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방해 요소

기도의 방해 요소/막9:14-29

기도의 방해 요소
막9:14-29





주님께서 변화산으로 가실 때 12제자를 다 데리고 간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보고만 데리고 갔습니다. 왜 이들만 데리고 갔는지에 대한 특별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겠지만 가만히 보면 제자들 중에 중요한 인물들임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제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자기들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자리에 끼지 못한 것에 대한 비교의식과 열등의식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주님과 세 명의 제자가 변화산에 있을 때 한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귀신이 나가질 않습니다. 제자들은 병을 고쳐본 경험이 있고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내려오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요. 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그때 예수님께서 ‘기도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제자들이 기도하는 사람들 이였고 능력을 행했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유독 예수님이 기도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금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렸을까요? 열등의식과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등의식 그 자체 때문에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보다도 이것으로 인해 불신이 싹터섭니다.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내려 오셔서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들을 참으리요’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이 왜 아직까지 나를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열등의식은 자기의 무한한 잠재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9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지 못했다는 비교의식 속에서 나타난 열등의식으로 말미암아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기도가 막혔고 능력이 막혔습니다. 사실 매 순간마다 똑 같이 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12제자들을 한결같이 똑 같은 방법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나 축복과 은혜가 골고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특히 비교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똑 같이 했는데 누구는 축복을 받고 누구는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사랑을 골고루 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교하게 되지요 그래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분노하게되고 그 결과 기도와 예배가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 나는 왜 이렇게 안 풀릴까? 나는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을까?’이런 마음의 외침속에 열등의식이나 분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고 하시면서 모든 것의 원인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의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창세기 5장 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겼더라’이 의는 이신칭의 의 의 와 같은 뜻입니다. 여기서의 뜻은 정의를 세우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능력 헌신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행함의 근거를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행함이 이루어져야 이것이 열매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행함은 열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기준 없이 뿌리 없이 그냥 열심을 내는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연히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가야 바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없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 입니다. 로마서 3잘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예수의 피를 화목제물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피가 없으면 예배도 드릴 수 없고 기도도 할 수없고 성령의 임재도 체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타나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이 바른 관계는 법칙입니다. 인수분해를 하지 못하고 미, 적분을 풀 수 없듯이 공식을 외우지 않고 문제를 풀 수 없듯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없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른 관계 속에서 기도를 해야 기도에 응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 바른 관계로 인하여 범사가 잘되는 것은 법칙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법칙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의가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의로 출발해야합니다. 헌신 할 때도 의로 하지 않으면 자기의 행위에 대한 열심밖에 안됩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열심밖에 안된단 말입니다. 전도도 봉사도 예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에 사실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 자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의는 그냥 의입니다. 율법적 의 입니다. 자기들이 열심을 내는 일에 충실했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왜 바리새인의 의로는 안되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의가 아니라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기위해 행위를 드려내는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의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이를 믿는 의 이지요.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열심이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의를 제대로 깨달았고 그 바울의 신학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학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캘빈이라고 합니다. 이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향해 술이 아니고 사랑이다’향해술이란 어떤 기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 내 실력 내 방법을 가르키는 말이지요. 이런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가 안되는 이유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나오지 않고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그랬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구하면 들어 주신다는 말씀인데 여러분 무엇이든지 구했는데 다 들어 줍니까? 사실 안 들어 준 것이 더 많지 않습니까? 기도는 참 이상합니다. 