와 자매들이 주님 앞에 결단하고 손을 들어 표시했습니다. 하나님, 저희가 참으로 저희 혼자만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영혼 혹은 한 가정을 돌보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게 참으로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주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그렇게 주님 앞에 결단하고 다짐하는 영혼들을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늘 강건하게 세워주시어서 아버지 하나님,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신앙도 더욱 더 성숙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서 우리 교회가 점점 더 성숙해 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자라갈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해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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