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문 눅13:22-30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님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물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원의 도리입니다. 구원의 책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구원\\\' 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원\\\' 이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내용이 되지를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어찌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가진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 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관하여 그 길이 참 쉬운듯 하면서도 또 쉽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추종자들은 이 문제 때문에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들에 대하여도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유사한 질문을 합니다. \\\"주여 구원을 받은자가 적으니이까?\\\" 많다면 어느정도이며 적다면 또 어느정도인지 알아야 나름대로 확률적으로 계산도 해보고 그래서 가능성을 점쳐 보고도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이 한 주간 내내 뉴스의 중심에 있어서 세상에 어떤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만큼 요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상봉한 사람들 몇백명은 대단한 행운의 주인공들입니다. 어떤 기사는 보니까 이런식으로 만난다면 앞으로 500년은 걸릴것이라느니 하면서 가능성과 희망을 점쳐보곤 했습니다. 구원의 문은 작을 것인가 큰 것일까?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직접 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작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크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내가 이렇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저의 경우에 구원문제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구원문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 문을 넓게 열어보입니다. 이에 대한 인용의 말씀들들 이야기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확실한 구원관을 가진 자들이면서 분명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겐 구원의 문제를 절대 쉽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접근방식이 이런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절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넓게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고 통과할수 있는 넓은 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고 통과하는 자들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게 안타까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집 비유를 통하여(눅 14:15∼) 초청된 자들이 하나같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대하는 것을 말씀했고 결국은 초청받지 않은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채우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좁은 문을 통하여 가는 사람> \\\"구원을 얻은 자가 적으니이까?\\\" 라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바로 \\\'좁은문의 비유\\\' 입니다. 그들은 \\\"많으니이까?\\\" 라고 묻지 않았고 \\\"적으니이까?\\\" 라고 물었던 것에 주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확실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자세이지 어떤 가능성과 자격에 비추어 안전판을 확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보아도 신앙인의 냄새가 조금도 풍겨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자면 할말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잘못된 교리에 빠져 있으면서 그 교리를 맹신하며 자신만만해하는 사람과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좁은문을 볼줄 알고 좁은길을 갈 준비가 되어있는 자가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입니다. 확신이 무엇입니까? 대상이 분명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이제는 바라보며 그가 인도하는대로 나는 갈 수 있다는 자기선언입니다. 믿음이 많고 적음이 아니고 그를 많이 알고 적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믿어도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수십년을 교회생활해도 확신은 없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넓은 길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다 가야하는 것도 아니며 좁은 길이라고 해서 많이 갈 수 없는 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좁은길로 가라!\\\" 그러면서 상징적으로 교훈해 주시는 말씀이 좁은문으로 가려는 자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넓은 문으로 간다고 하여 구원받는 자가 없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주문을 하실 뿐입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넓은 문으로 가기를 원하고 선택합니다. 그러나 적은 무리들은 좁은문으로 가려 합니다. 결과를 보십시오. 좁은문으로 간 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넓은 문으로 간 자들은 완전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문으로 들어가시렵니까? 저는 넓은 문으로 갈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순간순간 그 길을 편하게 가는 자들이 부러워 보이고 나의 가는 길을 후회할진 모르지만 우리 주님이 더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싶고 주님이 더 동행해 주실 수 있는 길에서 그를 바라보며 사는것이 더 좋습니다. 남이 나를 더 인정해 주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좋습니까? 내가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안전해 보이는 것이 무슨 안심이 됩니까?
적은 사람들이 가는 좁은 문의 길을 가는 것은 진정으로 \\\'주님만을 바라 보는 자\\\' 가 갈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충동질하는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럽고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귀를 더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말은 선택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힘쓰라\\\' 는 말은 군사적 용어로서 \\\'전력을 기울이라\\\' 는 뜻입니다. 좁은문으로 가기위해 온 힘을 다하여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관계성이라는 신용카드> 구원의 문은 항상 열려있는 문이 아닙니다. \\\'구원문제\\\' 만은 아슬아슬한 확률에 도전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확실한 구원이며 안전한 구원이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받은줄 알았는데 가보니 문이 열려있지가 않습니다.(25절)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7절에 보면 이들을 가리켜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합니다. 이들은 왜 주님에게 외면 당하는 자들이 되었을까요? 그들은 문이 닫혀지자 자신들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길거리에서 가르치신 것을 들었다\\\" 고말합니다. 마태복은 7장 22·23절에서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도 쫓아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비록 그들이 함께 먹고 마셨고 그의 말씀을 들었을지라도 들었을뿐 행함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가지고 귀신도 쫓아내고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노릇을 했어도 그 능력들이 요술 방망이처럼 휘두르며 자신을 위해 사용했을 뿐이지 주님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있는 기도원만 가보면 목사라는 선지자적 직함을 가지고 명함만 수십통씩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이름 소개하면서 집회인도 sales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의 은사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과장하여 전하면서 자신에게 기도 받으라고 하는 은사 세일즈맨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 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주님은 우리를 관계로서 아시는 분이십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골고다의 피흘린 십자가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또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기도하며 애썼던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성\\\' 은 내가 구원의 문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는 신용카드와 같습니다. 구원은 관계성이 분명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인 것입니다. 관계성이 없는 종교적 행위는 가식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에 대하여 주님은 \\\'행악자\\\'로 까지 간주하고 계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가족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친구의 관계로 서 있어야 합니다. 가족과 친구는 함께함과 함께 하고픔이 늘 있는 관계입니다. 그렇지 못할때는 가슴에 한이 될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인 것입니다. 아무리 내게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순수하고 친밀한 관계성이 아닌 그를 통하여 나의 이익이나 취할 정도의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면 그들은 주님 앞에서 모른다고 외면 당하고 행악자도 간주될수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됨일까 나중됨일까> 신앙은 경주에 비교됩니다. 골인지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의 삶에 비유되는 것입니다. 출발에 차이가 있고 달려가는 모습이 제각각이며 도착되는 것이 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서 충격적인 비교를 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있느니라\\\" 는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라는 권면은 먼저됨의 욕심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큰 문으로 가지 말라는 것은 나중됨의 경계를 하라는 것이며 또 구원받지 못하는 위험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좁은 길을 가야하는 이유가 있는 인생입니다. 꼭 \\\'먼저된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자는 먼저된 자로서 나중에도 먼저되는 모범적인 신앙인입니다. 어떤자들은 나중되었지만 먼저되는 열심있는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되었음에도 나중되는 부끄러움에 빠집니다. 심지어는 구원에서도 닫힌 문 앞에서 하소연하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구원의 문이 넓게 열려 있습니다. 이 넓은 문은 모든 민족과 나라에 대하여 모든 계층과 신분에 대하여 열려 있다는 의미이지 제멋대로 살아도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길로 어떤 문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넓은길입니까 좁은길입니까? 넓은문입니까 좁은문입니까?
우리가 사는 지금의 시대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더 넓게 열린 구원의 문의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좁은 문으로 가기 보다는 넓은 문으로 가고 싶은 유혹이 가장 큰 시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편리를 쫓듯이 신앙에서도 편리를 쫓으려고만 하지는 마십시오. 일부러 고행하듯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일 수 있다면 쉽게 포기하고 바꾸고 하지 마시고 묵묵히 그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자원해서도 선택해야할 좁은길일진대 주어진 좁은길이라면 감사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은 이 길을 가는 자들에게 더욱 크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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