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도 해야 하는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눅11:5-8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눅11:5-8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알기 원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연속적으로 살피는 누가복음 본문이 제자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우리는 같은 주제를 살펴온 셈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남다른 사람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본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신앙 인은 주의 말씀 듣는 일을 그 어떤 봉사보다 우선합니다. 아니 우리가 하는 봉사가,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봉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 듣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신앙인은 주의 말씀을 듣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는 사람이요 좋은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인의 특징인 기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동안 몇 차례 살핀 바 있습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우리 교회의 새 천년 원년 목표와 관련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사랑 안에서 자라기 위해서, 그리고 주의 은혜를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무지한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씨뿌리고 물뿌리고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난 인생에 가장 큰 특징은 이기적이라는데 있습니다. 이 이기적인 우리의 손이 밖을 향해서 펴지기 위해서는 기도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살핀 바 있습니다. 지난주일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제목만 주보에 실리고 실제로는 본문을 바꾸어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으로 “기도할 때와 찬송할 때”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이미 발표된 본문과 제목에 따라 설교를 들을 권리가 있고 저는 그것을 설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살피기 전에 예비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한 그때 제자들처럼 오늘 여기에 나온 제자들은 주님께 요청하는 마음이 있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번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기도 생활을 떠올리면서 여러분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요청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점을 먼저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도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제 기도 내용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때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저보다 기도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계신 그 어떤 분과 비교해서 제 기도 내용이 하자가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해 본적은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배워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만 제가 심각하게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갑자기 저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새롭게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의 기도는 조금도 자신의 욕구나 소원을 아뢰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말기를 간구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구요? 하지만 잘 살펴보시면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인정하고 나면 우리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것조차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방편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이 언제 기도를 하고 계신지를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아니면 얼마나 규칙적으로 기도 시간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선 여러분의 기도 내용이 어떠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기도를 하나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그 내용을 비교해 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의 기도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소위 말해 기복적인 -복을 구하는, 말하자면 복 받기를 구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의 기도는 다른 종교의 기도와 그 내용에 있어서 확실히 다릅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같을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무릎꿇고 기도할 수 있고 기독교인들도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그들도 손모을 수 있고 우리도 손 모아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눈감을 수 있고 우리도 눈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이 달라야만 합니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행복과 영달의 목적이지만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외견상으로 보면 심지어는 무속 신앙에서 복을 비는 것과 비슷할 지 모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잘 들어보십시오. 밥 한 그릇을 위해서 비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일을 위해서 내 삶을 드리게 해 주옵소서 그것이 기도의 중심입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구하는 삶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죄 사함을 구합니다. 우리의 간구의 모든 소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 이제라도 다시 기도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의 기도는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부족을 아는 것은 채움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자신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버리면 우린 진보할 수 없습니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듯이 내 스스로의 기도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만족해 버리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어떻게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기도의 내용만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좀 더 우리 자신을 더 정직하게 관찰한다면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우리의 기도의 내용 못지 않게 더 한심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 한 제자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주여 기도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마치 무엇을 기도해야 좋을지 몰라서 자신들의 기도 생활이 그 모습인 것처럼 주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의 요청을 따라서 주님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먼저 일러 주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며 친절하게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듯이 세세이 일러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하나씩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끝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라고 주님은 계속해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의 요청을 따라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나서 “또 이르시되”라고 기도에 관한 말씀을 계속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시작하신 말씀은 13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감아 버릴 수 없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분량의 무려 세 배나 되는 교훈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정작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무엇을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였는데 그 답을 주고 나서 주님이 또 이르시되 라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는 분량은 훨씬 더 길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한 제자는 자신의 부족을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서 찾았지만 마치 주님께서는 그것만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긴급한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이와 같이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다시금 여러분들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기도에 관한 주님의 분석을 수긍하십니까? 우리의 문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것보다 오히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기도의 내용이 한심한 것 이상으로 기도의 자세와 모습이 더 한심하다는 것을 여러분 느껴보신적이 있습니까? 이기적인 욕망을 나타내는 기도의 내용에 못지 않게 집요함이 없는 기도의 실태로 인해 고민해 보셨습니까? 어쩌면 너무 배부른 자세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준도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기도 모습으로 여러분은 괴로워 해본 적이 있습니까?

참된 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기도하는 우리의 삶은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는 이 사회라고 하면 이 세상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정직하게 검증해 봅시다. 주일마다 우리와 같이 2,200명에 가까운 어른들이 설교를 충실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1,200명에 가까운 성도들이 매주일 구역 단위의 소그룹 교제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수요일마다 4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성경 공부와 제자 훈련을 열심히 받고 있습니다.

정직히 평가해 보면 그것을 통해서 삶이 바뀌는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삶의 변화가 없이 그저 주일날 왔다가 갔다가 밖에 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년 3-4차 실시되는 새 생명훈련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성도들의 삶이 새로워지고 주님께 헌신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 생명 훈련을 받을 때는 뜨거워졌는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금 식어지는 현실을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요즈음은 훈련을 마치면 기수마다 전도 팀이 결성되어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는 일을 잘하고 있지만 그래도 몇 달 지나면 그 팀에서 안보이는 얼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의 기도를 요청하는 것들입니다.

