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기적

기도의 기적/막11:20-24

기도의 기적
막11:20-24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전도하고 나왔을 때! 예수님이 매우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찿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시장기를 채우기 위해서 무화과나무 아래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가 열매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잎사귀외에 아무것도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실망했습니다.
관상용나무가 아니라 유실수일 때는 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무를 향해서 이런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그리고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지나가는데 예수님이 심판한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말라버렸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왜!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의 진리를 가르쳐주느냐?하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호과 나무의 열매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무화과나무처럼! 잎만 무성하고 마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유대인의 율법적인 믿음입니다.
율법적인 믿음과 복음적인 믿음은 다릅니다.
“나는 어떤 믿음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적인 믿음은 기도의 열매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열매가 없습니다!”
“예배의 모양은 있지만 예배의 열매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잎사귀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여인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늘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감동과 눈물과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영혼의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와 열등감의 문제에 시달립니다.
자기의 영혼의 무거운 짐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나는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못난 여자다!”라는 자기의 문제가 자기를 괴롭힙니다.
다른 사람이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상처가 자기를 괴롭힙니다.
남편은 행복을 줄줄 알았는데 오히려 행복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다시 얻고 다시 얻고 반복했는데 행복이 해결이 안됩니다.
동네사람들과의 문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열등감이 더 깊어져 가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엃혀 들어 갑니다.
얼마나 허물이 많습니까?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었으니까?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죄와 허물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허물과 죄! 그리고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가정의 문제도 아니고! 남편의 문제도 아니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예수님은 영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영으로 예배할 때만 하나님을 만날수가 있습니다.
영으로 예배드릴 때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으로 예배드렸습니다.
자기의 심령이 변하는 것입니다.
영의 예배를 통하여 성령의 죄사함과 기쁨의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율법의 예배를 드릴 때는 이런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눈물이 없었습니다.
가슴이 얹혔던 것이 풀리는 것처럼 마음이 풀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의 예배는 예배의 잎사귀는 있지만 예배의 열매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의 예배를 드리니까?
구원의 감동이 오고 구원의 기쁨이 오고 말씀을 전하는 싶은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예배의 열매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열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믿음들은 수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잎이 무성하고 활동이 무성해도 문제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열매맺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맺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의 진리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진리는 기도의 기적입니다.
기도의 기적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내마음대로 하는 기도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과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양궁을 하는 학교에 나왔습니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 양궁장에 가보면 선수들이 화살이 두루루 떨여져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화살을 쏘아도 과녁에 곱히는 화살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과녁에 곱히는 화살하고 떨어지는 화살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같은 선수가 쏘더라도 활을 쏘는 힘과 자세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에 확신이 없이 쏘거나 하면 여지없이 떨어집니다.
기도도 양궁과 마찬가지입니다.
응답되는 기도는 기도의 자세와 믿음이 다릅니다.
기도가 좋은 문장이라서 기도의 응답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훈련이 되어서 응답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응답되는 기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를줄 믿고!”라는 믿음입니다.
내기도로 고백하고 말하는 것이 이루진다! 라고 믿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고 믿지 않습니다.
믿으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의심이 없이 기도한 사람들은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이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땅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비를 주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합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큰 비의 소리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마음에 먼저 응답이 옵니다.
비가 오기전에 엘리야의 마음에 먼저 응답이 옵니다.
그래서 사환에게 “올라가서 바다 편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왜! 사환에게 바다를 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아합왕에게도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비를 주시는 믿음이 없으면 왕에게 이러 말을 하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왕이시여! 제가 최선을 다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응답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비가 오고 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말입니까? 얼마나 교양있는 대답입니까?
얼마나 실수하지 않는 말입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큰 비가 오고 있습니다!”
“사환아! 바다를 바라보아라! 큰 비가 오고 있다!
믿음이 없는 사환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큰 비가 오고 있다! 바다를 바라 보아라!”
그런데 대답은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야의 믿음이 아니면 여기서 주저앉습니다.
“안돼나 보다!” 그리고 주저앉습니다.
사단은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게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마음을 품어 마음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5-7)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는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을 반복합니다.
사환이 바다를 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기도의 응답을 믿고 있습니다.
“큰 비의 소리가 들리나이다!”
일곱 번째 사환이 나갔을때! 사환의 말이 달라집니다.
“사람의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있나이다!”
그런데 아합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아니 아직 비도 오지 않았는데 비가 오니까!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바람이 일어나면서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큰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까?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모하는 기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기도를 하더라고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에 사모함이 없으면 식어진 기도입니다.
사모하는 기도라야 기도의 응답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사모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에게 해결받은 바디메오의 사모하는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질병의 기적이든! 부요함의 기적이든 기적의 현장에는 반드시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사모함으로 해결받은 바디메오의 사모함의 기도가 있습니다.
믿음은 사모하는 기도를 통하여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기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바디메오의 믿음의 행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나가실 때에 디메데의 아들 소경인 거지 바디메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말씀합니다.
길가에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위해서 사모하고 있습니다.
기적의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믿는 자의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기적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허급 지급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온 것이 아닙니다.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아서 기다리고 사모하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성경에 사모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적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자를 만족케하시고 주린 자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9:9)라고 말씀합니다.
바디메오는 여리고를 나가는 길에 이미 나가서 기다리고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가져오는 사모하는 믿음입니다.

