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도구가 되기도 하는 좋은 것 눅5:33-39
컴퓨터와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도움을 많이 주는 것인지 날마다 경험한다. 우선 컴퓨터로 신문을 볼 수가 있다. 조선일보, 한겨레, 국민일보를 보는데 만약 돈 주고 신문을 본다면 매달 몇만원의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신문에서 좋은 예화거리를 복사하여 컴퓨터에 저장해 놓는데 이젠 거의 600여 페이지가 되고 있다. 예전에는 신문을 찢어서 스크랩을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내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유익을 얻는 또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의 강의나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늘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서지만 때로 말씀을 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럴 때는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테이프 사러 갈 필요도 없어진 셈이다. 또 좋은 강의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디 그뿐인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교우들과 좋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전화나 말로 하기 힘든 것들을 이메일로 주고 받을 수 있다. 좋은 글이나 그림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다. 화상을 통하여 얼굴을 보면서 통화할 수도 있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좋게 쓰일 수 있는 컴퓨터와 인터넷이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좋지 않게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전신전화회사에서 2백만 달러에 이르는 통신 자재 횡령 사건이 있었다. 19세 된 한 젊은이가 컴퓨터화된 통신 자재 관리 시스템을 조작, 2년간에 걸쳐 빼낸 액수다. 그나마도 같이 일하던 동료가 고발함으로써 드러난 것으로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컴퓨터 범죄의 특성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주가를 조작하고 타인의 정보를 캐내며 다른 사람의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가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인해 사회는 온갖 몸살을 앓고 있다. 사회 속에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주부들은 채팅을 하다가 바람을 피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화상 채팅을 통해 온갖 음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더럽고 음탕한 내용들이 가득한 인터넷의 바다에 빠진 채 익사 직전인 사람들도 천지이다. 심지어는 자살 사이트나 도둑 사이트까지 등장하고 한술 더 떠서 갖가지 이단들이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퍼뜨리고 있다.
그들 모두는 유용한 컴퓨터와 인터넷을 전혀 유용하지 않은 쪽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 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있어서도 참으로 유용할 수 있는 것들을 좋지 못한 일에 활용하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바로 교회 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가치있는 곳에 쓰여질 수 있는 재정을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쓴다든지, 좋은 인간 관계를 가지고 사람을 이용하는데 사용한다든지, 성경 말씀을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목적으로 활용한다든지, 기도나 금식을 외식의 도구로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잘못된 도구가 되기도 하는 좋은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혹 우리의 신앙 속에서 그처럼 썩은 내가 나는 것은 없는지 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한다.
1. 바리새인들의 비판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자.
1)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비판하고자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바로 예수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걸고 넘어지려는 목적으로 제자들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면서 사용한 논법은 상당하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요한이나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공공연하게 그 권위가 인정되는 대표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바로 그들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제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데 있어 금식과 기도라는 주제를 사용하고 있다. 금식과 기도는 참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 응답을 얻는 능력의 수단이다. 어느 누구도 기도와 금식의 무용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 생활에 있어 정진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와 금식에 열심을 내야 한다. 그처럼 값진 기도와 금식을 언급하면서 우리 함께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자는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목적은 명백하다. 예수님 일행에게 망신을 주고 싶은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꼬인 마음이 아름다운 경건의 수단을 남을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만든 것이다.
2) 왜 꼬인 마음이 되었을까?
여기에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 왜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꼬인 상태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바로 직전에 나오는 내용만 살펴도 잘 드러난다.
사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태도가 처음부터 공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던 예수님과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으며 어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눈에 거슬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외형적인 거룩을 중시하는 그들의 눈엔 그런 예수의 모습이 못마땅하게 비쳐졌고 즉시 바리새인들의 장기가 나타난다. 예수를 비방하는 것이다.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반응이다. 꼼짝 못하고 그들의 말에 수긍하든지 행동을 수정했으면 좋을텐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에 곧바로 반격을 가하신 것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장)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이제 꼬일대로 꼬인 상태가 되었다. 존경받는 자신들인데 시골의 애송이에게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다시 즉각적인 반격을 가한다. 금식과 기도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걸고 넘어간 것이다.