한 사람을 영적으로 소성 시키기 위해서는 온 교회가 다 달라붙어서 노력해야 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영적으로 침체의 늪에 한 번 빠진 사람은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번 받은 상처 가지고 몇 달이 지나가는데도 거기에서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몇 년이 지나가는데도 옛날 그 상처받기 이전에 건강했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에 그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중보 기도의 거룩한 소원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런 전도 팀들에 의해서 인도되는 사람들이 주일마다 줄을 잇지만 아직도 버려진 영혼들이 길거리에 집집마다 수없이 널려 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이 우리의 집요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끈질긴 기도를 요청하는 현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성경은 선언하는데 비해서 우리 가운데 생기는 환자들 대부분은 약을 쓰거나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낫는 법이라곤 찾기가 힘듭니다. 정신적인 혹은 영적인 질환을 앓는 경우는 더욱 딱합니다. 정신병원이나 신경안정제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호전되는 경우를 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왜 이토록 무력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이토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 발버둥쳐야 합니까?

우리 개개인의 삶은 어떠합니까?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처럼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불신자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는데, 일하지 않고 일억 천금을 노리는 그런 삶의 자세에 그대로 세상과 같이 살고 있는 집사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사슬에서 벗어나야 하는 줄을 알지만 계속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 가운데 없지 않습니까? 예배하는 자리에 앉아 있지만 ‘빨리 예배가 끝났으면...’하고 몇 차례 시계를 들여다보고 계신 분은 여러분 가운데 없지 않습니까?

주일학교 교사로 혹은 구역장으로서 열심히 가르치고 뛰어다니지만 늘 갈급한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열심히 가르치고 전도하지만 열매가 보이지 않아서 애가 타는 분은 여러분 중에 없지 않습니까? 전도가 하고 싶은데 도무지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 기가 죽어 있는 분은 여러분 중에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처지에 있는 분들을 영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기도가 필요한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많은 교회들이 갈등 구조 속에서 주님이 주신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빈번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할 것 없이 당회 내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어떤 평신도의 표현처럼 목사의 에너지의 반은 전체 교인을 위해서 그리고 나머지 반은 당회원을 향해서 소모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그 정도는 양호한 편일 수도 있습니다. 핵심 멤버들을 향한 에너지의 소진으로 인해 목회할 여력이 없는 비극적인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성도 상호간의 알력과 불신도 만만치를 않습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교회를 나누는 것밖에는 답이 없어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 모든 답답한 현실의 유일한 해결책은 집중적인 기도에 우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셨기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또 이르시되”라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계속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5-8절에서 밤중에 빵을 빌리러 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이어서 9-10절의 직접적인 교훈을 거듭거듭 말씀하심으로, 마지막으로는 또 한 번의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도전하시며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왜 그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도록 세 번 연거푸 강조하십니까? 능력을 얻는 기도, 능력을 행사하는 기도,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 공급하는 기도는 지금 대부분의 우리가 하는 기도의 방법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방법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자세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제 그러면 간략히 나마 그 주님의 방법을 살펴봅시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5절 이하에 주님은 어떻게 가르쳐 주십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들어보십시오. 자는데 밤중에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목소리 들어보니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알만한 친구입니다. 친구 좋아해도 그런 시간에 찾아오면 누가 반기겠습니까? 하지만 반갑지는 않아도 소리치는 것을 듣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여보게, 갑자기 친구가 지금 찾아왔는데 구워 놓은 빵 있으면 세 덩이만 빌려주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칩니다.

계속 집요하게 소리치면 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자는 척하고 누워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을 이미 닫아걸었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이불 펴고 누웠으니 일어나 도와줄 수가 없네 그려’라고 말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 형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주거 환경은 요즘과 달랐습니다. 조그만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다 누워 잠을 자던 시절입니다. 한 50년, 100년만 해도 방들이 아주 작았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공통입니다. 그러니까 자다가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누울 자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삶은 살아본 적이 있는 것 같애요. 없는 사람들은.

형편이나 기분을 가지고 말하면 친구가 무엇이고 청을 들을 상황이 아닙니다. 자다가 일어나다가는 온 식구 잠을 다 깨우고 말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바깥에서 소리치는 친구를 버려두고는 그 날밤 잠 농사는 다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요청을 들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주님의 결론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보십시오. 체면이고 예의고 집어 던져 놓고 바깥에서 소리치는데 어쩌라는 겁니까? 안 도와주고는. 손님이 찾아와서 줄 것은 없고 옛날엔 참 좋은 시절이었던 모양이에요. 손님이 찾아왔다고 이렇게 열심히 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을 보니까, 옛날 사회는 그랬습니다. 찾아오는 손님을 홀대하면 그것은 사람 측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 전체가 망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대사입니다. 계속 두들깁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달립니다. 쉽게 말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강청하는 것에 못이겨서 결국 일어나 빵을 주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주님은 9-10절에서 다시금 정리해 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누가? 하나님이. 찾으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찾도록 해주신다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이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 거듭 명령을 하십니다. 왜 반복해서 명하십니까?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되시는지 10절에 다시 그 이유를 세 번 거듭 밝히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은 세 종류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