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응답받는 기도 눅18:1-8
지난 목요일 오후부터 어제까지 ‘성령과 치유사역’ 세미나를 다녀왔습니다. 이 세미나를 가게 된 동기는 우리 교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알파코스 ‘성령 수양회’를 준비하고,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으심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국에서 오신 약 400여명의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함께 모여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사모하며 밤 1시 30분까지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현장에 정말 놀라운 성령님의 임재와 강력한 터치가 있었습니다. 아말감이나 산프라(sun plate)로 치료받은 치아들이 금이빨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팔을 들지 못한 사람들이 팔을 번쩍 들었습니다. 목과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던 분들이 치유되었습니다. 20년이 넘게 목에 혹을 가지고 있는 분이 그 자리에서 혹이 없어졌습니다.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고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던 분이 안경 없이도 성경을 읽을수 있을만큼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어둠의 영들이 떠났습니다.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넘어지고, 입신의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치유사역 현장에는 처음 참여했습니다. 어린시절 부흥회 현장에서 안수하고 병고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런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신대원에서 성령론을 공부한 뒤에는 더더욱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이나 치유의 이적들은 초대교회에서나 이루어진 것이지 이제는 그런것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성령의 은사나 능력에 대해서 스스로 제한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정통 교회에서 닫혀진 성령론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사이비 이단에서는 성령의 능력과 치유사역을 집중적으로 행했습니다. 몇 년전까지 예루살렘 교회 이초석씨 같은 경우는 매주 88 체육관을 빌려서 은사와 치유집회를 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비디오나 책을 보면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걷지 못하던 자가 걷고, 듣지 못하던 자가 듣고, 불치병이 치유받는 역사들이 엄청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불상사도 있었습니다. 기도원에서 안수기도를 받다가 죽는 경우가 심심찮게 매스컴에 보도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는 광신주의다 신비주의다 비판하며 빗장을 걸어두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대한 이해 자체가 지극히 이론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장면을 설교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앉은뱅이 신앙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일으켜 세웠는데 우리는 영적인 면으로 해석하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과 치유사역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지금 의학이 이렇게 발전해 있는데 아프면 병원가서 고치면 되지 굳이 병든 사람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소극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주로 3가지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사역입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 사역의 80%이상이 귀신을 좇아내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는 치유사역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자들의 아픔을 터치하시고 치유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의료적 상황과 오늘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이성적이고 이론적인 성령론에 매여서 또 다른 성령의 나타남과 치유의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철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단지 병을 고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병고침을 통해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으면 자칫 예수 무당처럼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금번 세미나를 통하여 제 안에 닫혀져 있었던 성령님의 능력과 치유사역에 대한 새로운 눈뜸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성도님 한 분 한분을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목자의 심정으로 다가가고 돌볼 수 있는 영적 아비의 심정을 회복하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자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치유와 기적이 나타나는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임을 경험했습니다. 제 안에 부어주신 성령님의 능력과 역사가 여러분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 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기도는 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해 실망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다 응답받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한 것을 다 응답받으셨습니까? 물론 ‘믿음으로 다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은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다 지쳐서 포기한 분도 있고, 낙심한 분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기도의 능력을 회복하시고, 응답받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 도시에는 혼자 사는 분이 계셨는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찾아가서 호소할 수 있는 곳은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법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재판관을 찾아가 자기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그런 여인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돈 많은 재벌도 아니고, 세상의 힘도 없는 가련한 여인의 아픔을 들어줄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매일 그 사람 집앞에 찾아갑니다. 차가 지나가면 따라가면서 애원을 합니다. 그가 일하는 사무실 앞에 가서 볼 때마다 부르짖습니다. 어느날부터 불의한 재판관이 노이로제가 걸렸습니다. 눈만 감으면 그 여인이 떠오릅니다. 이러다가 정신병에 걸리겠다 싶어서 여인의 간청을 들어줘야겠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억울함을 해결받아 잘먹고 잘살았다는 애기입니다. 물론 잘먹고 잘 살았다는 말은 없지만 원수를 갚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비유의 해석을 이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홀로사는 가련한 여인과 같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힘도 없고 돈도없어서 우리의 문제를 혼자 해결할 수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재판관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같은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는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도 언제든지 이 여인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귀찮게 해야합니다. 매일 하나님을 찾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스토커처럼 계속 따라붙어서 하나님을 괴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지치게 만들어서, 움켜쥐고 있는 문제해결의 열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물창고의 문을 계속 두드려서 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복하시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이렇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내가 지성을 들여서 감동을 시키든지 아니면 들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하나님을 귀찮게 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나 중심적인 잘못된 해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태도입니다. 이런 오류를 바로 잡으시고자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직접 해석을 해주십니다. 7-8절입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원한을 속히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성경에 ‘택하신’ 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에서 ‘믿음’에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이 비유의 내용과 우리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은 홀로사는 가련한 여인입니까 아니면 택하신 하나님의 왕 같은 자녀입니까? 이 비유는 불신자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찾아온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친히 택하여 세운 자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공부해 보니까 그래도 다른 어떤 성현보다 예수님이 위대해 보여서 오셨습니까? 내가 선택해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종교생활은 될 수 있지만 올바른 신앙생활은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터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합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지키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형식적이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식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하여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기 전에는 불순종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마귀의 자녀였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우리의 보호막이 없었습니다. 억울한 재판관의 횡포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왕같은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을 입은 사랑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더 이상 택하신 자녀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불공평하게 처우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는 언제나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풍성하시고 은혜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 곁에서 항상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에서 쉬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억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미련함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고, 괴롭혀서 보물 창고의 문을 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기도는 굉장히 피곤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비틀어서 보물창고의 열쇠를 빼앗으려고 하면 얼마나 힘든일입니까?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라 하나님 아버지에게 피하기만 하면 그것이 복을 받는 것이니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러면 복이 내게 임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부요함과 풍성함의 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싶어서 안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부요함과 풍성함이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과의 친밀함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좋은 관계 속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항상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친밀함의 관계 속에 거하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함과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몇 군데만 말씀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고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도 복을 받고 일터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자손이 번성하고 농사가 잘 되고 가축이 증식하며 먹을 것이 풍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복을 받아 다 잘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치러 오는 여러분의 원수들을 여러분 앞에서 패하게 하실 것입니다.--여호와께서는 여러분에게 주겠다고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자녀와 수많은 가축과 풍성한 농작물을 주실 것이며 또 하늘 문을 열어서 철따라 단비를 내려 곡식이 잘 되게 하시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민족에게 빌려 주기는 해도 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치는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듣고 지키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머리게 되게 하고 꼬리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여호와의 명령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거나 경배해서는 안됩니다.”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바로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헛된 세상의 우상을 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임을 이미 깨달았습니다.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보일 때 하나님은 하늘의 보고를 열으시고 풍성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계속해서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항상 응답받는 기도응답의 비결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의 관계를 항상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아버지는 구하지 않는 것 까지 다 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항상 더 주시려고 안타까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포기합니까? 왜 절망합니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십시오. 주저하지 마시고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주님은 왜 네가 그랬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으로 품에 안아주시고,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키시고 기쁨의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믿음으로 주님 품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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