기도 해 놓고 나면 그 순간은, 지금은 응답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지나고 보면 응답이 되어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성장하는 범위 안에서 응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에 대한 답이 1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즉, 의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기도는 자동적으로 응답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계명안에서 구하면 다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쉽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기도를 하면 16절에 말씀처럼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다 들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기도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면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바로 다 들어 주셨다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누가복음 11장 9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여기 말씀을 보면 딱 떨어지지 않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주실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딱 떨이지지요. 구해 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찌 아비된 자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는데 절갈을 주겠느냐?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받치기 까지 하신 하나님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무엇을 안 주겠느냐고요? 성령을 안 주겠느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통해서 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기도는 성령이 역사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믿고 나갈 때는 성령이 역사합니다. 영혼이 잘 되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믿음을 지키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기도는 응답받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일에는 축복이 임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예배가, 삶에 성령이 임하느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생각하느냔 말입니다. 마태복음 18장 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내 이름으로 모인 곳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이 피로 모인 자들, 그의 의로 모인자들 속에 내가 함께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 구하는 것 다 들어주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성령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인 곳에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아세요. 성도들이 모인곳이 그래서 축복입니다.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는 것이 그래서 축복입니다. 가정에서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하는 구역예배가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형성 해 나가는 예배가 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축복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두 세 사람이 모여 세상적인 풍조에 따라 가면 안 됩니다. 함께 술 마시러 가서도 안 됩니다. 차라리 술 마시고 싶으면 혼자 마시세요. 왜냐하면 믿는 자가 안 믿는 자와 함께 술 마시면 덕이 안 되잖아요. 이것도 죄입니다. 그래서 혼자 마시란 말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노래방도 가지마세요. 성령이 함께하시는데 찬양할 이는 없고 세상적 안목에서 즐기고 노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와 의를 가지고 가면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는 사랑이 회복되어야 됩니다.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야합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 그 다음은 네 마음대로 하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친밀함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친밀의 장애 때문에 기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지 않습니까? 왜 친밀하지 못합니까?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죄책감과 좌절감에 의해 나타난 불신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제가 설교를 많이 했기 때문에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아버지가 굉장히 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엄한 아버지는 정을 잘 안줍니다.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여자에게 냉혹한 점입니다. 그러니 그 밑에서 성장한 딸이 엄한 아버지 밑에서 따뜻한 정도 받지 못하고 성장을 했습니다. 이 여자가 성장하면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느냐하면 남자에 대해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회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하나님도 남성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과 1대 1의 만남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매가 기도 빼놓고는 다 잘합니다. 다 열심입니다. 이 자매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상을 회복시켜야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다정하신 하나님, 위로와 복주시는 하나님을 회복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는다면 우리의 죄는 말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죄가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회복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믿는 것입니다. 피의 능력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회복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결과에 대해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100점만 맞아 오면 부모들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전화통이 불이 나지요. 그런데 60점만 맞아오면 밥도 먹지마라 이렇게 나옵니다. 아이 생각에 좋은 업적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부모님들은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업적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외면하는 것이 부모들은 좋은 교육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관심은 오직 좋은 성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업적을 가지고 가야 되니까 그때부터 편법을 쓰게 되고 관심을 끌게되는 유일한 방법은 결과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이런 방법이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기도 할 생각을 안 하고 무엇인가 자꾸 하려고 만합니다. 무엇인가 관심을 끄는 일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헌신을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계회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내어 인정을 받는 것에 집작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9명의 제자들은 소외된 마음 때문에 열등의식 때문에 주님과 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서운함이 있습니다. 거리낌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생깁니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와 있는 경우가 많지요. 금요심야예배, 새벽기도회 또는 따로 와서 기도하는 사람, 가정에서 골방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앉아있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유가 많겠지요.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면 남들과 비교가 되고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소외감을 느끼지요. ‘ 왜 나만 이 모양이야!’이런 생각 속에 불신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 인격이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내 인격이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여러분 잘 들어세요. 기도는 내가 하지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입을 봉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비교 때문에 내 처지에 대한 낙심 때문에 불신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야곱의 부인중에 레아가 있습니다. 