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시 생활의 기도

평상시 생활의 기도/눅11:5-13

평상시 생활의 기도
눅11:5-13





어떨 때 기도하십니까? 스스로 너무 뻔뻔스럽다고 느껴 기도하기를 포기했
던 적은 없습니까?

기도에는 놀랍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론(方法論)이 아니라 자세 (姿勢)
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를 성의 문제
로 들고나옵니다. 얼마나 정성을 드렸느냐 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
얼마나 매어 달렸느냐에 따른 결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하
루에 일곱시간 기도한다고 합니다. 수원 어느 기도원장인 모 목사는 하루
에 8시간을 기도하라고 합니다. 정성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저
변에는 \\\"열심을 부리면 감동하는 법이다\\\"라고 하는 이상한 무속 신앙이 깔
려 있습니다. 원래 무속 신앙의 특징은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이 없습니다. 대상은 없고 치성을 드리는 사람만이 있습니다. 드리는 사람
의 열심에 의해서 하늘이든, 땅이든, 나무 신이든, 바람 신이든 무슨 신이
있거든 감동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 달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
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그 신앙의 대상에 관한 지식이 그 개인의
열심보다 언제나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크
게 다른 점입니다. 내 쪽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부분이 요구되기 이전
에 대상이 누구냐가 확인되지 않는 신앙을 갖는 것만큼 기독교적 차원에서
경계해야 할 신앙 자세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통적으로 믿음의 대상
에 관한 지식보다는 나의 열심에 더 많은 기준을 두는 잘못된 습관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제일 큰 무기가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제일 큰 약점이 되기도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도만큼은 누구나 자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딴 부분에서
는 약해도 기도만큼은 내가 정당하게 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안 해서 그
렇지 하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는 죄
책감은 내가 기도를 안 했다는 죄책감, 즉 하나님 앞에 충분할 만큼 기도생
활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를 정확히 알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아
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마음에 놓고 본문에서 말
씀하는 중요한 초점을 맞추도록 보도록 합시다.
본문에 나오는 \\\'강청\\\'이라는 말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기도를 떼쓰는 것으
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이 친구는 와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도
와 달라고 구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달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그 친
구가 와서 \\\"우리 집에 손님이 왔는데 밥이 없으니 밥을 좀 주라\\\"고 그러니
까 친구가 귀찮다. 옷 벗고 누웠는데 언제 일어나서 밥을 주니?\\\" 그러자
그 친구가 \\\'빨리 안 내놔? 문 부술 거야\\\" 이것이 강청이라는 뜻입니다. 마
치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당연한 요구를 받으러 오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
다. 그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 속에다 어느 만큼의 축복을 허
락하시느냐 하면 눈치를 보면서 와서 \\\"하나만 줘요\\\" 하는 구걸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축복의 자리\\\' 라고 선언합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데 그 근거는 자기 아버지이기 때문에 떼를 쓰는 것입니다. 남에게 하는 기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떼를 써도 좋을 대상에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
기입니다. 기도에서 이 차원을 놓치고 들어가면 기도는 상거래나, 토론이
나, 회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만족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데 있어서 이 간청함을 알고 들어가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루어지느냐, 안 이루어지느냐, 내가 잘했다, 잘못했다, 와 관계없
는 결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어가서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내가 받을 만한 정당
한 이유가 있느냐, 없느냐, 이전의 문제라고 합니다. 떼를 쓸 권리가 있다
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는 방법과 훈련과 태도 이전에 우리의 신분에
관한 축복입니다.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
버지\\\" 라고 부르는, 기도의 운을 떼어놓는 것으로서 이미 축복이라는 말입
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요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응답을 받는다는 것
은 요구한 대로 결재가 다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
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안돼\\\" 라고 하셨을지라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것은 제쳐놓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떼를 쓸 수 있는 자, 라는 것으로 기도
를 하는 모든 심령이 은혜와 축복 속에 있어야 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
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는 어린아이의 울음 같은 기도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뜨거워
도 울고, 추워도 울고, 배고파도 우는, 하나의 표현 방법 밖에 갖고 있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기도생활은 그렇게 출발합니다. 그 기도를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청함, 우리의 자녀
된 것을 인식하는 그 뻔뻔스러운 기초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입
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입을 연 내용과 방법과 묘사들이 엉망일지라도 내
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연하게 입을 열게 됩니다. 이
것을 \\\"굵은 신앙\\\" 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보신다는 이
야기입니다.
본문의 누가복음 11:5-13까지 말씀의 가장 굵은 초점은 무엇입니까? 기도
란 자녀가 아버지 앞에 응석을 부리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관계성을 확
인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방법이 아닙니
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표현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내용 이전의 문제이고, 요구하는 것 이전의 문제이고, 응
답을 받는 것 이전의 문제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맨 처음 가장
확실하게 찾아갈 수 있는 이가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도를 최후의 것으로 쓰는지 모릅니다. 세상
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하다 되지 않으면 그때서야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현
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찾아가기 쉬운 것, 가장 먼저 찾아가야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얼마나 자
주 하나님께 의뢰하는가 하는 문제를 기도라고 합니다. 어느 만큼까지 하나
님께 맡기느냐의 싸움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해서 하는 수동적인 신앙의 고백이 아
니라 적극적인 신앙의 고백으로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당신
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어떻게 외면하실 수가 있습니까?\\\" 라고 쳐들어가는
근거로써 기도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망가실 수 없는 근거
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그 기도 못 듣겠다.\\\" 고 하시더라도 \\\"하나
님,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외면하실 수가 있단 말
입니까?\\\" 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는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내가
쳐들어 갈 수 있는 대상으로서 기도가 허락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이 얼마나 적극적일 수 있는 것인가를, 얼마나 대담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신앙에 상당히 큰
도약을 해야 될 줄로 압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소극적이지 않은가 생각
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만 찾고, 그렇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고 먹고
살 만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이 본문의 지적으로는
끔찍한 불 신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기도라는 것이 나에게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때에야 비로
소 시작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도 기도의 제목이 생기는 예
가 있습니까? 내가 평온한데 내가 건강하고 먹고 살만하고 자녀들이 말썽부
리지 않는 데도 기도하십니까? 그런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
한 꾸중입니다. 그때에도 구할 것이 있고, 찾을 것이 있고 문을 두드려야
할 것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나에게 고통을 없게 해 주는 것, 난관을 통
과케 해 주는 것으로 밖에 우리가 기도를 써먹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는 이
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이란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을 면케 해 주
는 것 정도밖에 안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지금 제시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요구라
는 말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불행한 일이 있다면 신앙의 모험, 신앙의 전투가
없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기도가 전투적이고 모
험적이지 않고 현재를 어떻게 잘사느냐하는 것을 유지하는 데 있다고 생각
됩니다. 더 적극적인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인생을 허락하신 이유가 뭡니까? 저를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걸 물어 보시는 기도가 나와야 됩니다. 골방에 꿇어 엎드
린 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하십니다. 그것은 적극적으
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인생을 바치고 요구를 하는 참다운 신자의 자세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밖에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 시작이 없으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나에게 어려움이 없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많이 잠자고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십시
오.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인생에 하나님 앞에 바칠 일이 무엇
이냐고, 그걸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되느냐고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먼
저 들고 들어 갈 기도의 분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신앙의 적극적인 분발
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
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 응답을 주십니
다. 성령의 충만을 주십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남김없이 있
기 위하여 이 말씀이 여러분을 분발시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