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기쁨/벧전1:3-9 2004-04-22 12:31:13 read : 139
해방되기 전, 함경북도 나남에 한 여자 거지가 있었습니다. 젊은 여자인데, 살이 보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구걸행각을 하였습니다. 젊은것이 무엇을 못해 거지가 됐느냐, 멀쩡한 여자가 일하기 싫어서 그 모양이냐 하며 남들이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으나 한 번도 화를 내는 일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어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로 돌려놓고 제대로 상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8.15해방이 되고 북쪽에 소련군이 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거지가 소련군의 장교 옷을 입고 중위의 견장을 달고 나타난 것입니다.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여자 간첩이었습니다. 이 거지가 그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소련 장교인 그는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긍지가 있었고 자기의 능력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멸시할 자격이 없다고 믿었으므로 주위가 자기만 거지로 알고 함부로 대하는 것이 조금도 괴롭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분의 확실한 보장만 있으면 누가 뭐라고 말해도 당당하게 자기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영국 황제가 민정을 살피기 위하여 순시하고 있었답니다. 조그마한 동리에 이르렀을 때, 방앗간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오는 것을 듣고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한 할머니가 혼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너무 아름답게 여겨져서 한 번 불러 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이 찬송을 듣고 임금님은 너무 기뻐서 다시 부탁하기를 2절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이 할머니 얘기가 “이 찬송은 내가 만든 거라서 2절은 없습니다. 1절뿐입니다.” 임금님은 즉석에서 가슴에 우러나는 생각이 있어서 “내가 2절을 만들어 부르겠습니다. 지어 줄 터이니 앞으로 2절을 꼭 부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대영제국 황제가 날 부러워 해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늙은 할머니지만
천국의 소망이 확실하면 황제도 부러워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의 소망이 넘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런 기쁨이 넘치는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큰 기쁨의 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소망과 기쁨의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불교는 상갓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미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요, \'인생 무상\' 이라고 하면서 모두가 다 죽고 다 없어진다 하니 죽음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유교는 마치 제사집과 같습니다. 밤낮 효도한다고 하면서 제사 지내는 일에만 정성을 다하니 유교식대로 살다 보면 일 년 내내 제사만 지내야 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잔치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 기쁨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은『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홍해를 건넌 것을 찬송하였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어 먹게 하신 것을 찬송하였습니다. 대적에게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칭찬하며 하나님을 높여 드렸습니다. 사람은 칭찬 받을 때 제일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찬송드릴 때 너무 좋아 하십니다. 특히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어 저주 가운데 지옥 가는 인생입니다. 이 추한 인생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도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시작하는데
그 찬송은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3절 부활하심으로 산소망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기업을 주신 것을 찬송합니다.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기는 하지만 현실은 너무 어렵습니다. 6절에『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현재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잠깐 근심하게 됩니다. 7절에『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지금 그 여러 가지 시험은 간단한 어려움 정도가 아닙니다. 불로 연단하듯 힘든 고난입니다. 어디에서나 기독교 복음이 들어 갈 때 많은 어려움을 만납니다. 특히 기독교 복음이 들어갈 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전도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분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너무 놀라서 한 말이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못살아요\" 그런데 요즘 보아도 그러니 제가 자랄 때 교회는 지질이도 못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요즘에는 상당이 생활이 좋아 졌지만 초기 목사님들은 하루 세 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웠습니다. 김요석목사님이 전라도에서 처음 나환자 목회를 하는데 하루에 한끼도 못 먹을 정도로 힘들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에 감사로 쌀들을 헌신하셔서 서너 말이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하여 이제 하루 세끼는 먹겠다고 생각을 하고 감사하였더니 어느 분이 절뚝거리며 찾아 오셨습니다. 그 분도 목사님이신데 아들 딸 셋과 다섯 식구가 사는데 목사님의 생계가 어려워서 사모님이 남의 밭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데 사모님이 허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누웠는데 자식들의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무작정 나와서 첫 번 보이는 교회에 가서 부탁하자고 생각하고 무작정 나왔는데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말에 주님의 원하시는 줄 알고 모두 전해 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들이 살기가 힘들다는 것은 교인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있어도 드릴 것이 없어서 못 드립니다. 제 어머님이 제게 늘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목사님 와이셔츠 하나 해 드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것 하나 못 해 드린다고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본 의식주문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힘이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전도할 당시에도 예수님을 능력과 사랑에 감복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지만 고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불로 연단하듯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는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배드로 사도는 마음이 “찡”하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고도 부인하여서 주님께 부끄러운 사도인데 8절『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불로 연단하듯 힘든 시험 중에도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사도의 말만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사랑은 단순한 사랑 정도가 아닌 9절\"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구원을 인하여 8절『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보지도 못한 예수님이지만 사랑하고 그 사랑에 하늘의 구원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그 기쁨은 영광스러운 기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상황 때문에 기뻐하는 기쁨이 아닌 현실의 상황이 좋고 나쁨에 상관 없이 하늘의 천국 산소망이 있어서 기쁘니 그 기쁨이 영광스러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람을 움직이는 감화의 기쁨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어느 날 우연히 할머니 몇 사람이 양지에서 햇볕을 쪼이며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기쁨이 가득 찬 얼굴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존 번연은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져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했으며 새 사람이 되는 확실한 경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위대한 신앙의 문학은 바로 그 기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기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행 중에 있던 한 변호사가 그 곳에서 하루를 머물게 됐습니다. 마침 그 날은 주일이어서 크리스천인 그는 낯선
이 도시에서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호텔을 나섰으나 어디에 교회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순경한테 물었습니다. \"여행 중에 주일을 맞아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면 교회가 있습니까?\" 순경은 이렇게 저렇게 가면 교회가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변호사는 순경이 일러 주는 대로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순경을 또 만났습니다. 변호사는 그 순경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이 일러준 교회를 찾아가면서 보니까 도중에도 다른 교회가 많던데 하필이면 왜 맨 끝에 있는 그 교회를 소개하셨습니까?\" 순경이 대답합니다. \"저는 참된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통정리 하면서 그 동안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더니 그 교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제일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행복해야 합니다. 우울한 그리스도인이란 매우 모순적 표현입니다.
1887년 어느 겨울 날, 히윗 여사는 전도하려던 불량 소년에게 크게 맞아 부상당하여 오랜 병원생활을 하던 중 굳건했던 신앙도 짜증으로 변할 즈음이었습니다. 이때, 한 흑인 여자가 병실 청소를 하면서 즐겁게 흥얼거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히윗 여사는 그만 짜증을 내었습니다. \"청소부 주제에 무엇이 그렇게 좋지?\" 흑인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형편과 사정이 찬송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니 즐거울 수 밖에요.\" 이에 그녀는 자신의 초라한 믿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곧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고 참회의 시를 썼습니다. 그것이 455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입니다. 주안에 있으면 다른 근심은 없습니다. 다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입니다. 영광스러운 기쁨에 젖어 사는 산 소망의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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