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쁨 나의 기쁨 눅15:3-7
이 시대는 상실의 시대(The Lost Generation)입니다. 지나치게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다 보니 본질적이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을 받고 사람을 대신 죽여주는 살인 청부업이 있습니다. 돈 몇백만원 받아내려고 손을 자르기도 합니다. 생명의 가치를 상실한 모습입니다. 친구관계도 이해득실에 의해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사귀고 필요 없다고 판단되며 신의를 버립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야인시대에 나오는 구마적을 때려눕히고 종로를 누비는 김두한을 동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조폭들이지만 끝까지 의리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참된 우정을 상실한 모습입니다. 가장 순결해야할 사랑마저도 이기심에 의해 좌우될 때도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헌신짝처럼 짓밟히는 사랑의 아픔도 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환상의 무지개를 좇는 자아의 상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내 안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 때도 많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잃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제 안에 잃어버린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한 간증입니다.
제가 싱가폴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을 때입니다. 아파트 한 가구에 4개의 방이 있습니다. 3개의 방에는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2명씩 방을 쓰고, 우리는 일가족 3명이 방 하나에서 살았습니다. 워낙 아파트가 오래 되서 에어컨을 틀어도 땀이 납니다. 그래서 거의 문을 열어 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책상에 두었던 생활비 300불이 없어졌습니다. 분명히 책상 위에 두고 잠깐 밖에 나갔다 왔는데 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심할 수도 없고, 혹시 다른 곳에 두지는 않았나 몇 시간을 찾았습니다. 책을 모두 뒤지고, 옷 주머니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수업을 하는데도 머리에는 온통 300불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돌아와서 다시 잃어버린 300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은 15일동안 먹고 살 생활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심한 가운데 소파에 걸터 앉아있는데 갑자기 제머리를 때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 이놈아! 너 생활비 300불이 그렇게 중요하냐? 내가 너를 지금까지 인도했는데 나를 그렇게 애타게 찾아본 적이 있느냐? 나를 잃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까짓 300불을 찾기 위해서는 온 정성을 다 쏟느냐? 내가 잃어버린 300불 만큼의 가치도 없느냐?\\\"
성령님의 강력한 책망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무릎을 꿇고 회개를 했습니다. \\\"주님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을 했지만 300불 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주님을 섬겼던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눈물로 주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오히려 감사가 나왔습니다. 비록 생활비가 없어 먹지 못할지라도 잃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한번 발견했다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싱가폴 한인교회의 손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이 나가시면서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그 속에는 정확하게 잃어버린 생활비 3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것은 조금만 잃어버려도 그토록 미련을 가지고 찾으려고 애쓰면서도 내 안에 잃어버린 주님을 찾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요?
오늘 말씀은 잃어버린 양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3가지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 탕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3가지 비유 모두 잃어버렸다가 찾았을 때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이 성한 나라입니다. 목자는 양을 끌고 하루종일 풀을 찾아다니며 양을 먹입니다. 해가 질 때면 양무리를 몰고 우리로 돌아옵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문 앞에다 막대기를 걸쳐 놓고 한 마리씩 그 막대기 밑으로 통과하게 합니다. 이때 목자는 양들의 숫자를 세며, 상태를 확인합니다. 혹시 다리가 부러지거나 아픈 곳은 없는지. 풀은 제대로 먹었는지 한마리씩 검사를 합니다. 마지막 양이 막대기 밑을 통과할 때 백마리가 맞으면 비로소 목자는 문을 잠그고 집으로 쉬러 갑니다. 그런데 백마리 가운데 아흔 아홉 마리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다. \\\"어딘가 있겠지? 내일 날이 밝으면 확인하면 되지.\\\" 문닫고 돌아가면 그것은 틀림없이 삯군 목자입니다.
참된 목자라면 어떻게 할까요? 다시 양들을 우리 밖으로 끌어내서 다시 헤아립니다. 혹시나 잘못 세지는 않았을까? 애타는 심정으로 양들을 다시 확인하고 점검합니다. 그래도 모자라면 어떻게 할까요? 즉시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혹시 절벽이나 가시덤불에 빠진 것은 아닐까? 혹시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닌지? 맹수의 공격을 받아 끌려가지는 않았는지? 불길한 생각을 떠올리며 양들이 있었던 곳으로 줄달음칩니다.
그런데 먼 곳에서 양의 목맨 소리가 들려옵니다. 다행히 양은 무사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아마 목을 끌어안고 뽀뽀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기뻐서 노래를 부르며 어깨춤을 춥니다. 찾을 양이 너무 귀하기에 끌고 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무거워도 어깨에 둘러매고 신나게 달려옵니다. 이것이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만약 삯군 목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왜 너 내말을 듣지 않고 네 맘대로 다녀. 너 때문에 내가 잠도 못자고 고생했잖아.\\\" 발로 한번 걷어 차거나 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올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참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차이입니다.
