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이 구원 하심을 바라 보리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3:1-6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눅3:1-6





제가 1986년에 보스톤에 온 이후로 가장 눈이 많이 오지 않았는가 합니다. 그 이전에도 눈이 많이 왔던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집이 파 묻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차가 눈에 파 묻혀서 움직일 수도 없고, 마켓도 열지 않아서 며칠 간 집에서 버너를 피워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 때 이후로는 가장 눈이 많이 오지 않았는가 합니다.

여러분은 온통 하얗게 덮인 눈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셨습니까? 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동요 하나 들어 볼까요? 어효선 씨가 작사하고, 한용희 씨가 작곡한 노래인데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라는 노래입니다 (http://www.indiana.edu/~korean/learning_korean/audio/blue_song.mov).

성경에도 눈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1:18에 나오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너희 죄의 문제에 대하여 그 이유를 찾아 보자. 너희 죄가 주홍색(scarlet) 처럼 붉지만 눈처럼 깨끗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눈이 하얗게 덮이니까 더러운 것들이 다 가려지고 온 세상이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고, 순결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나 있고, 그 길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눈이 녹고나면 다시 더러운 것들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전보다 더 지저분하고 더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워진 삶은 삶의 근본(根本)부터 바뀌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하얗게 덮인 눈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을 그렇게 아름답게 해 주시도록 소원하십시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성경에 의하면 직업이 의사(醫師, physician)였다고 합니다(골로새서 4:14).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탁월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상당한 식견(識見)을 가지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모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독자들의 이해(理解)를 돕기 위하여 그 자료들을 “순서대로(in order)” 기록했습니다(누가복음 1:3-4).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누가복음은 데오빌로(Theophilus)라고 하는 사람에게 적어 보낸 사적(私的)인 편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 데오빌로라는 사람의 신분은 우리 말 성경에 “각하(閣下)”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most excellent Theophilus”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이런 칭호는 로마 정부의 고관(高官)들에게 사용되었던 칭호라고 합니다.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고관에게 헬라의 아름다운 문체(文體)로 자신이 목격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한 사람에게 대하여 이야기를 써 내려 갑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고, 그 속편(續篇)이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는 먼저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활약했던 시대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로마 황제 디베료(Tiberius Caesar)가 15년 째 황제로 재임하던 때였습니다. 디베료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 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로마의 제 2대 황제였습니다. 그러니까 디베료 15년이면, 약 서기 28-29년쯤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어서 누가는 그 당시의 유대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유대나라를 네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마다 분봉왕(tetrarch)을 두어 통치했습니다. 갈릴리(Galilee) 지역에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를 분봉왕으로 세웠고, 이두래(Iturea)와 드라고닛(Traconitis) 지역에는 빌립을 분봉왕으로 세웠고, 루사니아(Lysanias)를 아빌레네(Abilene)의 분봉왕으로 세웠고, 유대 지역에는 아켈라오(Archelaus)를 분봉왕으로 세우고, 빌라도(Pontius Pilate)를 로마의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로마는 이렇게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이스라엘을 분할(分割) 통치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누가는 그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을 기록합니다. 안나스(Annas)와 가야바(Caiaphas)가 대제사장(High Priest)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서 최고의 직위였습니다. 고대에는 대제사장 직은 세습직이고, 종신직이었습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당시에 대제사장 직은 모든 음모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주전 37년부터 주후 26년까지 63년 간 무려 28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안나스는 주전 7년부터 주후 14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었고요. 그는 대제사장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4명의 아들에게 그 직무를 계승(繼承)하고 있어고, 역시 오늘 말씀에 대제사장으로 나오는 가야바는 그의 사위였습니다. 서기 28-29년 경에 공식적으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습니다. 그러나 안나스는 물러난 후에도 막후에서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둘로 나와 있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한 시기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된 후에 제일 먼저 끌려가 심문을 받은 사람이 바로 안나스였습니다(요한복음 18:13).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그 당시의 타락상을 보여 준 다음에, 누가는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무대는 요단강 부근의 빈 들입니다. 그의 머리는 길게 헝클어져 있고,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허리띠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었습니다(마태복음 3:4). 그리고 아무 데서나 잠을 잡니다. 먹는 것도 그렇고, 입는 것도 그렇고, 자는 것도 그렇고, 그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런 것입니다. 시대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타락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시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당시에 뜻있는 사람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겠지만, 하나님은 절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것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민감(敏感)하게 반응하는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무엘 시대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섬칫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사무엘상 3:1-2).” 엘리는 그 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었다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문자적(文字的, literal)인 의미 외에, 제사장 엘리의 영적 분별력이 흐려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섬칫한 말씀은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서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침묵을 지키시고, 이상(vision)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시대가 영적으로 암흑(暗黑)시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영적 암흑 시대를 보면,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사치하고, 방탕했을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고 넘쳐나는 때에, 영적으로는 빈곤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외쳤던 말씀도 그 말씀 아닙니까?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아모스 8:11).”