응답받는 기도가 기적을 일으킵니다.
기도에는 응답받는 기도가 있고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들여셨고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는 믿음은 응답을 나타나는 것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이 나타나지 않아도 기도를 이루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응답을 믿었습니다.
비가 와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비가 오기 전에 이미 기도의 응답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응답받는 기도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의 응답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앞에 노동하는 의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논에 물을 대기위해서 보라는 것을 했습니다.
큰 내를 막아서 물을 한 도랑으로 흐르게 하고! 그리고 보를 한 가정에게 물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물이 있어야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를 하기 위해서 새벽에 보하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한사람은 의무적으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무적으로 나가야 논에 물을 대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의무적으로 나갑니다.
자기 집에 물을 주는 일이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보를 하면 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보하러 나오라 하면 아침 새벽에 억지도 나옵니다.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가정이 유익을 보고! 내 논에 물을 주는데도 억지로 나옵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만 하다가 돌아갑니다.
그리고 물을 받는 자격을 얻습니다.
나는 내가 할일을 했다! 하고 생각하고 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도를 마치 보하는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해야하는 의무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힘이 없고 사모함이 없고! 단순한 의무입니다.
기도의 단어에 진실과 사모함이 없습니다.
기도에 목마름이 없습니다. 기도의 갈증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유익한 것을 알지만 기도의 열정이 없고 기도는 해야 하는 의무정도로 생각합니다.
기도의 눈물이 없고! 기도의 사모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겟세머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기도요! 능력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때!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야리오의 딸을 살리신 기적이 있습니다.
“회당장의 하나인 야이로가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옵소서!”(막5;22-23절)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죽음의 사건이 있을 때! 질병의 사건이 있을 때 예수님이 그 사건을 이기는 멧세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멧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해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에게 자신있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라!”
다른 사람들은 죽었다는 소문이 나고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소문을 따르지 않습니다.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을 믿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중학교때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번쩍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누렇게 빛난다고 다 금은 아닙니다.
금은 순도를 통하여 금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불순물이 없는 금이 될수록 값어치가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금의 순도가 높아야 합니다.
금의 순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도 순도가 있습니다.
기도에도 순도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기도의 능력이요 기적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니라!”(막11:23-24)라고 말씀합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으면 기도한대로 되는 역사와 기적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곡식만 결실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가 결실하는 영적이 추수입니다.
영적으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가 되지않고! 기도의 많은 열매를 맺는 기도의 기적이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