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구속사적 이해-1/창6:9-22,벧전3:18-22
* 성도들이 노아시대의 홍수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 노아시대의 홍수와 방주를 통한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비토록한다. 방주를 통한 구원을 통해 그리스도 십자가의 속죄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비토록한다.
서론
지난주 복습 : 죄로인한 죽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 그 누구도 대신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누구를 위해서 희생하려 해도 결국 그 죽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이 왔듯이 둘째 아담, 죄 없는 한 인간의 희생적 죽음이 모든 인류의 죄를 청산하고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이것을 위해 이땅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직접 오셨다. 죄 없는 인간으로서 죄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자 함이다.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그 죽음이 하나님의 희생의 죽음임을 증명하셨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어디부터 시작해야 되는가?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 계시록? 마태복음.... 정답은 없다. 아무데서, 자기 편한대로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깨달아야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다. 아무리 지성이 넘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성경을 본다면 그처럼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것도 없다. 히브리 기자는 말하기를 \'율법\'은 장차있을 참 형상의 그림자라고 소개했다(히8,9,10장). 실체를 바라보고 그림자를 보면 짐작이 되어지는데 실체 없이 그림자만 바라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전혀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실체를 알고 그림자를 바라보는 신약의 성도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온 사실이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근거를 둔 고고학과 역사학의 사실에 일치 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이시대의 과학적 지식과 일치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일치하다가 나중에는 일치 안하기도 하고, 일치 안하다가 일치하기도 하고 그런거지.... 그런 일에데 우리의 정열을 기울일 필요는 없고 취미정도로 즐길순 있다.
그러나 율법의 실체를 아직 이 땅에서 접하지 못한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성령께서 특별히 감동한 한 대언자를 통해서, 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었고 율법이 해석되어졌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순수하게 성령의 감동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 또는 민족적인 유익을 위해 자신들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있었을 때는 율법의 완성이자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땅에 오셨건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영접지 않았을 뿐아니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이다.
적용 :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왜곡 시키고 있지 않은가? 편한 구절, 유익한 구절들은 찾아 암송하면서도 웬지 달갑지 않은 구절들은 애써 그 의미를 희석시키며 한쪽 구석으로 몰아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시대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우리도 그 유대인들 처럼 혹시 예수를 이단자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마음에 새기고 나서 성경을 다시 대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표되어졌다(그림자로 나타나 있었다). 비록 십자가만큼 생생하게, 분명하게,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실체를 믿고 바라보기에 충분했다.
도입
전개 - 본문 사건 소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전적 범죄 이후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교제가 단절되어 영적 죽음 상태로 지내게 되고, 비록 에덴동산을 쫓겨났지만 하나님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선물로 받은 가죽옷은 동물의 희생적 죽음을 보며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하던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는 가인의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범죄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나님께서는 형의 시기 속에 죽어간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시고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경건한 후손을 잇도록 은혜를 베푸셨지만 결국 경건을 이어갈 후손들 마저도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땅에는 사람들의 죄악들로 가득찼다.
노아시대의 대 홍수는 결국 이러한 인간들을 쓸어버리시고 인간들에게 다시한번 경건한 후손들의 번성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해 보자는 기회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120년간의 회개할 시간을 주고(창6:3 \'...내가 그들에게 120년 동안의 여유를 주겠다\'-현대인의 성경-), 노아에게는 그 기간동안 방주를 건조하도록 말씀하셨다(창6:13). 결국 노아의 가족들만 방주에 타게 되었고 그후 40일 동안 역사상 유일무이한 엄청난 홍수가 발생하고(창7:10-12) 물이 빠져 다시 인간들이 거주하게 되기에는 1년의 세월이 걸렸다(창8:13-14).
본론 - 홍수와 방주의 구속사적 의미 소개
1. 물(홍수)
벧전 3 :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21절에는 한 술 더 떠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고 함
\'물\'로 세상이 망했는데 성경은 표현하기를 \'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죽음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무슨 수수께끼같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paradox이다. 십자가란 죽음의 상징이다. 지금 이 시대에야 고상하게 여기저기 걸어놓고 왠지 십자가만 보면 거룩한 느낌이 들고, 고상한 느낌이 들고, 흥분하던 마음도 차분해지고...드라큐라 백작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 거기서 무슨 평안이 있고, 분위기가 나오겠는가? 죽음의 상징이다. 십자가만 보면 평온했던 마음도 불안해지고, 왠지 가슴이 뛰고, 꿈에 나타날까 두려운게 십자가다. 그렇지만 그 십자가가 죄 가운데 죽어있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죽음가운데서 살아나는 역사를 맛보게 된다. 마치 홍수로 인해 뒤덮인 물속에서 온갖 생물들은 죽어가지만 방주를 의지하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있었듯이 말이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산 꼭대기에다 건조하고 있는 커다란 배를 보면서 비웃었다. 아마도 그런 배를 건조하고 있었던 노아는 상당한 재력가였겠지... 사람들은 노아를 보면서 비웃었을 것이다. 멋진 항구에 띄울 유람선을 짓는것도 아니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나무 상자같이 생긴 배를 짓고 있는 노아... 돈 벌어서 쓸데 없는데다 돈 쓰고 있구만... 그저 우리야 가서 일해주고 품이나 받으면 되지....