그러나 그 시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때에 “한 사람”을 지목해서 부르십니다. 바로 이 사람이 이사야가 말한 “남은자(the Remnant, 10:20-21)”입니다. 사무엘이 바로 그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바로 그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조국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대에도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누가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價値觀)에 물들지 않은 영적 분별격을 가진 사람, “이 시대를 본 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사람(로마서 12:2).” 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겔에게 임했던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에스겔 22:30-31).”

요한은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였습니다. 광야(廣野)는 말 그대로 빈 들이요, 사막입니다. 광야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물도 없고, 집도 없고, 물건을 파는 가게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생존하는 법은 광야의 생리(生理)를 익히고, 광야의 생리에 지혜롭게 적응(適應)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광야에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광야의 생리는 저절로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잡아 먹는 먹이사슬이 존재합니다. 광야의 날씨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폭풍우가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갑니다. 광야에서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생존의 원리를 빨리 포기하는 사람이 살아 남습니다. 그러나 광야에도 엄연한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법칙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법칙을 어기는 자는 죽고, 순응(順應)하는 자는 살아 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40년에 배워야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생존의 법칙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을 의지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해서 사는 법을 광야생활에서 배웠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신명기 8:3)”는 생의 법칙을 배웠습니다. 만약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하나님께 의존해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광야생활 40년은 허송 세월이 아니었고, 절망적인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야생활은 축복의 기간이었습니다.

요즘도 보십시오. 사람들이 무슨 중대한 결정을 해야할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뭘 좀 아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대한 문제를 만나면 기도원을 찾습니다. “목사님, 저 기도하러 기도원에 좀 가려고 합니다. 좋은 기도원이 있는지 좀 소개해 주십시오.” 그래요. 그런데, 대개는 그 기도원이라는 것이 광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상과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 있는 기도원도 있습니다. 문제는 세속사회와 단절되어야 그만큼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다는 지혜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련회(修鍊會)라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영어로 수련회를 “retreat”라고 합니다. 이 말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늘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모이면 일상적으로 주고 받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출세, 성공, 자녀 교육, 미용(美容), 이런 이야기들 아닙니까? 요한의 “광야의 소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한 시대를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통해서 자기에게로 돌이키신 것입니다. 세속에 물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주의(注意)를 환기시킨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의 삶의 방식(方式)은 잘못되었으니 그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로 몰려 오는 사람들에게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이사야 40:3).”

이제 곧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선지자들이 꿈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248장 가사와 같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 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 오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 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萬民)이 다 같이 누리겠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을 준비하는 최상의 방법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삶에 대한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마음이 낮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삐뚫어지고 왜곡된 사람은 그 마음을 바르게 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펑탄한 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길로 주님이 오십니다.

이번 대강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들을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긴 것 같아도 길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후회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잘못된 부분들이 있으면, 바꾸십시오. 그리고 잘못 알고, 잘못 살아왔던 부분들이 있으면 지금 회개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외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면, 지금 회개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의 삶은 주님의 길을 예비(豫備)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닦아 놓은 그 길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그 길로 들어가서 구원의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

여러분의 생은 다른 사람을 위한 축복의 통로(通路)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김수지가 부른 「축복의 통로」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내 안의 나를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입게 하셔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품게 하시고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나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신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하여 주신 말씀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생각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때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이사야 9:6)………” 이제 오실 그분에게 온 인류의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이 되면 가능합니다. 이번 대강절을 보내면서, 여러분의 생에 대한 이런 영적 통찰력이 주어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