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쁨의조

하나님의 기쁨조
시149:1-5,계4:11





신생아실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면 누가 기뻐합니까?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애기 아버지가 되는 남편과 할머니 할아버지등 가족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기뻐하는 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만세전에 계획하시고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 택하시고 이미 하나님의 작정된 자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기쁨을 위해 창조하기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익,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 인생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시편149편4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우리를 통해서 기쁨을 얻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에게 기쁨을 선사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신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기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입니까? 본절의 하반절과 연결시키면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겸손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구원받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세주를 믿는 믿음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모든 만물은 주님의 뜻대로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창조하셨나요? 영광과 존귀함과 능력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쁨조라고 하면 우리는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여러분! 예를 들어봅시다. 오래전에 김일성 부자에게는 그 아버지와 아들 김정일을 기쁘게 하는 기쁨조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고위 당 간부가 그 기쁨조 가운데 한 사람을 어떻게 처형을 했거나 아니면 그 기쁨조를 데리고 자기가 놀아났다면 그 고위 당 간부는 어떻게 될까요? 숙청됩니다. 왜요, 지도자 동지의 기쁨조는 지도자 동지만큼 귀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자녀가 귀합니까? 안 귀합니까? 귀하지요. 얼마나 귀한지 말로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웃는 모습, 재롱 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와 가족들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나를 기쁘게 하던 자식은 정말 귀합니다. 나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만든 자식이 아닌 모든 생활에서 항상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만 하다가 세상을 일찍 떠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큰 상실감을 갖겠습니까?

그러면 자식이 부모에게만 귀합니까?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내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림으로 인해 부모님이 살 맛을 느끼시고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면 나 역시 부모가 생각하는 것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어쩌면 부모님 당신들의 생명보다도 더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압니까?. 정말로 귀하게 여깁니다. 천하 보다 더 귀하게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창조된 것이기도 하지만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주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면서까지 나를 사실만큼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를 택정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기뻐하심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여러 곳에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잠언16:7절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까지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고린도후서5: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살든지 죽든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로마서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범사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첫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이 되려면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은 어느 정도의 믿음이어야 합니까?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인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찾아왔던 백부장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가서 고쳐 주리라고 했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제발 집에는 오시지 말고 말씀만 해주시면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무 기뻐하면서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시편147:11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다른 번역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을 예배하고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동이 일종의 예배입니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예배는 많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예배드리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4장2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공식적으로 짜인 틀 속에서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도 있지만 예배는 폭넓게 드려집니다.

우리가 너무 정형화된 예배, 주일에 드리는 예배, 수요일에 드리는 예배 등 어떤 형식과 틀에 짜 맞춘 예배만 예배로 인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예배가 혹시라도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틀에 짜인 예배는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못했다고 하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단순한 행위를 더욱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시편69:30-31절에 보면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형식화된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행위 보다는 오히려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더 나은 예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노래로 찬송을 부르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제단에 제물을 준비하여 드리는 의식화된 예배보다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찬송하나만 잘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봉사를 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올려지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시편149편1-3절 말씀을 보면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춤을 추며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5절에 보면 기쁨으로 노래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도 찬양하고 노래하며 기쁨으로 찬송하라고 했습니까? 4절에 보면 이렇게 하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예배는 모든 것입니다. 어느 한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찬양만 예배가 아닙니다. 설교만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만 예배는 아닙니다. 이 모든 요소 하나가가 예배요 이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틀에 짜인 예배가 됩니다. 예배는 모든 것입니다. 시편20:1절 이하에 보면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소제와 번제를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예배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다양한 예배를 다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찬양예배든 정통적인 예배든 말씀의 예배든 성찬식이든 다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예배를 잘 드리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배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갈 때 ‘오늘 예배가 너무 좋았습니다’ ‘오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바람직한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나의 만족을 위해서 드리는 것처럼 되다보니 내 마음에 감격이 없으면 예배가 따분하고 예배가 잘 못 드려진 것으로 느끼게 되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예배는 내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유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예배입니다. 이사야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람의 계명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산제사를 드려라고 했던 것입니다. 시편113편3절에 보면 해뜨는데서부터 해지는데 까지 주 이름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를 드려라는 것입니다. 가능합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배는 일정한 틀에 매인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예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34:1절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넓은 의미에서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이 예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0장31절 말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유 짜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젖을 짤 수 있다”

