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구원 받지 못할 사람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 (1)/막15:25-32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 (1)
막15:25-32





주일학교 유년부 공과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어떻게 했나요?\' \'네, 하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먹었어요...\' \'그랬군요. 그러면 아담은 어떤 사람일까요?\' 선생님의 물음에 아이들은 일제히 대답합니다. \'바보 같은 남자예요...\' 선생님이 다시 한번 묻습니다. \'만약 아담이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과일을 먹지 않았다면 하와는 뭐라고 놀렸을까요?\' \'예, 바보 같은 남자라고 놀렸을 거예요...\'

듣고 보니 앞에도 바보, 뒤에도 바보입니다. 그러나 뭔가 그 색깔이 다르게 느껴져 옵니다. 분명 같은 바보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질문 하나를 더 보탭니다. \'그럼 여자의 꼬임에 빠져 벌을 받게 된 아담이 쫓겨난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러자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다시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가 되어야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생긴 잘못된 지식을 버리는 바보가 되어야 다시 낙원을 회복할 수가 있다는 사뭇 신학적인 이야기를 그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것입니다.



이 삽화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바보이어야 하겠는지를 물어옵니다. 우리는 어떤 바보이어야 하겠습니까?... 바보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바보는 \'단순한 바보\'입니다. 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자\'입니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그가 바로 첫 번째 바보입니다. 이 바보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불행\'이라든가 \'슬픔\' 등을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없음으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도 없고 욕심도 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인간의 상태가 이러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때가 이런 단순한 바보 시기에 해당될까요? 바로 어린아이일 때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렇게 \'단순한 바보\'로 태어납니다. 하와의 유혹에 아담이 현혹되기 전 인간은 이렇게 단순한 바보였을 것입니다. 이런 때는 아주 작은 일들에 즐거워하고 큰 감격을 얻습니다. 바닷가의 작은 돌맹이나 조개 껍데기를 보물처럼 모으는 때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이슬, 밤하늘의 별과 달, 꽃과 나비, 바람에 뒹구는 낙엽에 자지러지는 감동이 일기도 하는 그런 때입니다. 아담은 처음 하와를 보고서는 \'이는 내 살중의 살, 뼈중의 뼈\'라고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며 좋아합니다. 이렇게 동심에 젖어있는 때가 바로 \'단순한 바보\'의 시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차차\' 단순한 바보\'에서 \'복잡한 바보\'로 바뀌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유형의 바보입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나비는 단지 나비고, 꽃은 단지 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꿈과 감성은 점점 메말라가고 지식이라는 유혹에 길들여지기 시작합니다. 달 속의 계수나무 옥토끼도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성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잡한 바보가 단순한 바보와 다른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엔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바보 안에는 중등 바보가 있고 고등 바보가 있고 박사 바보도 있습니다. 이런 바보들은 조개껍질 따위로는 이제 더 이상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지식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 삶을 견고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꾀와 처세술이 발달합니다. 하와의 꼬임에 빠진 아담이 바로 \'복잡한 바보\'가 되어 가는 본보기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단순한 바보로 태어나서 복잡한 바보가 되어 어지럽고 고통스럽게 오히려 만족 없이 인생을 끝마치고 맙니다.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던 지식이, 재산이, 권력이 결코 그렇지 못한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수고와 고통을 뒤로 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아담의 후예로서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복잡한 바보를 뛰어넘어 새로운 제3의 지경으로 나아가는 \'축복받은 바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세 번째 바보\'입니다. 이 세 번째 바보가 아담이 그러해야 에덴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듯이 바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또 한번 바보가 되야 에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바보는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 바보에서 세 번째 바보로 탈바꿈하는 데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거듭남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곧 지식이 인간을 행복해 줄 것이라는 그릇된 믿음에 싫증과 회의가 일어나 그 굴레를 훌렁 벗어 던질 때 그는 \'축복받은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을 때 그는 \'복잡한 바보\'에서 \'축복받은 바보\'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참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고 당부하시는 것은 \'복잡한 바보\'에서 \'축복받은 바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단순한 바보\', \'복잡한 바보\', \'축복받은 바보\' 이 셋 중 하나의 바보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럼 과연 우리는 어떤 바보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보 중의 바보\'인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정말 주님은 바보 멍청이십니다.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비워 종과 같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십니다.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여자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 태어나십니다. 예루살렘에도 멋진 여러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나귀, 그것도 자그마한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끝없는 자기비하 끝에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고 맙니다. 이게 바보, 천치, 멍청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신 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실 때까지 얼마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진 고통과 모욕을 겪으셨는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된 후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정치 지도자들 사이를 전전하면서 모진 고초를 당하십니다.

