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구원

조용한 구원/왕상19:9-18,막7:31-37

조용한 구원
왕상19:9-18,막7:31-37





오늘 읽어 드린 마가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나가셨다가 다시 갈릴리로 들어오실 때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와 고쳐달라는 부탁을 받으시자, 그를 조용한 곳으로 따로 데리고 가셔서 고쳐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고쳐 주신 다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그들은 나가서 더욱 널리 이 일을 퍼뜨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치신 것이 아니라 따로 조용한 곳에 데리고 가셔서 고치셨다는 사실과 고쳐 주신 후에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놀라운 일을 크게 나타내려 하시지 않고 조용하게 행하려 하셨을까요? 우리 같으면 더 널리 알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를 믿고 구원받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널리 알려져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왔고, 그가 감당하실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기에 이를 피하려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또 병자들을 고쳐주어도 저들은 병이 낫기만을 바랄 뿐이지 예수님께서 전파하시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병 고치는 일에만 매어 달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될수록 피하려 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조용한 사역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使役)을 전체적으로 볼 때 크게 떠들고 널리 알도록 하기보다는 조용히 가만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은 단 한번의 역사적 사건이며, 온 세계가 놀랄 큰 사건이었음에도 그것은 비밀스럽게 일어났고, 일반 역사책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거나 아주 적은 분량으로만 취급되었습니다. 역사 전체의 흐름을 바꾼 큰 사건이었음에도 역사가들은 그것을 아주 대수롭지 않은 작은 사건으로 다루어버릴 정도로 그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아도 아주 작은 마을 베들레헴 어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그 사실은 베들레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만 전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멀리서 별을 연구하는 동방박사들이 이상한 별을 따라 왔다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갔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탄생하신 사건이라면 온 세계가 나서서 이를 환영하고 축하했어야 할 텐데, 세상은 거의 이를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저 한 평범한 아기의 출생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역사를 요란하게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조용하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시작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후 이집트에 피난 가셨다가 갈릴리 한 마을인 나사렛에 가셔서 조용하게 30년을 지나셨습니다. 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 계신 줄 전혀 모른 채 무심히 살았던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30년 지난 어느 날 예수님은 요단강에 나타나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셨다가 갈릴리로 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소문이 갈릴리와 온 유다 지역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널리 퍼진 소문은 메시야에 대한 것이 아닌 그저 한 기인(奇人)에 관한 소문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과는 사사건건 충돌하셨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 대신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처형으로 그를 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만 알리셨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간 지상에 더 계셨지만, 자신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지도 아니하셨고, 널리 선전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예수님께서 좀더 지상에 계시면서 부활하신 사건을 널리 알리고 증거 하셨더라면 최소한 부활에 대한 의심은 버릴 수 있게 하셨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확실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는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승천 사건도 제자들만 보았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사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은 조용한 구원, 조용한 혁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조용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나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찬란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아주 미미하게 시작되어 사람들이 미처 깨닫기 전에 어느 사이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령 마가복음 4장에 나타난 천국 비유 중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사람 눈에 잘 보이지도 않게 시작되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 놀라운 힘이 간직되어 스스로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요란하지 않고, 눈에 띠게 화려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큼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나라는 자라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큰 능력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이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넣던 사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시므로 이 세상은 생명을 향하여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돌아가고 있지만, 지구가 돌아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구는 하루에 한 바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크게 한 바퀴 돌면 일년이 지나는 것입니다. 그 일년이 지나는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지만, 사람들은 그 세월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 세월의 빠름을 잘 느끼지 못하여 그 젊음이 항상 있을 줄 아는데 어느덧 세월이 흐르면서 그 젊음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노년이 다가오고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 변화는 아주 서서히 이루어졌지만, 대단히 큰 변화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대한 지구가 돌아가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란한 한국 교회