야곱은 레아를 위해 라반 외숙집에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레아는 첫째 딸이고 둘째딸인 라헬을 위해 7년을 일했습니다. 7년을 일하면 라헬을 준다고 외숙이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년이 지나고 결혼식을 마치고 밤에 야곱과 합방을 하는데 외숙이 라헬을 들어 보내지 않고 첫째 딸인 레아를 드려 보냅니다. 첫째 딸인 레아를 드려 보내면서 레아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틀림없이 불러서 ‘애야 너는 네가 생각해도 결혼하기 틀렸다 야곱 봐라 너 때문에 7년씩이나 일한 놈 같냐 7일도 안한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눈 딱 감고 합방해라’이러지 않았을까요? 자존심 굉장히 상하는 일입니다. 레아가 라헬을 보면 열등의식을 갖고도 남습니다. 오죽했으면 서양에서 딸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라헬이라 붙이지 절대로 레아를 붙인 이름은 없습니다. 레아가 죽고 난 후에도 이렇게 푸대접을 받습니다. 레아가 못생긴 것은 둘째 치고 안질도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낮이 되었습니다. 얼굴을 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야곱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함께 잘 살아 봅시다’ 이렇게 했겠습니까? ‘너 왜 들어왔어! 와 미치겠네 왜 네가 들어왔어! 네가 너 때문에 7년이나 고생한 줄 알아! 빨리 나가 아이구 저 왠수’이렇게 하지 않았겠느냐 말입니다. 자존심 엄청나게 상했을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말입니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레아가 그 열등의식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 모든 아픔과 수치심과 열등의식을 갖고 하나님을 불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나갑니다. 그는 두려움과 슬픔이 기도가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레아에게 있었습니다. 그녀는 6명의 아들과 1명의 여자인 디나를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난후 이름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이며 신앙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루우벤입니다. 루우벤을 낳을 때는 너무 흥분해서 너무 쌓인 것이 많아서 그런지 ‘보라 아들이다’는 뜻입니다. 둘째가 시므온입니다. 뜻은 ‘들으셨다’그러니까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셋째가 레위 인데 ‘연합함이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이 유다입니다. 유다의 뜻은 ‘ 찬송하리로다’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아이를 못 가졌습니다. 아이를 못 가지는 열등의식이 있었지만 그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하지 않고 남편에게 가서 바가지를 막 긁습니다. 바가지의 원조가 라헬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러니까 창세기 30장 2절에 화를 내면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겠느냐?’그럽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편법을 씁니다. 기도 안하면 편법을 쓰게 되어있습니다. 자기 여종이 빌하를 야곱의 침상에 넣습니다. 그 당시는 자기 여종이 낳아들은 자기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인은 소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하에서 두 아들이 나옵니다. 첫째가 단입니다. 단의 이름의 뜻은 ‘내 억울함을 풀었다’입니다. 둘째가 납달리입니다. 그 뜻은 ‘이제부터 경쟁이다’이런 뜻입니다. 순전히 질투와 경쟁의식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아들 둘을 더 낳지요. 그 다음이 이사갈 뜻은 복됨입니다. 그 다음이 스볼론 그 뜻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거하신다’입니다. 보십시오. 레아는 기도의 삶이 깊었습니다. 사실 레아가 끝까지 야곱의 위로자가 됩니다. 그리고 죽어서 야곱과 합장해서 묻힌 여인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은혜의 승리입니다.

비교의식을 가지고 열등의식을 가지면 자기의 잠재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왜 나는 이 모양일까? 왜 나는 무엇을 하면 잘 되지 않을까? 하나님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진정으로 살아계신단 말인가? 살아계시면 나를 이 모양으로 둘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못한 것이 없는데!’이런 생각이 불신과 원망을 가져오게 되고 그래서 기도하지만 기도가 되지 않고 능력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을 어떻게 푸느냐하면 시기심과 분노로 풀고 있습니다. 이것이 라헬의 인생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서 기도의 장애 요소가 있다면 잘못된 안도감입니다. 6장13절에 제자들이 실질적으로 귀신을 쫓아냅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행한 능력을 기술로 생각합니다. 한번 익힌 것은 또 다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축복 받으면 제일 먼저 중단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낮은 지위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제일 먼저 기도부터 중단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꾸준히 기도할 때 우리는 삶의 동력을 얻습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L.A 에서 1999년 10월에 있었든 일입니다. 미국 L.A 흑인지역에서 슈퍼를 운영하고 있던 홍정복이라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나이는 52세이고 이민 온지 15년이 되었습니다. 이민 온지 15년이라면 이제 고생은 어느 정도 끝나가는 그런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흑인 촌에서 흑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누고 희생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정말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지역의 흑인들은 홍정복이란 발음이 잘 안되니까 ‘마마’라고 불렸습니다. 흑인들의 어머니란 말이지요. 1994년 L.A 폭동이 있을 때 흑인들이 그 가게를 둘러쌓고 그 가게를 지켜서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였습니다. 다른 지역의 흑인 한 사람이 홍정복씨가 운영하는 슈퍼에 들어와 강도짓을 하는데 이 여인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주 나약한 여인 하나가 다민족이 사는 미국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파급이 그 사회를 뒤덮었습니다. 죽은 후에 L.A 지역 언론에서는 홍정복 시리즈가 몇 일 동안 보도되었습니다. L.A 지역의 주지사 뿐만 아니라 유명한 정치인 각계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나약한 한 여인입니다. 그저 복음을 들고 조그만 일에 실천 한 사람입니다. 그 지역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하고 헐벗은 흑인들을 위해 실천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이 죽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기에 참석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L.A 지역의 교회가 800교회, 목회자가 1600명이 있답니다. L.A 지역의 한국 기독교 100년 사에서 교회가 지역을 위해 헌신하고 일한 것보다 이 한 사람의 기도와 실천이 더 켰다고 합니다. 황무지에 기도의 씨를 뿌리고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들 때문에 숲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교회 한 사람의 기도용사가 필요할 때입니다. 그 한 사람의 기도 때문에 가정이 살고 사업체가 살고 교회가 살고 이웃이 살고 이 민족이 사는 역사가 분명히 있습니다. 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나간 사람의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기도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기도의 은혜가 넘쳐나고 기도의 축복을 눈으로 보는 역사를 체험하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할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분명히 응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열등의식을 가지고 고통 중에 살 필요가 없는 것은 성령이임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큰 무기가 있습니다. 이 무기로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