저들의 행실은 한마디로 무법천지입니다. 유대 산헤드린법 4장 1조에 보면 이런 법조문이 있습니다. 제1항, \'범죄인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이며 또한 해지기 전까지는 끝마칠 것\', 제2항, \'만일 선고가 무죄일 때에는 심문의 날에 선고할 것이나 유죄일 때에는 그 다음날에 선고하여 판결에 신중을 기할 것\'... 그런데 저들은 주님을 밤에 심문하고 심문 당일에 사형판결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또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조롱합니다.

주님은 다음 날 아침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사형확정판결을 받게 되는데 사형이 확정된 후 로마군대의 손에 넘겨져 그들에 의해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십니다. 무거운 십자가 횡목을 등에 지고 몇 번씩 쓰러져가면서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주님은 저들에 의해 옷을 벗기웁니다. 저들은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주님의 머리에 씌우고서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라며 희롱합니다. 그리고는 주님께 침을 뱉고는 갈대를 빼앗아 \'니가 무슨 유대인의 왕이냐\'며 머리를 칩니다. 그야말로 심한 모욕과 고난을 주님은 당하십니다.



마가는 오늘 본문에서 그 골고다 언덕의 정황을 더욱 세밀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금요일 아침 9시경에 주님의 형이 집행됩니다. 그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습니다. 그리고 양편으로 강도 둘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자기 머리를 흔들었다\'고 했습니다. 시22편에 보면 \'머리를 흔드는 행동\'은 적대자에 대한 조롱의 몸짓입니다. 그리고 \'아하\'라는 감탄사는 모독이나 조롱에 쓰이는 것으로 거꾸러진 위인에 대한 조롱섞인 유감을 강조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이 골고다 언덕의 주님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처참하셨겠습니까? 얼마나 민망하셨겠습니까? 주님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가 예언했듯이 이 모든 수모들을 철저히 감당하십니다. 여기 지나가는 저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전날의 예루살렘 성문 앞은 무척 혼잡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엘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누구겠습니까? 일찍이 주님의 기적을 목격하고 감탄했던 바로 그 군중들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그들입니다. 벳세다 들녁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인상적인 저녁식사를 했던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 저들이 이제는 주님을 조롱합니다. \'아하,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게...\'

이 얼마나 잔인한 요구입니까? 이게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어가는 한 인간에 대해 할 말입니까? 동정과 연민의 정을 못느낄지언정 이렇게 갖은 조롱과 모욕을 마지막 가는 이에게 퍼부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게 바로 죄에 물든 인간의 심성입니다.

저들이 주님을 향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 네 자신을 구원하라\'는 요구는 그간의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이 저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자신들이 믿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내려올 것을 요청합니다. 이 조롱은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가 했던 시험의 연장입니다. \"너 하나님의 아들 아니드냐? 어서 그곳에서 뛰어내려와 봐. 그래서 너 자신을 구원해 봐...\" 십자가 주변의 저들은 하나같이 몰인정스럽습니다. 지나가는 군중들의 조롱을 되받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함께 주님을 희롱합니다. \"그러게 말일세,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나봐...\"

더 기가 막힌 것은 주님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두 강도의 행동입니다. 저들은 이렇게 주님을 조롱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지금 얼른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저들은 조롱과 함께 욕까지 퍼붓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동병상린\'의 정을 느껴야할 저들에게조차도 주님은 욕을 당합니다. 이게 바로 골고다 현장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조롱과 욕과 비웃음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저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는 저들의 비웃음 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리고 그 소리가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자리잡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비웃음과 냉소에 우리는 얼마나 익숙해져 있습니까? 이해와 동정과 연민보다도 판단과 정죄와 비판의식에 젖어 있는 사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저녁나절에 길을 가는데 노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상을 봐 주는 한 노인이 지나가던 젊은 부부를 부릅니다. 한건이라도 해야 집에 뭐라도 사들고 가겠으니 그러는 것이겠지요. 그러자 그 젊은 부부는 힐끗 그 노인을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이며 이렇게 말하며 지나쳐 갑니다. \'어이구, 길바닥에 앉아 남의 관상이나 보는 주제에... 남의 관상보지 말고 제 관상이나 보시지...\' 근데 가만 생각하니 그 말이 내 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웬지 그들의 그 말이 그들의 입을 빌려 나는 내 속의 소리 같았습니다. 때때로 이런 냉소와 조소에 길들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누가 내 자식을 타이르거나 나무랄 때 \'남의 자식 상관 말고 제 자식이나 잘 기르지\'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목사가 귀에 거슬리는 설교를 할 때엔 \'저부터 좀 그렇게 살지\' 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는 없었습니까? 어려운 동료나 친척 또는 이웃 일에 발벗고 나서는 심덕 좋은 남편에게 또는 아내에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한 적은 없었습니까? \'남을 생각하는 그 마음의 십분의 일이라도 당신 아내, 당신 남편인 나에게 좀 써 봐요...\'