양을 찾은 목자는 친구들을 향해 소리를 칩니다. \\\"찾았어.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이런 사건을 자주 목격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을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양>은 누구를 의미하고 있습니까? 먼저 15장 1-2절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세리는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는 직업을 가진 자입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죄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못마땅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더럽고 천박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던지시는 비유가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입니다.
따라서 잃어버린 양은 바로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세리들,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종교인들이 아니라 사회적인 무관심과 냉대 속에 버림받은 자들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씀하셨습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를 찬양한 존 뉴턴은 젊었을 때에 노예를 잡아다가 팔아 먹은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노예 사냥을 해서 쿠바에
데려가 팔았습니다. 그곳까지 오는 동안 오분의 일은 죽었습니다. 그 중에 반항하는 자는 용서 없이 바다에 던저 버렸습니다. 그렇게 잔인한 일을 한 그가 웨슬리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여 영국에서 목사가 되었고,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뉴턴과 같이 노예상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관심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잃어버린 양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교회 안에 있는 양떼도 중요하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잃버린 양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목자의 관심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만약 목자가 양들을 사랑하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많은 양들 가운데 어느 양이 없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참된 목자는 매일매일 저녁이 되면 양들을 확인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반드시 점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사명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목자가 되려면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목자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같이 세상적으로 소외되고 버림받은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배부름 속에 편안히 거하고 있을 때에 먹지 못하고 배고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세상의 향락과 문화 속에서 잃어버린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눈 앞의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허탄한 것을 좇는 자들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져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무관심과 사랑 없음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방황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바로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주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 신음하고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해야할 일입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상실의 아픔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보다는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고자 하는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곳에 카메라 렌즈를 맞추시고 새롭게 조명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많은 짐승 가운데 잃어버린 양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양의 특성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과 흡사한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양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10미터 이내의 물체만 식별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절벽으로 떨어지거나 가시덤풀에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를 노리고 있는 맹수들을 볼 수 없습니다. 양은 자신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사나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맹수가 공격을 하면 꼼짝없이 잡혀먹기 마련입니다.
양은 물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짐승은 물에 빠지면 수영을 하지만 양은 수영을 못합니다. 솜이불이 물에 빠지면 얼마나 무겁습니까? 양털이 물에 젖으면 몸이 무거워져 수영을 못하고 빠져 죽습니다.
양은 스스로 집을 찾아 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목자가 안전하게 인도하고, 지켜주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양들이 길을 잃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은 언제나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목자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딴 짓을 하고, 무리를 이탈하면 길을 잃게 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일에 너무 집착하거나 빠지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기도의 교제가 끊어지면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면 더 이상 목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순간 세상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맹수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언제나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 많은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주님 품을 떠나려고 발버둥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미련한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양과 같이 미련하게도 제 길로 가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사사기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350년 동안 암울한 역사를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의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온 몸으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길을 잃고 헤메는 우리들을 못 본체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 목자가 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합니다.
에스겔 34:11-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
하나님은 지금도 길을 잃은 양들을 찾고 계십니다. 캄캄한 밤에 헤메고 있는 양들을 건져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관심이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최고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15장 7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먼저 믿은 우리들을 통해서 잃은 양을 찾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교회를 기뻐 받으실까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고, 재정이 풍부하고, 많은 사람이 모일지라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관심이 없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영혼구원에 관심이 없는 교회는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것은 너희들끼리 잘하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같이하니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좋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우리끼리 좋은 교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복음들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환란과 핍박 속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들고 흩어진 결과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고,생명력이 넘치고, 칭찬받는 교회, 영향력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지교회는 새로운 도약과 부흥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벌써 10월 달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흥의 꿈을 이루는 비결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서 관심과 사랑을 가지는 것입니다. 절벽 앞에 서 있는 영혼, 가시덤불 속에서 상처입고 울고 있는 영혼, 어둠 속에서 갈길을 몰라 방황하는 영혼들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는 목자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발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격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찾았구나. 그토록 신음하던 상처입은 양을 찾았구나. 나와 함께 기뻐하자. 즐거워 하자\\\" 생명의 잔치 자리에서 유쾌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기쁨의 웃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생명의 잔치 자리가 바로 11월 27일 예수생명잔치 날입니다. 우리모두 주님의 생명잔치에 동참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잃은 양을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구역원들 가운데 믿다가 낙심하여 잃어버린 영혼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생명잔치에 초대되어야 합니다. 주일 출석에 열심히 없는 식은 고구마들도 초청대상입니다. 누구든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생명잔치에서 함께 주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요 나의 기쁨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 풍성한 잔치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더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2002 예수생명잔치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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