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원의 은혜 요일1:5-10 나는 얼마 전 미담이라고 해야 할지, 안타까운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 가슴이 찡한 장면 하나를 접했다. 중년의 아버지가 간경화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곧 암으로 발전하고 회생의 소망이 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가능성이라고는 건강한 간을 이식받는 것 말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아들이 간을 제공해서 두 사람이 수술실로 들어간다. 수술실 앞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마주친다. 아버지는 할 말을 잃는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고개를 돌리고 눈물만 흘릴 뿐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자식에게 도움을 주고 보탬이 되어야 할 텐데... 나 살자고 자식을 수술실에 보내다니...” 하지만 그 방법 밖에는 회복하고 살아날 다른 길이 없어서 아버지는 유구무언이다. 비슷한 환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큼 맘먹고 장기를 제공하겠다고 병원에까지 왔다가 고통과 상실감을 예견하고는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픈 사람이야 병을 치료하고 회복되기 위해서 수술이나 치료의 고통을 감수하겠지만 멀쩡한 사람이 배를 가르고 장기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감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아들이 참 대견했다. 생살을 찢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자기 간의 1/3을 떼 내어 아버지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아들이 먼저 퇴원을 하고 누렇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가던 아버지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아들에게 몹시도 미안했지만 이제 아버지도 살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아들도 그렇게 회복되어 가는 아버지 모습에서 큰 보람을 느끼는 듯 했다. 의술이 참 많이 발전되었다. 예전 같으면 목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살려낸다. 그런 의술이 있을지라도 지금도 병상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애태우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신장이나 간, 골수, 각막 등을 이식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정상적인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맘을 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자들 중에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간다는 보도도 있었다. 의료진 수준이 우리나라에 못 미치지만 거기서는 이식 받을 장기를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살 길이 있다고만 하면 무엇인들 사양하겠는가? 돈이 아깝겠는가? 수술의 고통이 무섭다고 하겠는가? 이식만 받으면 살 수 있고, 이식 받을 장기만 구할 수 있다면 세계 어디라도 가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제법 건강한 편이어서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하겠는가? 당장 암도 아니고, 간경화도 아니니 해당사항 없다고 안심해도 좋겠는가? 아니다. 성경은 줄기차게 우리도 같은 처지에 있다고 깨우쳐 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선언한다. 또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손가락만 배어도 병원을 찾고 몸무게만 좀 늘어도 다이어트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죽음에서 구할 방안에 대해서는 무관심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는가? 얼마나 심각한 무관심인가? 성경은 사람이 왜 죽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마련한다. 죽지 않고 살길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것이다. “내가 죽지 않고 살 길이 있다.”고 하면 두 눈, 두 귀가 번쩍 뜨여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시간도 이 말씀을 농담처럼 듣는 사람이 있을까 많이 염려가 된다. 소돔 고모라 성은 하늘에서 쏟아진 유황불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다. 그 유적이 아직 남아 있다. 거기 묻혀 있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었는가? 하나님의 사자들은 분명히 그 성의 멸망을 경고했다. 그렇지만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웃었다. “그런 일이 있을 법이냐 하냐?”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가 지금 멸망의 화석 속에 묻혀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복음으로 요약한다. 복음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그 복음이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알려준다. 그 죄 때문에 모두 죽는 것이라고 규명한다. 거기까지만 말하면 복음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복음인 이유는 사망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해결해서 영원히 살길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이 질문에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성경의 복음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을 구원하는 주님으로 마음에 믿는가?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의 백성된 확신이 있는가? 이 질문에 각자가 확실한 답변을 해보기 바란다. 아직도 불분명하거나 좀 어중간하게 느껴진다면 오늘 이 시간에 흔들림이 없는 확신에 이르기 바란다. 1.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 사람은 모두 죽는다. 남자도 죽고, 여자도 죽는다. 아이도 죽고, 어른도 죽는다. 병약한 사람도 죽고, 튼튼한 사람도 죽는다. 지위고하, 소유다소를 불문하고 모두 죽는다. 여기 있는 사람 누구도 “나는 죽지 않는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지는 말라. 그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미신이다. 우선 우리는 사람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원인을 밝혀야 한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롬6:23)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람이 질병이나 사고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가장 근본적인 사망이 원인이 죄라는 것이다. 사실상 일평생 사고 한 번 당하지 않는 사람도, 감기 한 번 안 걸려 본 사람도 죽는다. 모든 사람은 죽고, 그 죽음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면 결국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도 증명이 된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도 “나는 누구보다는 나으니 죄인이 아니다”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래 마음이 죄도 죄인이라니……. 