오늘날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크게 부각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알게 모르게 은근히 스며들어가는 종교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날 때 그 교회들은 타락하기 시작하고, 또한 사람들의 질시와 반대와 박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크게 성장할 때 교회는 스스로의 거대함에 도취되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중세 기독교는 너무 방대해 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그 힘으로 나라들까지 굴복시키려 하였지만, 결국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에 의해 그 교만이 꺾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6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하면서 여의도 광장에 반복하여 모인 거대한 집회를 통해 그 힘을 과시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을 정치 경제 모든 사회 분야에서 발휘하여 왔던 것입니다.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권도 교회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그 세력은 컸고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로 대통령을 세우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락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멈추었고, 우리 사회 전체가 속으로 곪아갔던 것입니다. 장로 대통령을 가졌다는 자부심도 잠깐, 한국 교회는 그 성장이 멈추고 사회로부터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 장로 대통령 시절 경제 위기가 찾아왔고, 그는 부끄럽게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물러갈 때 한국 교회도 자숙하며 스스로 교만했던 일을 회개하고 돌이켰어야 할텐데, 그러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결국 한국 교회가 얻어맞는 사건이 터졌던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지난 4월 5일 저녁 문화방송 \'시사매거진 2580\'에서 감리교 감독회장인 김홍도 목사의 문제가 방송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보도는 사실과 많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김홍도 목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방송에 보도될 만큼 두드러지고 부도덕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문화방송은 그 보도를 하면서 마치 한국 교회 전체가 타락한 것처럼 논조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문화방송은 이에 대하여 확실한 사과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송은 한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방송은 한국 교회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어떤 것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문화방송 기획팀들은 전부터 한번 한국 교회 문제를 다루려고 벼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대교회들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몇몇 큰 교회들을 대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에 대한 고발이 들어오자 이를 취재 방영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회가 한국 교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이 사건이 방송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몇몇 사람들이 백방으로 손을 썼습니다. 청와대의 힘을 빌려 MBC에 방영 중지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방영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일선에서 뛰는 PD와 기자들이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방영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예민한 문제를 방송하겠다고 고집한 것은 그만큼 한국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곱지 않게 보고 있다는 확신이 방송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너무 튀었고, 너무 요란하였습니다. 너무 커져서 교만하여졌고, 이 사회에 대하여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낮아져서 봉사하며 섬기는 교회가 되었어야 하는데, 한국 교회는 높아져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쳐대는 섬김 받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교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어떻게 보면 이런 한국 교회의 희생자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장로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그를 몰아세우지 아니하였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미움이 장로였던 그에게 집중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김대통령의 부끄러움은 한국 교회가 당해야 할 부끄러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가 반성하는 기미가 없자 결국 방송이 나서서 한국 교회를 친 것입니다.

여물지 않은 한국 교회

한국 교회는 사실상 그 알맹이는 아직 여물지 않았으면서 겉으로만 요란하고 대단한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나라 경제와 비슷합니다. 알맹이는 없고 빚만 잔뜩 걸머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처럼 교만하게 굴다가 이를 곱지 않게 본 어떤 세력이 날린 주먹 한방에 지금 우리는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모습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 교회는 어린 아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하다가 한 대 얻어맞은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들어내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며, 연예인들 인기를 얻듯이 인기를 얻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일은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하며, 언제나 일을 열심히 하고 도 스스로 무익한 종일 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만큼 조용히 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은 사람을 보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만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 받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할 때 그 선은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닌 자기 욕심, 자기 자랑, 자기 과시를 위한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큰 교회를 자랑하였고, 그 급격한 성장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랑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사회의 냉소와 곱지 않은 눈길을 불러오는 요인이 되어 선교의 장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전에 남북 나눔 운동을 하는 어떤 목사의 이야기에 우리 나라가 이렇게 경제 위기를 당하면서 북한 사람들이 한결 편하게 마음을 열고 접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한참 거들먹거릴 때 저들이 우리를 볼 때 어떻게 보았겠습니까? 아니꼽게 보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도 잘 난체 할 때마다 사람들은 오히려 교회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번에 우리가 방송을 통해 망신을 당한 김에 납작 엎드려 낮은 자리로 내려가면 사회가 우리를 대하여 냉소를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항상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늘 기억하면서 교회들도 주어진 선교의 과제를 조용히 추진할 때 오히려 더 큰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가늘고 작은 소리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

오늘 읽어 드린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하여 이기고 저들을 다 죽인 다음, 그리고 3년 반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오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큰 사건들을 혼자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아합왕의 왕후 이세벨에게 쫓겨 호렙산에 들어가 낙담한 채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는데 산을 가르고 부술 만한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날 때도 계시지 않았고, 바람 후에 지진이 났지만,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고, 큰불이 지나갔지만 거기에도 계시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후 아주 가늘고 작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소리 가운데서 엘리야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상징적입니다. 큰바람과 지진과 불과 같은 요란하고 거대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목소리 가운데 오신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바람처럼 한국 사회를 휩쓸기도 하였고, 큰불처럼 타오르기도 하였고, 지진처럼 온통 이 사회를 갈라놓기도 하였지만, 그런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큰바람, 큰 불과 같이 요란하고 큰 사건들을 좋아하고 그런 것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신다고 하신 말씀을 우리가 기억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일어나며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 동안 너무 큰 일들에만 몰두하였고, 정신을 빼앗겨 왔습니다. 이제는 정신을 되찾아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서 그 일을 겸손하게 조용히 행하여야 하겠습니다. 남이 알든 모르든 상관치 말고 묵묵히 주어진 봉사의 자리에서 일할 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며 그에게 칭찬과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차라리 그 이름을 들어내지 말고 조용히 선교하고, 묵묵히 봉사하며, 꾸준히 선을 행하는 교회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신문이 알아주지 않고, 방송이 떠들어대지 않아도, 그저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해 가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칭찬 받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너에게 맡기겠다\"는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낮에는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는 돌아와 주인의 식사 시중을 들고, 그 모든 일을 다하고도 \"나는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위기는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떠들며 요란했기 때문에 자초한 것입니다. 이제는 조용히 자신을 들어내지 말고 엎드려 묵묵히 봉사할 때입니다.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면서,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끈기 있게 겸손한 신앙을 이어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