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과 구원 눅7:36-50
오늘 구속과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말씀 가운데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선별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요한 7:53-8:11절까지 연결되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오늘 생각할 내용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셨다가 다시 아침 일찍 성전으로 나오시는 자리 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와 율법으로 정죄해서 돌로 쳐죽임으로 살아날 길이 없었던 한 여자를 예수님 앞에서 죽지 않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 다. 이것은 복음의 기초이며 시작입니다.
세상에는 복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의 복, 부의 복, 명예의 복 등 여러 가지 복이 많이 있지만 복 중에서 복은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최고의 복입 니다. 우리 믿음에도 결국이 있습니다. 믿음대로 물위를 걷는 것,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문둥병이 낫는 것, 소경이 눈을 보는 것,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 등이 있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이르는 것이 믿음의 결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믿음의 결국이 곧 영혼의 구원함이다\' 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여러 가지의 표적을 받고 믿음의 증거를 받는다 할지라도 영혼으로 구원을 이룸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과실나무가 잘 자라서 주인 보기에 풍성하고 무성하게 자란다 할지라도 베다니에서 나오시던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보실 때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나무에 저주하여 뿌리에서 잎까지 말라버렸던 사실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정죄 당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과정은 죄에서 정죄 받지 않고 죄에서 의의 세계로 옮겨놓은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 러나 이 첫 번째 관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첫 번째 관문은 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관문인 지성소에 들어가지 않고서 는 참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믿음으 로 믿음에 이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표적적인 믿음 즉 병 고치고, 물위를 걸어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는 세상이 사랑하는 표적의 믿 음에서, 영혼으로 들어가는 믿음에까지 들어가지 못한다면 모두가 헛것입니다.
마치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여 주인이 찍어버리겠다고 할 때 종이 일년 만 참으소서 제가 거름주고 잘 기를 테니 내년에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찍어버리 소서 하는 주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처럼, 우리 신앙도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예수 믿고 있다 하는 일차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휘장이 찢어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는 믿음, 즉 육체를 통과해서 육체의 밖에서 주님을 보는 영생의 실체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구속과 구원을 분별해 보면 `구속\'은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죽음에서 삶을 받은 것인데 우리는 이것만 보았을 때 구원을 받은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여자가 나중에 어떤 생활을 했느냐 하는 것을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서 죽게 될 때 예수님께 삶 을 얻은 여자와 과거에 문둥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의 절망 속에서 병 고침을 받 았던 시몬과의 비교가 나타납니다. 둘다 베다니라는 한 동네에 있었는데 예수 님께 식사를 대접하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한 여자가 준비해온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눈물로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사랑함이 많은 것을 보시고 이 두 사람을 비교하여 주님은 오십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백데나리온 빚진 자로 둘 다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두 사람에게 다 탕감해 주었을 때 두 사람 각기에게 나 타나는 사랑의 차이가 있듯이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에게 구원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자에게는 죄사함을 얻었다 고 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는 것과 사하여졌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죄하지 않는 것은 집행유예와 같고 사하여 졌다는 것은 완전히 끝난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기억치 않고 생각지 않는 죄를 아주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것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해방되었으나 그 소식을 먼저 들은 사람들은 먼저 알았을 뿐 나중에 들은 사람도 이미 해방은 된 것입니 다. 우리가 죄인 되어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어린양 독생자를 통하여 다 이루 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마치 구원의 씨를 받은 밭과 같습니다. 그 밭은 주님이 말씀하신 길 가 같은 밭, 돌짝 같은 밭, 가시덤풀 같은 밭, 옥토와 같은 밭과 같습니다. 소망 의 씨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한 일을 행 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는 것이 마지막 우리들의 갈림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기 때문에 첫 번째 정죄함은 없습니다. 이 것만 깨닫는 것이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어느 교인이 저에게 \"형제님은 구원 받으셨습니까?\" \"예.\" \"언제요?\" \"옛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 하셨을 때 받았습니다.\" 했더니 이해를 못하면서, \"우리 목사님은 18년전에 구원을 받았다는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천하 만민이 다 정죄함이 없 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고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 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하심 같이 천하 만민의 죄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다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죄함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에 연합이 되지 못 하여 다시 죄인으로 나타나면 멸망의 부활로 나오며 심판의 부활로 나오고 생명 의 부활로 나오지 못함을 확실히 알고 우리의 행함을 연합시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흘려 대속해 주셨습니다. 피없이는 사함 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상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예수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이 세 상에 꽉 차있는데 그 예수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 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 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생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날 사랑했다 나 정죄치 않는다, 나 구원받았다, 내 구원만 따지는 구원파들은 그 속 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예수의 죽음에 자기 죽음을 포함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 죽어서 나는 살았고 예수 고생 받아서 나 편하고 예수가 무덤에 들어가서 나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복음으로 죄를 가리우려는 데 사용하고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 죄의 정죄함이 없다는 양심의 화인 을 맞아 자기 십자가를 부인하는 사람들 즉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복음으로 행세하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정한 것에 손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애원하는 열 문둥이들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가는 도중 병이 나아 기쁨에 넘쳐 전부 가버리고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을 때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 은 어디 있느냐?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눅 17:11-19) 이것이 완전한 구원입니다.
