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크신 은혜

구원의 크신 은혜/눅7:36-50

구원의 크신 은혜
눅7:36-50





지난 금요일에 7구역 성도들 가정을 심방하다가 점심 때가 되어서, 같이 심방하던 분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앉은자리에서 한 테이블 건너편에 4명의 남자가 식사를 하고 있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앞에 나가는 사람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허리띠를 뽑아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더니 조금 있다가 식당 유리창이 쨍그랑하고 깨지는 것이었습니다. 온 식당 바닥에 유리 파편이 튀어서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만히 보니 허리띠 바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허리띠를 무기 삼아 막 휘두르다가 바클이 빠져서 유리창으로 날아든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앉아있던 두 사람도 사태가 심상찮아 보였든지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아마 말리러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네 사람이 밖에서 도로 들어 왔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둘러앉아서 식사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속으로 참 희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리띠를 휘두르면 상당히 위험한 흉기가 되는데 그 정도 험악하게 싸웠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텐데, 곧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함께 오순도순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한참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또 어떻게 저렇게 쉽게 화해를 할 수가 있는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런 말들을 흔히 듣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막걸리 한 사발 같이 마시면 감정 다 풀어버리고 화해하는데, 믿는 사람들은 한번 감정이 안 좋아지면 평생 화해할 줄 모르고 원수로 지낸다\"는 얘기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옹졸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정말 그 식당에서 일어났던 일이 안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화해를 잘하는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허리띠를 뽑아서 휘둘렀다면, 그렇게 간단하게 화해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휘두르는 허리띠 바클에 제대로 맞으면 상당한 중상을 입을 것이고, 눈에 맞으면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넘어갈 수가 있습니까? 그런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이 넓어서 어떤 일이라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자기에게 중상을 입힐 수도 있는 폭력을 휘두른 사람을 간단하게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그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정상적인 상황으로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일어나게 하는 어떤 무엇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게 뭘까요? 알지도 못하는 일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기가 좀 뭐합니다만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간단하게 화해하는 것은 반드시 어떤 이해관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하고 원수로 지내봐야 손해만 당하고 국물도 없다고 생각할 때 그런 심각한 문제를 그렇게 간단히 화해해서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화해가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막걸리 한 잔 놓고 그렇게 화해를 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차원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 따지고 화해를 잘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속이 더 옹졸하거나 도덕성이 그들보다 더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이 화해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마음 넓게 먹지말고 옹졸하게 먹어라\" 고 가르치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선한 말씀을 한 자라도 더 듣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면 더 옹졸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더 도덕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도덕적이기에 잘못을 적당하게 넘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도덕성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도덕이고 윤리고 없이 간단하게 한 편이 되었다가, 또 자기의 유익을 따라서 간단하게 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엇이 옳은 것이냐, 무엇이 그른 것이냐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잘 따지고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잘 화해를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지를 못하고 언제나 거기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물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전혀 의미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교훈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옳고 그른 것을 잘 구별하여 따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잘 따지는 것은 유교입니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 얼마나 잘 따졌습니까? 정치가들이 남인 북인, 동인 서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서 얼마나 기막힌 논리로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었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분명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같이 한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한 죄인인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창녀나 기생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 여자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얼마나 흘렸기에 발을 씻을 정도로 흘렸겠습니까?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죄인인 것을 알았을 것인데....만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보니 이 여자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선지자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서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라고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네 대답이 옳도다\" 하시면서 \"이 여자가 이렇게 내게 행동하는 것은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리새인이 여자보다 더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두 사람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았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았다고 말씀하는 것은 바리새인이 죄를 덜 짓고 그 여자가 죄를 더 많이 지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느끼는 감도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에게 가장 신랄하게 정죄를 당한 그룹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과 여인의 차이는 여인은 자신이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바리새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 그것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자와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느끼는 강도(强度)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느끼니 더 사죄함의 은혜에 감격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가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바리새인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하나님에게 받은 사죄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지옥에 갔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지옥에 간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지옥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가 당연히 지옥갈 것을 간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억울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가 아니면, 당연히 지옥에 갈 존재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일은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므로 절대로 사람이 억울해 하는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불에 들어가 고통당하여야 마땅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스로를 지옥에 가서 마땅한 존재하고 생각하십니까?

지옥에 관한 말씀을 드려서 부담이 되기도 하고 듣기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기 위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공통적이고 가장 위대한 은혜는 바로 지옥의 멸망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치하게 무슨 지옥, 천당이냐? \" 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분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를 지옥에 가서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논리적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믿는 것이지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뭐하러 예수 믿습니까? 제가 목사지만 제가 지옥가서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면, 저는 예수 안 믿습니다. 예수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예수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의 문제의 해결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어떤 것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이 기초가 확실하지 못하면 그 위에 다른 교훈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이 없는 것도 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해서입니다.

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가장 빈번하고 현저한 현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어떻게 보면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율법주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인간이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죄인됨을 절감하고 그 죄의 정죄, 곧 지옥의 멸망에서 건짐받기를 사모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율법 앞에서 지옥의 정죄를 받을 죄인임을 알지 못할 때, 그에게 율법은 자기의 의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만 못한 사람에 대하여 자연히 정죄와 비난의 도구로 율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바로 전형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서는 내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지옥에 가서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그의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지옥에 갈 존재가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사실 때문입니다. 나를 지옥에서 건져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격, 이 것이 가장 큰 감격이고, 가장 가치있는 일에 대한 감격이며, 가장 위대한 사실에 대한 감격인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격이 없는 심령이 바싹 메마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 교인이 자기를 보고 \"저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갈 사람이야.\" 라고 말했다고 분개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내가 부족하긴 해도 지옥불에 들어갈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심한 말을 하더라\" 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지옥 불에 들어갈 사람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도 지옥 불에 들어갈 사람입니다. 단지 그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 형벌을 면제받은 것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이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구원의 감격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앞에 이 여자와 같이 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바리새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까? 그는 세상적 관점으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에게 받을 엄청난 은혜를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가 많이 납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납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도 많이 납니다. 나쁜 사람과 선한 사람의 차이도 엄청납니다.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차이도 많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은 그리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인생이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 받아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받고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지옥의 영원히 고통스럽게 하는 그 유황불 앞에서, 세상적인 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됩니다. 사람의 잘났고 못난 면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못되고 잘된 것에도 너무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우리는 다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서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세상에 자랑하는 모든 것들이 초라해질 뿐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관점으로 세상도 보고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포용할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여자를 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용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시몬은 세상적 관점에서 사람을 보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 즉 성경적 관점에서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성도 여러분 따지는 것은 율법입니다. 따져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눕니다. 분리시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죄인과 의인을 자꾸 나눕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가 \'분리하는 자\' 란 뜻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나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주의자도 따집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지식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속으로 할 뿐입니다. 겉으로 발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 따짐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주심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적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모든 것을 볼 때, 이렇게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가 있고, 용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남을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어떤 사람의 악함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누릴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