그렇다면 나도 포함이겠지” 그렇게도 말하지 말라. 나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게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말씀드렸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막혀 있으면 나는 죄인이다.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나는 죄인이다. 내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으면 나는 죄인이다. 강도, 살인, 거짓 이전에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계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큰 죄의 원천은 없다. 사람의 영혼이 일깨워지면 그가 가장 먼저 회개해야할 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우리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으로부터이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셨고, 그 분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산다는 것은 곧 생명 줄을 끊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요17:3 성경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죄는 무엇인가? 사람 스스로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없는 무지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마치 독가스가 살포된 지역에서 “귀찮다.”며 방독면을 벗어 던져버리고 개운하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하고서는 “촛불을 켜 놓으면 독기가 해소된다.” “복식 호흡을 하면 좀 더 낫다.” “코를 막고 입으로 숨을 쉬면 좋다.”는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더 잘 살아지겠는가? 실상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죄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더군다나 인간 스스로에게는 그 바이러스를 극복할 방법이 전혀 없다. 물론 삶을 개선해 보겠다는 가상한 시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봐야 죽음 자체를 이겨내지는 못한다. 인간이 죽음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절망을 안고 사는 존재다. 멀리 가면 갈수록 아무런 소망이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가고 가면 다다르는 지점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큰 성공도 거기서 끝이다. 아무리 대단한 업적도 거기서 무산된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길로 간다. 그 정점에서 돌아서 보면 돈도, 명예도, 권세도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빈손으로 가면서 무엇을 얻자고 기를 쓰고 살았는지 무상한 세월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러분이 이 시간에 인생의 진솔한 모습을 찬찬히 훑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죽음 앞에서 남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일부러 여러분을 공포로, 좌절로 낙심으로 몰아넣을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반추해 보라는 것이다. 복음은 자기의 참다운 모습을 보는 데에서 시작된다. “나도 결국 죽을 인생이며, 그 원인인 죄가 나에게 도 있으며, 제법 많은 것이 가능하다고 느꼈던 내가 내 삶의 가장 근본적인 것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부질없는 존재라.”는 진실에 상당부분 공감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어야 진짜 소망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모든 불행의 씨앗이 죄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죄가 내 속에도 있다는 것도 알았다. 더 나아가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도 드러났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 안에서 스스로 해결책이 없다면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이 문제를 도와주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죽음을 향해서 줄서고 있기 때문이다. 2.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나도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도 이 문제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때에도 우리가 도움을 호소할 분은 남아 계신다. 바로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벌써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줄곧 그 분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신다. 나는 알지도 못하고 가는 그 길에 결론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고 계신다. 그 분께서 다정하신 목소리로 “내게로 오라.”고 부르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물론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른다. 그 음성도 잘 듣지 못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말한다. 반대로 죄는 어두움이다. 그러므로 죄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빛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밤에만 활동하는 박쥐란 놈이 밝은 빛을 얼마나 싫어하는가? 사람도 회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싫어한다. 마치 어린 시절 먼 나라로 입양되었다가 성인이 되어 조국을 찾아 왔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친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낯설어 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기까지 한다. 나는 이와 같은 반응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죄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인식을 가지기가 몹시 어렵게 느끼는 분 있는가? 계속해서 “하나님은 없다.”는 외침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분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자신이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껏 선행만 쌓으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죄인 됨을 증명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버리신 적은 없다. 사람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며 제 갈 길을 갖던 것이다. 그렇게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을 깨닫는 것에서 믿음의 시작될 수 있다. 