2. 예수님의 대답-첫번째 비유
그러나 예수님은 머뭇거리거나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러나 즉각적으로 말씀하신다.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 신랑되신 예수
이 말씀은 분명히 바리새인들에게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느닷없이 혼인집 손님 이야기는 왜 나온단 말인가? 또 신랑은 왜 등장한단 말인가? 여기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혼인집 손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은 잔치의 시간이다. 혼인집에서는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고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예수님은 사역의 시작을 앞두고 40일의 금식을 하신 이외에 또 다른 금식을 하신 적이 없는 것으로 복음서에 나타난다. 오히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사람들과 어울리셨던 분이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도 당연히 예수님을 따라 먹고 마셨음은 분명하고 말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하고 먹고 마신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때로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 동떨어진 듯하다. 거룩과 경건을 엄숙한 것으로만 이해하든지, 금욕적인 생활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하는 경구가 종종 있는 것이다. 물론 엄숙한 것도 필요할 때가 있고 금욕적인 훈련을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늘 그래야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보라.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얼마다 잘 먹고 잘 마시는가? 얼마나 즐겁고 경쾌하게 지내는가? 방탕이 아니고라도 얼마든지 명랑하고 활기차게 신앙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것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그것을 비난하고 빼앗아 가려고 한다. 예수님은 그점에 있어 양보하시지 않는 것이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
그러나 제자들이 금식하며 슬퍼할 때가 온다. 그것은 신랑을 빼앗기는 때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조차 당혹스러운 말씀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신랑을 빼앗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신랑을 빼앗기면 혼인잔치는 아수라장이 될 것인데 누구 그런 정신없는 짓을 할 것인가? 도대체 빼앗겨질 신랑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빼앗긴다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것이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의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죽음을 겪어야 하는지 알고 계셨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계셨다.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장)
어쨌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도 이해 못하는 말씀이다. 신랑이라는 비유가 아닌 직접적인 말씀을 하셨을 때도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을 알지 않는가? \\\"30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쌔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막 9장)
3. 예수님의 대답-두번째 비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대한 답변으로 혼인집 신랑에 대한 비유와 더불어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여기에서는 새것과 낡은 것이 분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낡은 것
먼저 낡은 것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상징한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낡은 옷이요 낡은 가죽 부대인 것이다. 그것은 전통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 동안 사람들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그것들을 낡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낡은 것이라 생각했으면 버렸을 것이 아닌가? 바리새인들의 눈에 자신들이 가진 기준과 교훈은 낡은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전통이다. 그것은 전가의 보도로서 어떻게 휘두르든지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보물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위를 세웠으며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묵은 포도주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포도주보다 묵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들이 묵은 포도주를 가지고 있으니 기득권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관점이었지 예수님의 관점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보실 때 그것은 낡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폐기처분하여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 것인 셈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금식과 기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도 들어있다. 아주 낡아버린 태도인 것이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기도와 금식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분명히 가르치셨다.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장).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장)
그런데 낡은 가치관에 젖어있는 바리새인들은 그 기도와 금식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2) 새 것
이제는 새것을 살펴보자. 새것은 무엇인가? 새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어떤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그것을 새롭게 조명하심으로서 새것이 되게 하시기도 하셨다. 예를 들어 사랑의 계명은 옛부터 있던 계명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옛계명을 새롭게 하신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장)
이러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낡은 것으로 담아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비유 속에서 그점을 명확히 하신다. 새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낡은 옷은 찢어져버리고 만다. 낡은 옷은 새옷의 조각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면 어떻게 되는가? 낡은 가죽 부대는 찢어지고 만다. 결국 가죽부대는 망가지고 포도주는 포도주대로 쏟아지고 말게 된다. 결국 새것을 낡은 것에 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누가 하는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자신들의 낡은 것으로 예수님의 새 교훈을 어찌해 보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간혹 그처럼 안타까운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보여진다. 오래 예수 믿은 사람 중에, 그리고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 중에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으로 자신의 전통을 삼아 그 전통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곤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성령의 새로운 역사까지도 제한한 채 모든 것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으로 문제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성도와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화석화되곤 했던 것을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종교가 일종의 기득권이 되고 종교인은 그 기득권을 지키기에 안달인 불쌍한 사람들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부디 여러분은 분명한 진리 위해 굳건히 서되 본질에서 벗어난 것으로 굳어져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라.
결론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
나와 여러분의 신앙은 낡은 것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기를 원한다. 본질과 생명력은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처량하게 남은 비참한 모습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우리를 내세우거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근거로 잘못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삐뚤어진 사람들도 처음부터 신앙이 고착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근신하여 깨어있지 못했을 때 어느덧 신앙의 본질인 사랑과 섬김은 잃어버리고 권위주의만 남은 껍데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건드린다고 느껴질 때 바라새인들처럼 경건의 수단조차 판단이나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는데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교회와 세상을 더욱 잘 섬기고 도우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위해 선용하라고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활용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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