오늘날 십자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전 1 :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상당히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십자가\'이다. 미련 정도가 아니라 재수없고, 기분나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 자체에 어떤 신비한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우리를 위해 달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기에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2. 하나님의 은혜
악한 세상을 바라보시며 세상을 쓸어버리시고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 먹으시면서도 당장 쓸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120년간의 시간을 주시고 방주를 건조하도록하며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착한 짓들을 하기 시작하여 그들을 선별해 내려고 \'방주 구출 Project\'를 수립하신게 아니라 방주를 보여주면서라도 경각심을 주어 회개하도록 촉구하신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도 마찬가지다. 회개하고 착한짓 해서 이쁜사람들 구원하러 오신게 아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때에(롬5:8)\' 십자가project를 시작하셨다.
노아는 묵묵히 방주만 건축한 것이 아니라 \'의의 전파자\'(벧후2:5)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선포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아무리 120년이지만 노아 혼자서 방주를 지었겠는가? 사람들을 동원해서 일시키며, 먹을 것 주어가며, 품을 주며... 사람들이 노아로부터 일의 대가로 뭔가 제공 받을때는 굽신 거리며 \'생각해 보겠다\'고 했겠지... 그러나 뒤돌아서서 비웃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심지어 \'홍수가 시작되어 다 멸하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다\'(마24:37-38)고 기록되어 있다. 120년 + 마지막 7일(창7:9-10)
예수님은 노아의 때를 예로 들어 설명하며 마지막 때가 그렇하다고 설명하셨다(마24:37-38).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멧세지를 선포하지만 비웃는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세상의 많은 쾌락을 즐기며 살아가지만 영원한 세상이 아니다. 심판의 때가 있다. 이 기간이 무한정 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지금은 구원받을 만한 때요 은혜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고후6:2). 그러나 무한정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때가 있다. 그 때는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예수님의 재림이 먼저일지, 아니면 개인적 종말이 먼저일지...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이 구원의 때요 은혜의 날이라는 것이다.
3.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만이 가능하다(22).
노아가 행한 일은 사람들에게 조소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막대한 노력과 부단한 인내, 그리고 전적인 자기 희생으로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절대적인 믿음의 발로였던 것이다(히 11:7). 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창6:18).
또한 아무리 방주가 완전하게 홍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타지 않으면 구원이 불가능하다. 노아의 방주 건조작업에 제 아무리 땀과 노력을 들이며 동참하였다 해도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아무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해도 방주에 타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다 지어진 방주를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으로도 구원은 안된다. 그 안에 타야만 되는 것이다. 멀쩡한 대낮에, 구름한점 없는 그때에도 믿음으로 심판의 멧세지를 받아들이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홍수 심판은 과거 역사로 덮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심판의 상징이며, 방주를 통해 살아 남은 생존자는 마지막 심판 때의 성도들의 구원과 영생의 상징이다(벧후 3:5-13).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이 있기 전의 상태와 유사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의의 전파자 노아의 외치는 소리가 오늘도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더 나아가 조롱하고 비웃고 있다. 믿음이 필요한 때다. 믿음은 사실을 인정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 까지 포함한다.
결론
노아시대의 홍수와 방주를 통한 구원은 단순히 흘러간 역사로 지나쳐 버릴일이 아니다. 물위에 떠 다니는 나무로된 방주는 죄 가운데 구원을 상징하는 나무 십자가요 마지막 심판대에서 구원을 약속하는 은혜의 상징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신약의 성도만이 바라볼수 있는 노아시대의 홍수와 방주의 진정한 의미이다(성경의 구속사적 해석).
이 시대를 향한 적용과 도전
이 시대와 노아의 시대를 비교해 보라
\'의\'의 전파자가 외로운 시대.
지금이 구원의 방주를 건축하는 은혜의 때(고후6:2), 한 해 더 덤으로 연장받은 시기(눅13:8)
120년의 시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리심. 그러나 때가 되면 방주의 문을 닫음.
정말 안타까운 사람들 - 방주 건조 사업에 동참하면서도 그곳에 타지 않는 사람들.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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