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13
사람이 사람인 이유 중 하나는 가르치며 배우는 특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여타의 동물들 중에 훈련이나 습득이 있어도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수준에 머물지만 사람만이 지금까지의 지적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배우고 익혀 삶의 수준을 높여 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런 인간다운 특성이 잘 활용되어야 한다.
배우고 익혀 더 나은 수준에 오르려는 노력은 육적인 면에서보다 영적인 면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육적인 면에서는 덜 노력하더라도 익숙해지기 쉬는 일들이 많다. 그러나 영적인 부문은 전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세상에서 두루 통용되는 원칙들과는 거의 상반되게 다른 원칙과 방법들을 새롭게 적용해 나아가는 것이 영적인 성장이며 그것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만히 앉아 하늘만 쳐다보는 것으로 영적 성장을 이룰 수는 없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에서 시작되고 진행되며 그가 이끌어 주심으로 가능하게 되는 일들이지만 우리는 최소한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놓는 일을 감당하여야만 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축복의 약속들이 있고, 그 축복을 소유하고 누리는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기도의 교훈만 해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성도에게 엄청난 약속을 주셨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얻으리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실제로 그 교훈을 배우고 익혀서 실천했던 사람들은 엄청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엘리야를 들 수 있다. 그가 살던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3년이 넘는 가뭄이 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얼마나 많은 해결책이 동원되었겠는가? 그럴 때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 드렸다. 그리고 비를 주실 줄 확신했다. 드디어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히스기야는 어떤 기도를 드렸는가?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었다. 선지자도 유언을 하라고 했다. 그 때 히스기야는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병을 고쳐주셨으며, 15년이나 생명을 연장해주셨다.
성경은 그런 경험들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사람이면 아무라도 기도할 수 있고, 응답 받을 수 있다고 보증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를 배우는 일이다. 아울러 기도를 실천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기도에 대한 풍성한 응답을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이 바로 본문 성경이다.
1. 가르쳐 주옵소서
본문 1절에 보면 주님께 아주 의미 있는 요청을 했던 제자 한 사람이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공생애를 시작했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진도를 앞서 나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 스승에게 배워서 제법 기도를 익숙하게 잘하는 것을 예수님의 제자가 보았던 모양이다. 아직 제대로 기도를 하지 못하던 자기와 비교해 보면서 \\\"나도 기도를 잘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하는 바램을 가지던 차에 마침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기회를 놓칠 새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떤가? 기도가 성도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특권인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담인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부담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새로운 영적 생활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미 기도에 익숙한 분들을 보라. 그들은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즐겁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시고, 다 응답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감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그런 경험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나는 고교시절에 신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도의 기회도 그 때 가지게 되었다. 그 때 함께 학생회 활동을 했던 친구들 중에는 목사님 아들, 장로님 딸도 있었는데 그들이 기도 순서를 맡으면 조금도 막힘이 없이 술술 기도하는 것을 들으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종종 내 기도 차례가 다가오면 또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모른다.
지금도 기도 잘하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럽다. 시골 살 때 젊은 장로님이신데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에서든지 갑작스레 기도 순서를 맡겨도 얼마나 기도를 잘하시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우리 장로님의 기도도 얼마나 좋은지...)
누구든지 기도가 참 어려울 때가 있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도 기도의 자리에만 서면 땀을 뻘뻘 흘리게 되고 만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는가?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하지 않았는가?
\\\"나는 기도를 못해.\\\"라고 하면서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언젠가는 기도 잘하는 날이 오겠지.\\\" 체념하지도 않았다. 주님께 \\\"가르쳐 주옵소서\\\"요청을 했고, 배우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는 포기할 수 없는 특권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온갖 좋은 것이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물어서 배우는 일을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세상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배우지 않고는 무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하물며 성경과 영적인 일을 다 아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서로서로 약함과 모자람을 인정한 후 배우고 가르쳐주며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있다.
성경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이 있다. 왜 그렇게 되겠는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그런 결과가 있겠지만 우리들 입장에서 보자면 배우고 익혀 실천하는 열심을 가진 사람은 그 성장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고, 모르면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성장이 지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차별하지 않으신다. 누구의 기도는 들어주시고, 누구의 기도는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믿고 기도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다. 그러므로 기도 잘하는 사람, 풍성한 응답을 받는 사람 부러워 할 일만 아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응답 받아야 한다.\\\" 마음의 다짐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기도를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배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기도하고 그것을 응답을 얻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2.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께서는 제자의 요청이 있기 전에도 벌써 기도를 가르치고 계셨다. 이미 주님은 당신의 기도의 자리에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신 적이 많았다. 그 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시는지 무엇을 구하시는지 보고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정형화된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벌써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과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셨고, 기도 중에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내용도 가르쳐주신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요번에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시면서 그 유명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다. 물론 이 주기도도 습관적으로 암송할 재료로 제공하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님은 다른 성경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진심을 드리는 일없이 이미 외워둔 문장만 나열하는 것은 결코 바른 기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을 몇 번 암송하면 방언이 터진다거나 더 많은 횟수를 암송하면 무슨 일이 이루어진다는 식은 미신에 가까운 헛된 주장이다.
