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 의 기도

두 부류의 기도/눅18:9-14

두 부류의 기도
눅18:9-14





요즘 우리 사회에는 많은 불안요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체성 논란과 과거사 문제, 연쇄살인, 식약청의 불투명한 행정,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 거기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 하나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한 국가이기에 경쟁력에 있어서 불리한 여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나 지식인이나 전문인이나 사업가나 노동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고 남 탓만 하면서 잘못을 전가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절대화하고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우며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열강의 패권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이 때, 이 민족의 약함을 통한이 여기며 국민 모두가 결연히 일어나 다시는 나라를 망가트리거나 후퇴시키지 않도록 힘 있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면 미래를 잘못 진단할 수 있습니다. 사회또한 바르게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종교 역시 종교의 본질을 성찰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종교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결과를 나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 시대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종교적인 도덕성과 권위를 갖고 있는 바리새인과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눈총을 받으면 지탄을 받고 살아가는 세리의 모습 속에서 누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해결을 받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출석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기도생활도 잘하는데 왜 어려운 일이 그치질 않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때입니다. 또 어렵고 힘든 일이 해결되기는 커녕 더욱 더 어려워지기만 하는 경우 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회의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닫혀진 마음을 열고 기도의 문을 두드려 보지만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는 안타까움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기도하는 것이 귀찮아지고 게을러지게 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고통을 안고 도대체 어떤 기도를 해야 되는지 망막한 상황도 있었을 겁니다.

수십 년, 심지어는 몇 대에 걸친 신앙전통을 이어온 가운데 믿음으로 살겠다고 수없이 다짐도 했고, 기도도 해보았습니다. 호소도 해보고, 부르짖어 보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토해내듯 담겨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매달려도 보고 씨름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위해서 본문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리건 간에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오고 그들의 각기 다른 기도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요.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의롭지 않으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이 사람의 기도를 보십시요.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도무지 돌아볼 줄 모르는 비뚤어진 자아, 왜곡된 자기이해를 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자기욕심과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도무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줄 모르는 교만이 베여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을 일수도 있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행함으로 드려지지 못하는 입만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10절 이하에서는 이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늘 따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를 멀리하고 자신의 신앙을 최고로 아는 사람입니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죄인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도무지 다른 사람들이 근접하거나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완전한 인간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이였습니다. 세리와는 전혀 다른 종유의 인간이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행함을 보면 12절에서 말하듯,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거르지도 않고 꼬박꼬박 드리는 종교적인 규례에 있어서는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형식에 비추어 보면 흠잡을 때 없는 사람입니다. 의롭다고 볼만한 철저한 종교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쪄면 오늘날 교회가 만들고자 하는 Standard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세상적인 출세도 하고, 돈도 좀 쓸 만큼 갖고, 명예도 있어 보이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서 교회의 직위도 주고, 그들의 돈을 헌금케 해서 건축도 해보고, 교회 행사 때는 기부도 좀 내가면서 신망을 얻는 그런 종교인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그들을 이용해서 교회 이름도 좀 내고,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면서 명성도 좀 얻어 보고, 돈도 좀 만져 보고자 하는 목회자들의 속 보이는 처세목회를 낳게 하기에 알맞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기회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전형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약한자가 약한자를 더 능욕하고 약한자들 사이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며 사는 일이 많은 것을 봅니다. 약한자가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것도 문제입니다.