우리가 무의식 중에 갖는 이런 생각이나 마음,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이런 말들, 이 모두가 따지고 보면 \'네 자신이나 구원하라\'는 식의 말이나 생각과 별반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남에게 마음 쓰고 관심 기울이는 사람을 보면 못마땅히 여기는 심보들이 없지 않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는 자여, 어디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나...\' \'남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가...\'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어서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좀 믿게 하게나...\'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던져지는 조롱과 비웃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온작 조롱에 휩싸여 생의 가장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배척합니다. 심지어 주님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십자가에 달린 자들에게마저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십자가로부터 내려와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일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입니다. 거기 머무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기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주님께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의 조롱에 반응하며 거기서 내려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음이기에 세상의 지혜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력함이요 패배이기에 현실적 실리를 좇고 일신상의 안정과 자신의 출세와 영달 그리고 성공과 명예만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고 뛰는 이들에게는 수치요 손실이요 좌절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질 않습니다. 정말 바보 같은 분이십니다.

왜 주님은 이런 바보가 되시는 걸까요? 어찌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의 구속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닫힌 천국문을 열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스스로 바보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주님이 이 세상에 \'자기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쳤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나 구원하라...\'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 아니냐...\' 우리는 이 십자가에 달린 바보 같은 주님에게서 무엇을 봅니까? 오히려 그분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참된 경외의 대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향한 그 사랑이 너무도 놀랍기 때문이요 아버지를 향한 그분의 순종이 너무도 완벽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모습 속에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극치를 봅니다.

간혹 TV 화면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참혹한 삶이 소개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근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그 열악한 현장 속에서 젖이 바싹 말라붙은 어머니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여인들의 모습이 추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숙연한 마음에 존경심마저 일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날 현대 여성들의 바람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 아닙니까? 가슴을 키우기 위해 기구를 쓰고 약을 먹고 심지어 성형수술까지 하는 현실 속에서 저들의 그 빈약한 가슴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들의 그러한 가슴이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바싹 말라빠진 가슴에서 자식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이 그마저도 빨려고 하면 에미는 마다치 않고 젖을 물립니다. 이미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이 아닙니다. 분명 여성성을 망가뜨린 흉물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아름다운 겁니까? 형태가 변할까봐 아이를 낳고도 모유가 좋다는 것을 알면서 소젖을 먹이는 서양 여인의 풍만한 가슴이 아름다운 겁니까 아니면 빨리고 빨려 이제는 가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아프리카 여인의 빠싹 마른 가슴이 아름다운 겁니까?...

주님의 모습도 그런 겁니다. 주님의 모습은 아프리카 여인의 모습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의 예언처럼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멸시를 받아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고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입니다. 멸시 천대를 당하였고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러한 주님의 모습 속에서 그 이지러진 모습만큼이나 아름다운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은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분이셨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자이셨습니다. 왜 그분은 그런 바보가 되셨을까요? 왜 그분은 그렇게 가난한 자가 되었을까요? 왜 그분은 그렇게 볼품없는 자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지혜롭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무능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너무 자신의 구원에만 집착하지 마십시다. 그 어느 교파 사람들의 \'구원받았느냐\'는 말에 기죽지도 말고,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는 말에 흔들리지도 맙시다. 그런 구원은 그 자체가 신앙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기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조차도 자기중심성과 에고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남을 구원코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비쳐지는 게 당연합니다. 아프리카 아낙들의 모습처럼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잉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삶의 신비는 죽음의 문턱에서 더욱 깊어지고 또한 베일이 벗겨지기도 합니다. 그분의 죽음에서 그분의 인격과 지상 활동의 전 신비가 우리 앞에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구원에 신경쓰지 않았던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고 그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영생의 은총 가운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던 주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에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처럼 비쳐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너의 구원을 위해서, 너의 부요를 위해서...

주님은 스스로를 위해 부요한 자들에게 눅6: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12:21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리스도는 누구이고 그리스도인은 누구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고후 8: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고후6:10절의 바울의 선언처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사 바보처럼 사신 주님은 오늘 우리로 당신의 뒤를 따르는 바보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 바보들의 행진이야말로 하늘나라에 이르는 축복된 행렬일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흔적 서린 이 종려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뒤따르는 그 행렬에 속해 있는지를...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물들어 영악해진 네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저희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의 구원을 포기하셨던 사랑의 주님, 저희로 주님의 그 깊고 성숙한 몸짓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요하신 자로서 저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전능하신 자로서 저희를 위해 그 힘을 포기하셨던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 저희도 이 시대에 주님 같은 섬김과 비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바보가 되게 하사 참으로 그 나라의 합당한 백성으로 인정받는 이 제단에 속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