성도 여러분! 기도는 묵주 알을 헤아리면서 의미 없는 횟수만 채워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계시고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대화이다. 그것도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높은 권세이신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 기도가 어찌 마음이나 관조하는 무념무상이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기도는 결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종종 주기도문의 내용을 구분하여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것, 후반부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식의 분석을 대하게 된다. 그것이 알기 쉬운 분석이기는 하지만 구태여 그렇게 구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은 그 핵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하는 부분에서는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부터는 그 핵심이 구하는 사람 편으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내용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요청할 수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지만 더불어서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굶주리고 헐벗어 부끄러운 삶이 되면 그것은 결국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흉이 되어 영광을 가리우고 말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권능의 크심을 드러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렇게 해 주시라는 기도인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 말은 복을 주시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나도 기도시간마다 성도들이 누구에게도 못지 않은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건강이나 물질을 구하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을 구하되 목적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시며, 넘치는 활력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가장 많은 것을 자기신 분이시기에 얼마든지 우리를 부하고 귀하게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주실 때 무슨 목적 때문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많이많이 남겨서 자손만대 누리게 해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그것을 가지고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게 옳겠는가? 성경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목적으로 구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판단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3. 강청하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원형은 그렇게 길지 않다. 오히려 그 다음에 나오는 기도의 자세 혹은 태도에 관한 말씀이 더 양이 많다.
먼저 주님은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담대하며, 중단 없는 것이 되어야 할 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한 밤 중에 떡 세 덩이를 빌리러 온 사람 이야기다.
어떤 사람 집에 한 밤 중에 손님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마침 그 집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옆집으로 떡을 빌리러 간 것이다. 그것이 낮이라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만 모든 사람이 잠든 오 밤중에 해야되는 일이기 때문에 참 어렵고 꺼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시대야 오밤중이라는 시간이 따로 없지만 우리 나라도 얼마 전까지(아마70년대)만 해도 늦은 저녁이 되면 통행금지가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옛날은 지금처럼 주택구조에 방음처리가 잘 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 식구가 한 방에 함께 기거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낮 동안에는 통풍을 위해서 휘장이나 창을 활짝 열어두지만 밤이 되고 취침에 들어가면 모든 문을 닿아 걸어 담그는 풍습이 있었고, 그렇게 문이 닫혀지면 취침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표지가 되기도 했었다.
바로 그렇게 온 식구가 다 잠이 들어있는 고요한 시간에 이웃집에 가 문을 두드리면서 떡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이웃의 반응은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짐작이 된다. 당장에 안에서 외마디가 들릴 것이다. \\\"이 시간에 어떤 ××놈이야?\\\"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상황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그런 요청을 시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경우라고 기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은 아마 발자국 소리조차 죽여가며 이웃집에 다가갔을 것이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웃 친구를 불렀을 것이다. 한 두 번 부르는 것으로는 잠 든 이웃을 깨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절박한 사정(아니 여행 온 친구의) 때문에 이웃이 깨어날 때까지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인기척을 느낀 이웃이 일어났다. 그 시간에 정말 싫증이 나도록 귀찮은 일이었지만 모른 채하면 그냥 갈 것 같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떡을 빌려준다.
주님께서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8절. 우정이 바닥나는 상황아래서도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기기 때문에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무지 들어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요청하고, 또 요청하면 못 이겨서라도 들어주는 일이 있지 않느냐는 말씀이다.
그 다음의 말씀은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고 있다.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다. 그것은 한 밤 중의 이웃처럼 잠든 하나님을 깨우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떼를 쓰며 매달리라는 말씀도 아니다. 그 의미는 11절 이하에서 명백해지고 있다.
모두가 잠든 밤에 도무지 안 되는 일을 들어주게 만드는 경우가 있을진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 얼마나 우리 기도에 잘 응답하시겠느냐는 말씀이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다. 안 들어주시려는 것을 억지로 들어주시도록 통사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주실 수 없는 것을 강제로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이다.
그런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기도가 어떤 마음으로 들려져야 하겠는가? 얼마나 자주 드려져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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