반면에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고 눈총받는 세리가 나옵니다. 로마는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대교에 대한 우화정책의 일환으로 유대교를 보호해 주고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도록 정책을 폈습니다. 레위 지파에서만 할 수 있는 제사장직을 돈으로 사려는 졸부들과 가문의 족보를 위조하거나 날조해서 돈으로 산 제사장직을 이용해서 세금을 거둬드릴 수 있는 권리를 얻음으로서 로마의 권력에 아부하고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 이용했습니다. 세리는 그들의 고용인으로서 자기 민족의 혈세를 뜯어내서 로마의 시녀 노릇을 하고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여 자기 배를 채우는 일도 서슴치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으로, 민족의 배신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세리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들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얼굴을 쳐다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배신자의 낙인,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힌 자들이 어떻게 당당하게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었겠습니까? 죄인은 말이 없는 법이지요. 13절을 보면 세리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멀리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인의 멍에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자신의 죄인 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애통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롱받고 배척받아 마땅한 세리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바리새인의 삶 보다는 세리에게 있어서 지금의 삶이 가슴에 더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죄인의 멍에를 갖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받아 주십니다. 다수의 의인보다도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표준새번역 성경 마태복음 9:13에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표준새번역성경 누가복음 15: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제가 아는 어느 기독교 대학의 총장님이 학교 건물을 새로 짖느라고 건축업자 선정 광고를 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면접을 하면서 공사입찰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건축하시는 분이 면접을 하면서 자신은 모교회의 장로인데 장로인 제가 하나님의 선교학교를 짖는 일에 이익을 남기겠습니까? 하시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공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입니까? 그 말에 그만 총장님은 그분을 믿고 공사를 맡겼습니다. 공사가 끝난 후, 준공 검사를 기다리면서 강의를 하는데 갑자기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면서 천장이 망신창이가 됩니다. 몇 일 후에는 전기가 합선이 되어 다 나가 버렸습니다. 드디어 준공검사를 맡는데 용량이 미달된 전기줄을 사용했고, 불량 자재로 건축을 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결국 준공검사에 불합격했습니다. 천정은 균열이 가고 일부는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총장님은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건축담당 장로라는 분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바르게 이익을 남기지 않겠다고 자신하던 위선과 가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사람은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고, 급한 경우를 당해서 상대방에게 죄송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고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잘못을 했으면 인정 할 줄 알고, 미안해 할 줄 알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바른 그리스도인 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하는 그런 삶은 결코 바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많은 교인이 있지만 인격을 갖추고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위장한 채 마치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착각하는 본문 속의 바리새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는 않은지요?

바리새인의 기도를 한 번 보십시요. 위선과 거짓으로 물들어진 삶에 노출되었음에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움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바리새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져야 할 진정한 삶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의로움 밖에 없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조롱거리가 되어도 자신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베어 있습니다. 예수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허물을 볼 줄 알고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이웃중심으로 삶의 방향과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서 살았지만 지금까지는 나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살았지만 남은 생애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들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빛과 소금을 역할을 감당하면서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말씀의 신학자라고 불리 우는 칼 바르트는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타자를 위한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타자를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 타자를 위한 삶을 위해서 고난 받으셨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바리새인은 타자의 삶과는 동떨어진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예배가 있고, 기도가 있고, 헌금이 있었지만 그는 철저히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돌아볼 생각 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만하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죄인이기에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리의 기도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구와 함께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이 죄인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공로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소문내는 것, 이것은 결코 하나님은 섬기는 삶이 아닙니다. 한걸음 더나가서 본문을 살펴보면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리는 다른 사람들을 공박하거나 비판하거나 조롱하거나 자신의 우월감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죄인됨과 자신의 문제를 알고 하나님을 행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비록 죄인의 허물을 갖고 죄인의 오명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허물을 돌아보고 인정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부르십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민족적으로 살펴보아도 콧대가 높은 민족이 있습니다. 호주 사람들은 흑백차별을 심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백호주라고 부릅니다. 불란서 사람들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우습게 봅니다. 이게 무슨 마음보입니까? 기독교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나라가 과거에 국가간의 전쟁과 마찰이 있었다고 해서 후대에게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심어주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백인들이 흑인 차별을 심하게 합니다. 미국도 흑백차별 문제로 국제 사회에서 커다란 문제를 낳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링컨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분들은 흑백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위대한 평화의 운동을 했습니다. 중국은 대국주의 사상과 의식이 아주 강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구려 역사도 왜곡하여 한족들의 역사를 사실화, 역사화 시키려는 것입니다. 일본을 빼놓을 수 없지요.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줄 모르고 끝없이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수송의 성도들이 진정한 인격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나의 연약함을, 부족함을 볼 줄 아는 성도들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온전한 백성으로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