회개는 그렇게 살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뛰쳐나가 버린 자식을 기다리듯이 가출한 자녀를 향해 “모든 것을 용서할 터이니 조건 없이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2)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누구라도 하나님께로 오기만 하면 용서함을 받고, 영생의 양식과 목마르지 않을 물을 공급받을 것이라 약속하신 말씀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마치 하나님께서 가장 아쉬운 분이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왜 그렇게 하시겠는가? 그것이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영생 얻는 길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면 어떨까? “돈 없이는 안 된다. 최소한 1억 원씩은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면회할 순번을 받을 수 있다.” 그랬다면 어떨까? “최소한의 자격은 갖추어야 한다. 시장, 군수 급에 준하는 사람만 와라”고 하셨다면 어떨까? “그도 저도 필요 없지만 선착순으로 와라.”하셨다면 여기 있는 분 중 몇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사랑의 하나님이 생명이 걸린 문제를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오라. 아무 조건 없이 오라. 값없이 돈 없이 와도 좋다.”하셨다.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 모른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조차 싸구려로 여겨버린다. 3.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영생의 진리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체념하고 사는 우리를 그 죽음에서 끌어내는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아는가? 심지어 영생이 있다고 해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워 믿음을 심어주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작업이 얼마나 큰 값을 치른 것인지 여러분은 아는가? 원리적으로는 인체의 모든 조직과 장기는 이식 수술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중, 각막(눈), 신장(콩팥), 간, 심장, 폐, 췌장, 골수, 피부 등의 이식이 주로 시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장기 손상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식해서 되살리는 비용은 얼마나 들어갈까? 우리나라 간 환자들이 중국으로 많이 건너간다는 보도를 말씀드렸는데 그 자료에 의하면 이식 수술의 직접비용이 5000만 원선, 초기 후기 진료비를 포함한 전체 비용이 1억 원 선에 이른다고 한다. 간 하나만 이식받는데 소요되는 비용이 그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 몸 전체를 새롭게 바꿔서 영생이 이르게 하는 데에는 얼마의 비용이 필요할까? 간 5000, 신장 3000, 둘 있는 것은 하나를 떼어 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심장이 망가졌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서부터는 값으로 계산이 안 된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다. 우리는 모두 잘해야 8, 90. 아주 특별해야 100년 정도 지탱하는 생명을 가졌다. 다름이 아니라 죄가 바로 우리의 생명을 그렇게 좀먹고 있는 것이다. 그 생명을 새로운 생명으로 교체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살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세상사람 아무도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기 죄로 죽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생으로 살리려 하셨다. 이 땅에 아무도 죄악의 사망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그 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다. 죄는 하나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가장 흉악한 죄인이 되어 사형을 당한 것이다. 여러분 그 십자가가 바로 영생이식이 현장인 것이다. 우리를 오염시켜 병들어 죽게 하는 모든 죄를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선한 생명을 우리에게 이식시키는 하나님의 시술이었던 것이다. 본문 7절의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진정한 구원과 참된 축복을 바라는 성도 여러분!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처럼 우리 죄를 대신해 줄 사람이 없다. 아무도 예수님처럼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를 살려낼 사람은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공자님이 매우 훌륭한 분들이었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그 분들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은 분들은 아니다. 그 분 자신들이 죄와 욕심을 버리는 삶을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살아보라고 가르친 것뿐이다.( 내 말이 아니고 그 분들이 말이다.) 우리나라 분들은 조상숭배에도 열심이다. 앞선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는 일은 늘 강조되어야 할 좋은 전통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조상들은 그 분 자신들의 삶을 살고 가신 것뿐이지 그분들이 후손들의 삶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살아 있는 부모도 대신 못하는 일이 많다) 누구든지 살아 있는 동안 자기의 분복을 누릴 뿐, 죽어서 다른 이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일 뿐이다. 마땅히 죽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신이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공급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뿐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낼 수 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만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의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값싼 구원이 아니다. 세상을 다 가진 갑부가 그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하는 구원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졌다 해도 그 권력으로 바꾸지 못하는 구원이다. 하나님이 그 구원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이제 결정을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그처럼 귀한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주시지만 “그래도 나는 필요 없다.” 할 수 있다. 그러고 죽고 망하는 길로 가면 된다. 대신에 “내가 이제껏 하나님을 몰랐던 죄를 회개합니다. 나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고백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그 분은 넓은 풍에 안아주실 것이다. 하나님 집의 모든 좋은 것으로 누리게 해주실 것이다. 어정쩡한 믿음에서 벗어나라. 확실하게 복음을 믿고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는 믿음을 시작하라. 십자가를 마음에 품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죄에서 용서받고, 영생 얻은 확신-를 가지지 못한 믿음은 아직 믿음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