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함과 구원 눅17:11-19
불치의 병으로 사경을 헤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나음을 입었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럴 때마다 이러한 문제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궁금해하는 분들도 꽤 많이 있다. 이런 분들의 궁금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과연 이러한 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러면 병 고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본문은, 물론 다른 의미들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지만, 이러한 궁금증에 대하여 명쾌하고도 분명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본문의 주인공들인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확실히 불치의 병을 스스로의 육체에 가지고 산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모세의 율법에 의해 성 밖에서 혼자 살아 가야하는(레위기 13장) 사회의 소외 계층이요, 현대의 의학으로도 완치가 불가능한, 인간적인 면에서 매우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들은 예수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긍휼을 구한다.
예수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이 문둥병자들의 몸을 보고 정결하다고 인정해야만 성 안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살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들은 문둥병자들은 모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이것은 대단한 믿음의 행위이다.
즉 우리가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무런 치료 행위를 하지 않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만 하고 계시는 주님의 명을 따른다는 것은 사실 이만저만한 믿음의 행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하다못해 상처부위에 안수라도(?)하고, 위하여 기도라도 해주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마는 본문의 주님은 전혀 다른 행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 고 하시며 또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 문둥병자들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옛날의 나아만 장군은 이 정도의 믿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나아만의 대화를 보자.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어라\\\'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當處)위에 손을 흔들어(안수하여)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왕하 5:10,11)
사실 이 정도 이야기가 보통사람들의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물론 여기서도 나아만 장군은 그 종들의 지혜로운 충고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그 문둥병을 고치긴 하지만 아무런 치료나 기도나 안수의 행위없이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요단강 물에 몸을 담그기까지에는 적지않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사안(事案)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문둥병자 열명은 약속이나 한듯이 나아만 장군같은 불평 한 마디 없이 주님의 능력과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을 향하여 출발한다. 이를 두고 어찌 문둥병자들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본문의 기록대로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모두 깨끗함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임한 축복과 은혜는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인간의 기술이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 말은 그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말씀을 믿었기 때문도 아니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나음을 입은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어감의 차이에 주의하길 바란다.
기도했기 때문에, 믿었기 때문에, 순종했기 때문에 은혜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니다. 물론 기도할 수 있고 믿을 수도, 순종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조건이나 원인이 되어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확실히 이들 문둥병자에게 임한 은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이다.
여기에 재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기했던 첫 번째 궁금증은 해결이 된 셈이다. 분명히 이들은 주님을 믿었고 주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구원받은 사람인가. 애석한 점은 깨끗함은 열 사람 모두 받았지만(17절) 구원은 이방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받았다(18-19절)는 점이다.
어째서 그럴까. 이 점을 간과하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십상이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은 아니다. 깨끗함이라는 은혜를 받음에도 분명히 믿음의 요소가 작용하지만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우리 인간들과는 사뭇 달라서 당신의 해를 악인에게도 비추시며 선인에게도 비추시고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관계치 않으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마5:45).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확실히 믿으시는 독자 여러분! 햇빛과 단비를 받아 그것으로 인하여 즐거운 인생을 영위하는 것은 누구의 은혜인가. 오늘도 산소를 호흡하고 살 수 있는 것은 또 누구의 선물인가.
이 모든 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극진하신 보호하심과 섭리하심의 은혜일진대 그렇다면 이런 은혜를 받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른 사람들인가. 아니라면 불치의 병을 고침 받은 은혜와 햇빛과 단비를 받아 우리가 사는 은혜는 서로 그 질이 다른 것인가. 병 고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병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인간적인 표현을 빈다면 불치의 병을 고침 받은 것은 그러한 병에 걸리지 않고 사는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느껴지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리 불치의 병을 고침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래서 이제부터는 하나님만 섬기고 위하여 살겠노라고 다짐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에 이르게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무엇이 이방 사마리아인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한 믿음인가. 이것을 모르고, 이러한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 병 고침은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구원받은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보자. 15절을 보면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다\\\' 고 되어 있다. 여기서 이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그의 문둥병을 낫게한 분인 예수의 명령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주님의 명령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고 하셨다. 그렇게 본다면 이 사마리아인은 주님의 명령을 지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 명은 기록은 되어있지 않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이행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했다고 칭찬받을 사람은 돌아온 한 문둥병자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고 깨끗한 몸으로 성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기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살아갔을(문둥병을 고침받고 이렇게도 못 살았다면 아마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이 아닐 것이다) 아홉 문둥병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라는 선물은 왜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돌아온 문둥병자에게 주어진 것일까. 돌아왔다는 것을 단순히 인간적인 감사와 인사 차원에서 보지 않으시길 바란다. 더더구나 \\\'치료비\\\' 차원의 헌금을 내기 위하여 왔다고도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이방 사마리아인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게 가장 온전한 제사장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이다.
다른 아홉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약점을 가진 제사장을 향해 갔지만 (히 7:28)\\\', 그래서 이들은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려도 언제든지 죄를 없이하지 못하는 제사장(히 10:11)\\\' 에게로 가서 자기들의 몸을 보였지만 이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지신 제사장(히 7:28)\\\', \\\'곧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히 10:12) 다시는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게 만드신(히 10:18) 온전한 대제사장(히 5:9)앞으로 와서 자기 몸을 드렸기 때문\\\' 이다.
이 사실을 보게하고 깨닫게하여 그로 하여금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한 주체가 바로 \\\'그의 믿음\\\'(19절) 이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선물로 받게하는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 이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없으면 모두 병이 나았다는, 깨끗함을 입었다는 그 한가지 사실에 도취하여 세월가는 줄 모르고 살다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실족\\\' 의 지름길이다.
깨끗함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병 낫지 아니함만 못하다. 왜냐하면 깨끗함을 구원으로 오인하여 영영 구원의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하게 되었을 때 이들이 모두 가나안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지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것과 같은 신나는, 화끈한, 가슴 뭉클한 신앙의 체험을 가지고서 홍해변에 천막치고 앉아 먹고 마시고 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노하셨는가 (히3:16). 과연 누가 광야에서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고 멸망 당했는가. 그렇게 놀고 있어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능히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리라고 믿는가. 사랑이 바뀌어서 질투가 되고 사랑의 배신이 격노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몇몇가지 하나님의 외적(外的)인 은사를 받았다고 그것이 곧 \\\'구원\\\' 인양, 그것이 곧 \\\'안식\\\' 이며(히 4:10) \\\'영생\\\' 인양(요 17:3)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러준 말로(본문의 문둥병자에게 하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는 말) 이미 깨끗하여졌으면 이제는 그분 안에 거하자(요 15:3-4).
여기서도 깨끗함이 목적이 아니며 거함이 목적이다. 열매도 목적이 아니다. 열매는 그 거함의 단순한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몸인 교회의 상태, 즉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움으로 세우시는(엡 5:26-27) 교회의 상태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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