문둥이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은 것은 구속이요 집행유예입니다. 가서 다시 는 죄짓지 말라는 것도 집행유예입니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한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 받은 것은 구속입니다. 그 후 일만달란트 탕 감 받은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잡아다 옥에 가둔 것을 안 주인은 도 로 불러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옥에 넣듯이 주님이 우리 죄를 탕감해 주신 목적이 있습 니다. 이는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이루어집니다. 내 모든 것을 아직 버리지 못 하고서는 주님의 생명과 연합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과 부 활은 있어도 나의 십자가와 무덤과 부활이 없는 자는 주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철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실체를 부정 하는 복음주의가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복음, ××복음 하는 복음주의 자들이 복음의 왕좌에 올라와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 있으면 유대인은 산으로 도망가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피해서 오 직 `구속\'아닌 `참된 구원\'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애굽에서 탈출해 홍해를 건넌 천만 민족들은 함께 춤추며 기뻐 노래했지만 후에 광야에서 믿지 않는 자는 모 두 멸하였습니다.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해서 주인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 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주인이 쓰기에 합당치 못한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을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맥으 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 맥은 첫 아담은 없어지고 새로 싹이나는 그리스도 생명 의 맥입니다. 이 맥을 따라서 내가 이제는 세상의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요 나 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길이 새롭 고 산 길이요,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 길로 누가 들어와 걸어오느냐\" \" 이 시온의 대로에 누가 와서 내 앞을 향하여 오느냐\" 이제까지 우리를 향해 탄 식하시면서 하나님은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버이 심정 같이 우리를 기 다리고 계시는 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떠나는 길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 마치 내가 이렇게 사랑을 받았으면 다시 사랑을 세상에 빛으로 비취는 역사를 원해서 모인 곳이 참빛 선교회의 길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역사가 세 번 있었으니 첫 번째는 본문(눅7:36-)에 있었 고, 두 번째는 유월절 6일전 (요12:3)이요, 세 번째는 유월절 이틀 전(막14:3)에 머 리에 부었습니다. 발에 두 번 붓고 마지막에 머리에 한 번 부었습니다. 이 모 든 일이 베다니 동네에서 간음 중 현장에서 잡혔던 여자에게서 일어난 일들입니 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에 의한 계시의 정신으로 사건의 인물과 각각 다른 시 기와 장소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내용 중에 주님께서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 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함을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념이 표상이요 청사진이며 교과서입니다. 이 죄인 여자처럼 우리들은 값 없이 속량함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시켜 육신의 남은 때를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 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새 생명이 열매입니다.
이 열매의 씨앗이 그리 스도의 평강속에 들어갈 때 몇 십배 몇 백배 결실이 맺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여자를 기념하는 시간 속에 우리 신앙의 방향과 능력과 힘을 받고 능력주시 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사도들의 고백을 음미하고 맛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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