이렇듯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는 삶은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결국 예배가 될 수 없고 예배의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배의 삶이 아닌 삶은 육신의 삶이요, 이런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적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떤 힘을 가져야 할까요? 히브리서12장 28절에 보니까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혜를 받는 일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의 창조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삶 가운데 하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복음전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시지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 둘을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맏아들은 숙맥같이 일을 잘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약삭빠르게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에게 분배될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랐습니다. 하도 조르니까 못이긴 척하고 주었습니다. 아들은 해외에 나가서 다 탕진했습니다. 거지로 죽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둘째가 돌아올 때도 맏아들은 들에 나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돌아온 것을 너무 기뻐하여 동네 사람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소를 잡았습니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들에서 돌아와 보니 집에 야단법석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와서 기분 좋게 잔치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맏아들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맏아들이 아버지께 찾아가서 따졌습니다. “아버지, 나는 집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양한마리 잡아주지 않으시더니 어찌하여 동생은 돈을 다 허비하고 돌아왔는데 이렇게 풍성한 잔치를 열어줍니까?” 이때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왔을 때, 즉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천국에서는 잔치를 엽니다.

디모데전서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시는 일로 여기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터넷에 갓피플 닷컴이라는 기독교 사이트가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오는 사람들 3천명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한 3천명 중에서 86.3%가 전도는 부끄럽고 어려운 것으로서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전도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도가 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전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전도는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를 것입니다.

김익수 전도사는 김익두 깡패를 전도했습니다. 전도 받아 예수를 믿은 김익두 깡패는 목사가 되어 초대교회 부흥사로 유명합니다. 백유계라는 사람은 최봉석 청년을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최봉석 청년은 예수를 믿은 후 목사가 되어 전국을 누비며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 천당” 이라고 외치며 다녔던 최권능 목사로 유명합니다. 킴볼은 평생에 무디 한 사람을 전도했지만 무디는 백만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내가 비록 한 사람들을 전도하지만 그 사람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전도자가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내가 심은 것은 씨앗 하나지만 그 씨앗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는지 모르듯이 말입니다.

에스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구원받는 백성들,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전도하십시오. 복음을 전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봉사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보면 빌립보 교회가 구제헌금을 해서 부쳤는데 그것을 본 바울은 그 헌금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했고 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제물이었다고 했습니다.

공평과 진실을 기뻐하십니다. 잠언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보세요. 형식에 짜인 예배를 드리면서도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헌신예배와 다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는 주의 종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해에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드렸는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여 하나님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전건축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6:7-8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건축할 마음이 있는 것이 좋다고 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조들입니다. 오직 나의 존재 가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당신의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기쁨의 일을 찾으셔서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구약시대 에녹이란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서울 세브란스 병원의 김복남 전도사의 간증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의수족을 한 환자를 부러워 여기는 휠체어 환자가 있었고, 휠체어 환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도’라고 고백을 하는 경추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위만 살아 평생을 누워지내야 하는 경추환자를 보며 눈물을 짓는 한 여인이 김복남 전도사님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전도사님,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내 남편이 지금이라도 눈을 떠서 6년 동안 간호하는 내가 자기 아내인 것을 알아보고 \"여보\"라는 말 한번만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이라는 말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어떤가요? 마음대로 사랑할 수 있는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삶이 얼마나 많은지요? 보이는 두 눈과, 들리는 두 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눈을 흘기며, 표독스러운 모습으로 살아 왔으며,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수많이 듣고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요? 어디 그 뿐입니까? 하나 뿐인 입을 가지고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나누어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 짧은 시간을 얼마나 헛되이 보냈습니까? 하나님을 전능하신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이 오장육부와 모든 감정을 동원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